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09-29 15:43

32.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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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32. 

 

사도행전 8:1–13 

1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9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 

12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3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흩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큰 박해 때문이었습니다. 

1절을 보면, 

“1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일 만큼,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이 그동안 믿던 하나님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증언했던 사람은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스데반입니다. 

공회의 증언은 공적이란 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십자가에게 죽은 예수가 부활하였고 그가 그리스도 곧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당시 두 가지 반응으로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는 회개하고 돌이켜 믿음을 갖게 되는 경우입니다.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 이후에 3천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또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던 중 선천성 앉은뱅이를 고치고 이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5천명까지 회심자가 늘어간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가 그리스도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회개하는 것이고 그 결과 죄사함을 받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선포된 복음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회개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한 부류는 복음증거자들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최고의 지성인들이라고 하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이었습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중 열심 있는 사람들이 이 복음에 가장 적대적이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1절에 언급된 사울입니다. 

사울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신약성경의 3분의 2를 저술한 사람입니다. 그는 대단한 신학자이며 복음증거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복음 증거자들을 붙잡아 고문하여 죽이는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1절 이전에도 한번 언급된 적이 있는데,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입니다. 

당시 신성모독은 돌로 쳐서 죽였는데 이때 가장 먼저 돌을 던지는 사람은 증인이어야 했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만 돌로 처형하는데 스데반은 공회 앞에 증언한 내용은 신성모독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분노한 공회원들과 유대인들의 손에 이끌려 성전 밖으로 끌려갑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그곳으로 질질 끌려갔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사람들은 저마다 주먹만한 돌을 집어 듭니다. 겉옷을 벗습니다. 옷을 왜 벗는가? 그것은 피가 튀겨 자기 옷에 묻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그 옷을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사도행전 7:58

58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사울은 스데반이 죽을 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참혹하게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행전 8:3

3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복음이 바르게 증거 되면 이렇게 두 개의 상반된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어떤 종교도 자신들의 신앙의 내용을 증거 한다고 해서 이러한 반응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불교가 그렇습니까? 또는 천주교가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다른 종교에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기독교의 복음에 대해서는 이러한 상반된 반응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왜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그토록 분노하여 복음 전하는 자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복음이 우리 내면에 숨겨진 죄의 더러움을 들추어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빛과 같아서 우리에게 비출 때 내면의 모든 더러움을 폭로시킵니다. 우리의 죄성은 그것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지성이나 인격적인 고상함으로 그 더러움을 포장했던 사람들에게 참지 못하는 일입니다. 

 

스데반을 통해 복음을 들은 공회원들은 ‘이것이 과연 사실인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내면의 죄를 폭로한 스데반을 죽임으로 자신들의 의로움을 정당화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세상입니다. 

2017년 9월 문재인정부는 중소기업벤처부를 발족하면서 초대 장관으로 포항공대 박성진교수를 지명했습니다. 그는 인사청문회에서 그가 가진 신앙관에 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더불어민주당 김병관의원이 질의합니다.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지구 나이가 6천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부분에 동의하시나요”

그의 대답은 

“저의 신앙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의원들은 어이가 없어 합니다.

국민의당 이찬열의원이 다시 질의합니다. 

“지구의 나이가 몇 년이라고 하셨지요“

신앙적으로 6천년 이지만 거기에 있는 하루나 한 시간이 지금 우리가 애기하는 것하고 다를 수 도 있고요“

그의 말을 막고는 조롱하듯 말합니다. 

“이게 국무위원으로서 과연 할 애기입니까?”

 

당시 대부분의 언론들은 그의 신앙관을 비난하는 방송을 합니다. 

제가 주목한 것인 이것입니다. 현정부에는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죠. 그 내용 중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차별이나 혐오 표현을 할 수 없다 라고 적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박성진교수는 종교적인 이유로 혐오를 당하였고 차별을 당하였습니다. 그것도 차별금지법을 주장하는 정치인들과 언론으로부터 말입니다. 

 

창조론을 믿는 것과 중소기업벤처부장관의 일이 무슨 연관성이 있나요?

