사도행전 강해 25. 하나님께 쓰임 받는 성도
사도행전 6:8-15
8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1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오늘 살펴볼 내용은 선출된 일곱 리더들 가운데 스데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사역이 7장에까지 이어집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사도들의 사역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성령 충만했던 성도들의 사역도 기록합니다. 스데반으로부터 시작하여 빌립,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던 실라, 이방인이었던 고넬료 등, 성령께 사로잡힌 사람들을 통해 이루시는 복음 사역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사도들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이해하기 보다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성령행전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은 스데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8절에 보니까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첫째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성도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합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다고 합니다. 은혜가 충만한 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저 사람은 참 은혜가 충만해 라고 할 때 여러분은 어떤 모습을 보고 그렇게 평가하십니까?
은혜는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구원이죠. 구원을 은혜로 받지 않습니까? 은혜를 받게 되면 그에 대한 반응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데, 그 중 대표적인 반응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바울 서신서들을 보면 그가 각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감사하는데, 먼저는 성도들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들을 보면서 감사하거든요.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2–3
2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은혜의 반응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입니다. 따라서 은혜가 충만하다는 것은 믿음충만 사랑충만 소망충만입니다.
또한 권능이 충만했다고 합니다. 권능의 충만은 권능의 주체이신 성령하나님께 온전히 붙들린 상태를 말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성령 하나님 앞에 굴복시켜 성령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은혜와 권능 충만으로 인해 나타난 결과가 바로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은혜와 권능의 충만은 사도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날로 하면 은혜와 권능의 충만은 목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직과 평신도를 나누어 목사나 선교사들은 성직, 즉 일반인들과는 구별된 거룩한 직분자로 분류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특별한 은혜와 권능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성직과 평신도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성직자들이고 성도들에 의해 선출된 일곱명은 평신도 사역자들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사도가 아니었지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습니다. 사도들이 했던 사역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직과 평신도의 구별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러한 계급적 직분론은 로마 카톨릭의 유산입니다.
성경적인 이해는 모두가 성도이고, 성도들은 모두 성직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목사나 가정에서 집안일을 하는 주부나 동일한 성직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성직입니다. 그 일의 가치와 중요성이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은혜와 권능의 충만은 모든 성도들에게 필요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 쓰임 받는 성도는 자신이 잘하는 것으로 섬기는 성도
사도행전 6:9–10
9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스데반은 특별한 대상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유민들이라고 소개된 이들은 로마의 포로로 글려갔던 유대인들의 후손들입니다. 이들은 문화적 배경이 헬라권이었습니다. 유대인들과는 언어나 문화가 달랐습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것입니다. 당시 마을 마다 회당이 있었는데 율법을 교육하고 또 모임의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들이 자신만의 회당을 세우고 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이들에게 복음에 전한 것입니다. 그것은 스데반이 헬라 문화권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어떻게 접근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뉴질랜드에서 사역할 때 이민 2세대 청소년 사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아이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처음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전에 저희 교회에 몽골에서 온 형제가 함께 신앙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유학생들만 모이는 교회로 갔습니다. 문화와 정서가 비슷한 공동체를 찾아간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헬라권 문화에 속한 사람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헬라문화와 정서를 잘 아는 스데반이 적합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끌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모이는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달란트가 각각 다릅니다.
어떤 분은 어린이 사역에 은사가 있는 분이 있습니다. 청소년 사역이나 청년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의 문화나 정서를 잘 이해하고 필요한 메시지를 전하는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초신자들 보다는 이미 신앙생활을 하셨던 분들을 말씀 안에서 건강한 신앙으로 인도하는 일이 잘 어울립니다. 그것은 제가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신앙을 갖게 되어서 초신자들을 이해하는 부분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의 약점이기고 합니다.
그래서 제 설교는 초신자들보다는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하신 분들이 이해하기 좋습니다. 그렇다고 나는 왜 설교를 초신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지 못하는가! 자책하지 않습니다. 약점에 집중하기 보다는 장점을 살리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짧은 인생 살아가면서 약점을 보완하는데 시간을 사용하기 보다는 장점을 강화시키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못하는 일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가르치는 일로, 어떤 분은 찬양으로, 어떤 분은 몸을 쓰는 섬김으로 각자 잘하고 좋아하는 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의 사역과 바울의 사역의 대상이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고 바울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달란트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사역에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각자가 마음이 써지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교육에, 어떤 분은 선교에, 어떤 분은 구제사역에, 어떤 분은 예배에, 어떤 분은 친교에 관심을 갖고 그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모두가 중요한 사역입니다. 어떤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잘하는 것에 헌신할 때 교회는 든든하게 세워질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성도는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성도입니다.
10절입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당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사역은 자신의 지혜나 능력이나 경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성령님의 도움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지혜롭게 말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말의 지혜가 없으면 아무리 바르고 합당한 말이라도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지혜롭게 말하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해하고 납득되도록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 곧 주제를 논리를 가지고 정연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힘든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많은 일들이 말로서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말에 지혜가 없으면 하나님께 쓰임받기가 어렵습니다. 말실수 때문에 공동체가 갈등을 일으키거나 분열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특히나 주의 일을 함에 있어 지혜롭게 말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또 성령으로 말한다고 했는데, 성령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그의 입술을 사용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의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이성과 움직이셔서 해야할 말을 하게 하십니다.
본문에서 스데반은 헬라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단순히 복음을 선포한데 머문 것이 아닙니다. 논쟁했다고 합니다.
논쟁은 자신의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것입니다. 유대교를 믿고 있던 자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 논쟁에서 스데반을 당할 사람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것을 당해낼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전에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셨던 말씀 그대로입니다.
누가복음 12:11–12
11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스데반은 성령님께 사로잡혀 지혜롭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논쟁을 했지만 감정이 흔들리지 않았고 해야 할 말을 논리적으로 말했고, 지혜롭게 합당한 단어를 선택하여 핵심을 찌르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간혹 이러한 논쟁을 해야 할 경우들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과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논쟁할 때가 있지요. 이때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감정만 상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묻지요.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참으로 난감한 상황입니다. 만일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하면 평소 예수님께서 긍휼과 용서에 대해 말씀하신 것과는 상반된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반면, 용서하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범하는 것으로 예수를 고소할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몸을 굽혀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쓰십니다. 잠시 긴장된 침묵이 흐릅니다.
그리고는 일어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무슨 말입니까?
간음한 죄인은 돌로 치는 것이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죄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나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의 지혜를 보십시오.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것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많은 말이 아닙니다. 그 순간 가장 적확한 말로 사람들을 설득시킨 것입니다.
평소 교회에 불만이 있었던 고등학생이 전도사님이 천국과 지옥에 대해 설교하자, 손을 들고 질문합니다. 전도사님, 담배 피워도 천국에 가나요?
궁금해서 그런게 아니죠. 한번 대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담배를 피워도 천국에 간다고 하면 흡연을 방조한 것이고, 그렇다고 천국에 못 간다고 하면 더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참 난감한 상황입니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어 천국에 가, 그런데 좀 일찍 가”
여러분! 지혜와 성령으로 말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 하나님께 쓰임 받는 성도은 핍박과 고난을 감수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입니다.
회당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스데반과의 논쟁에서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매수하고 스데반을 거짓으로 고소합니다. 결국 공회에 붙잡혀 가게 됩니다.
사도행전 6:11–12
11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그들이 왜 이렇게 흥분한 것입니까? 스데반이 무엇을 전했기에 그들은 스데반이 전한 복음 가운데 어떤 것에 자극을 받아 이렇게 까지 하는 것일까요? 먼저 11절에 보면,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신성모독 죄입니다. 당시 신성모독죄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신성모독을 했다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이 사람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려 말했다”는 고 합니다.
거룩한 곳은 성전입니다. 즉 성전과 율법을 거슬리는 발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14절에도, “그의 말이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고”고 했다는 것이죠.
성전모독과 율법모독이 그 죄입니다. 도대체 어떤 말을 했는가? 이 부분이 7장의 스데반이 공회에서 한 설교에 반복됩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그들이 귀를 막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게 됩니다.
사도행전 7:46–53
46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47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51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성전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또한 율법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율법을 준수함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성전과 율법 이 두 가지는 생명처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이 두 가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결국 율법의 준수함에 있는 것이 안이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을 자극한 것이죠. 나중에 보면 그들이 귀를 막고 흥분하여 돌을 들어 스데반을 쳐 죽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성도의 모습은 핍박과 고난을 감수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을 하면 결국 핍박을 당하게 될 수도 있지만 담대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데반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성도의 모습을 네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성직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여 씀임 받는 것처럼 가치 있는 인생이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 은혜와 권능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강점으로 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핍박과 고난이 올지라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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