과연 미국이나 영국에서 인사 청문회가 열렸다면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다는 이유로 이러한 조롱을 받게 될까요? 

결국 그는 자진 사퇴하고 맙니다. 

 

만일 그 자리에서 국회의원들과 창조론이 맞는지 또는 진화론이 맞는지 토론을 해보았다면 박성진교수의 논리에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진화론의 허구성을 밝히고 창조론이 과학성을 밝힐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창조론 자체가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한 것 자체가 인정하기 싫고 듣기 싫은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을 장관 자리에 앉히는 것이 못마땅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사실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것처럼 보일뿐입니다. 그들은 객관적이거나 합리적인 것 같으나 사실은 감정적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에 대한 한국사회의 비난과 조롱이 과연 객관적인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수단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故 이태석신부는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수단의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섬기다 암에 걸려 죽고 맙니다. 그의 이야기는 울지마 톤즈라는 통하여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개신교에 과연 故 이태석신부와 같은 사람이 과연 몇 명이 될까요? 수 백명 아니 수천명이 넘습니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등 가난한 나라에 학교를 세우고 복음을 증거하다 죽어간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그들을 주목하지 않죠. 

 

지금도 이 사회의 어둡고 가난한 지역에서 묵묵히 헌신하며 수고하는 많은 이들이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희생과 섬김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간혹 발생하는 불미스런 일에 기독교인들이 연루되면 언론을 그것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여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적대감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러한 적대감은 과연 정상적일까요? 

 

물론 한국교회가 잘못한 것도 많습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할 부분도 많습니다. 세상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개혁해야 할 부분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현시대 가운데 보여 지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세상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듯이 지금도 기독교 신앙을 비난하고 조롱하며 죽이려고 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외치는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조건 죽이려고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적대감과 미움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7:7

7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요한복음 15:18–19

18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한1서 3:13 

13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고 이미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은 죄인들의 내면에 감추인 더러운 죄를 폭로해 내기에 그것을 참지 못하고 적개심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을 향한 세상의 적개심과 미움은 우리를 향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길을 따라가게 되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움은 개인적인 실수나 연약함 또는 인격적인 미숙함이나 분별력 없는 행동 때문에 당하는 것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전파하면서 그 복음대로 살고자 할 때 당하는 미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신가족에 시집을 가 명절 때마다 제사문제 때문에 갈등하는 성도님들이 계시죠.

이런 저런 비난을 들을 것입니다. 그들은 조상을 위해 제사하는 것은 죽은 조상의 영혼이 떠돌아다니다 제삿밥을 먹기 위해 온다고 믿는 아닙니까? 그러면 영적을 존재를 믿는 것이죠. 영적존재를 믿는 그들이 성령님이 계심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실에 관심이 없습니다. 

무조건 미워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믿음 때문에 당하는 미움이라면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늘에서 받는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10–12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두 번째는 이러한 세상의 박해와 미움 속에서 성도들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위로가 되어 준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2 

2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스데반이 죽자 경건한 사람들은 그를 장사하였습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처형당한 죄인의 신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반적인 장례식은 시신을 씻기고 향유와 몰약을 바르고 세마포로 온몸을 쌉니다. 그런 후 시신을 들 것에 실어 매장지로 옮깁니다. 장례 행렬 선두에는 고인의 부인이나 모친 등 여자가 서서 길을 인도했습니다. 이때 친척이나 친구, 전문적으로 곡하는 여자들, 피리 부는 자들이 동행했습니다. 또 슬픔의 표시로 옷을 찢거나, 가친 베옷을 입었습니다. 장지로 도착애서는 시신을 무덤에 매장하거나, 동굴에 안치한 쉬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입구를 돌로 막습니다. 한편, 보통 사람의 장레는 7일간 애도 기간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신성모독으로 처형당한 죄인을 위해서는 이러한 장례절차 없이 바로 묻어버렸습니다. 

애곡하는 것도 금지시켰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었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공회의 결정과 처형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장례식을 치루며 그의 죽음을 기념했습니다. 이들이 돌을 치우고 스데반의 시신을 꺼내 장례절차를 진행했는지 또는 돌무더기 앞에서 모여 애곡하며 장례식을 치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의 죽음 앞에서 두려워 도망한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 그의 죽음을 기념했다는데 있습니다. 이후 이들은 예루살렘에 있었던 큰 박해로 말미암아 곳곳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여러분 만일 경건한 사람들의 이러한 장례식이 없었다면 그의 가족들은 어떠했을까요?

그 죽음 앞에서 절망하며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평생을 주변 사람의 조롱과 비난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준비해 준 장례식을 통해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순교자의 삶을 살았음을 감사해 했을 것입니다. 그의 아내가 있었다면 남편을 자랑스러워하며 자신도 남편이 걸어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을 것입니다. 자녀들은 그러한 아버지를 존경스러워 가슴 뿌듯해 했을 것입니다. 

 

장례식은 죽은 자를 위해 있지 않습니다. 장례식의 목적은 남겨진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유족들과 함께 하면서 슬픔을 함께 나누고 천국이 소망으로 위로하는 것이 장례식의 목적입니다. 

 

저희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셨을 때 우리 성도님들께서 멀리 창원까지 내려 오셨습니다. 

그날이 추수감사주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슬픔속에서도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저희 장인어른은 화장을 했는데요, 그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고인이 된 장인어른의 운구가 화구로 들어가는 시간이었습니다. 하관예배 마지막 설교가 마치고 찬양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도들은 반원으로 모여 “천국에서 만자 보자”를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 큰애 희수가 앞으로 나오더니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희수가 3살 때입니다. 가장 슬프고 아픔의 순간 희수의 춤은 모든 사람에게 웃음을 선사했습니다. 가장 큰 위로를 받은 것은 장모님과 저의 아내였습니다. 

죽음 앞에서 추었던 희수의 그 춤사위를 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장례식은 유가족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죽은 자를 기억하며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소망을 품고 감사하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에게 애도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한국의 경우 3일장을 치룹니다. 아마도 그 정도의 애도 기간이 필요하다 판단해서 일 것입니다. 뉴질랜드에서 몇 번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우리처럼 3일 동안 하지 않고 어느 한 날을 잡아서 교회나 장례식장에서 예식이 진행됩니다. 

예배당으로 운구가 들어오고 평소 고인을 추억할 수 있는 물건들이 관 주변에 놓이게 됩니다. 

장례절차는 목사가 인도합니다. 식 중에 고인과의 추억담을 이야기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것이 길어지면 2시간 3시간까지 늘어나기도 합니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고인과 연관된 에피소드를 듣습니다. 

 

한번은 함께 성가대를 했던 어르신의 장례식 때였습니다. 

그분의 관 옆에는 스키가 있었습니다. 그의 삶을 추억하는 영상에는 스키를 타는 모습이 담겼습니다. 그의 손녀들의 추억담을 들으며 성도들은 자주 웃었습니다. 제가 다 알아듣지 못해서 무슨 이야긴지는 모릅니다. 그분은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함께 찬양을 불렀고 늘 유쾌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저는 그 분이 워낙 밝으셔서 암에 걸린 줄도 알지 못했습니다. 

 

성도들은 그 장례식을 통해 슬픔 속에서도 웃을 수 있었고 유족들은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여러분! 코로나 시대에 교회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예배는 영상으로 드린다고 해도, 가장 아쉬운 것은 성도의 교제입니다. 

험악한 세상 속에서 위로와 힘을 얻는 것은 성도의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교회를 적대시 하고 미워해도 성도들이 함께 할 때 넉넉하게 감당하고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 가운데 어려움이 있을 때 격려해 주시고 기도해 주는 분들을 통해 힘과 위로를 얻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아름다웠던 것은 그를 추모하는 경건한 사람들의 장례식과 애곡을 통해서 였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 주는 존재입니다. 

 

어려운 코로나 상황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교제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로는 도움을 주기도 하고 또 어려울 때 도움을 받는 것이 건강한 신앙입니다. 

추석명절을 앞에 두고 함께 조를 이루고 교제했던 분들에게 연락한통 하는 것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시고 또 기도제목도 나누십시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거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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