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41.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한 완벽한 계획
사도행전 10:9–23
9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5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17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19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23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우리는 계속해서 복음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되었는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만남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했던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극동방송국을 세운 김장환목사님은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역사가 일어나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십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동안 여러 만남들이 있었겠지만 그 중에서도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기적입니다.
이 만남을 통해 우리를 구원을 얻게 되었고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어떤 과정으로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오늘 본문은 로마사람 이방인 고넬료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 장면을 살펴보면서 지금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발견하길 바랍니다.
1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완벽하다
장소, 사람, 시간 등
내용은 이렇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로마에서 파견된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죠. 그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말합니다. 성경은 그때가 제9시, 우리 시각으로 하면 오후3시입니다. 우리는 저자 누가가 시간에 주목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천사가 말하죠.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고넬료는 즉시 하인 둘과 경건한 부하 한 사람을 욥바로 보냅니다.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는 53Km입니다. 성인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열두시간 이상 걸리는 길입니다. 그들은 가는 길에 하루를 유숙하고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목적지인 욥바로 향합니다.
이것이 한 장면입니다.
또 한 장면은 베드로입니다.
그는 욥바의 무두장이 -무두장이는 가죽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의 집에 유숙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갑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지붕은 평평하여서 마치 우리의 테라스처럼 다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9절에 보면 “이튿날”, “제6시”입니다.
언제로부터 이튿날입니까? 고넬료가 기도중 환상가운데 천사를 만난 다음날이죠. 제6시니까 정오입니다. 한낮에 햇볕이 가장 뜨거운 시간 욥바 해변가의 지붕에 올라 서늘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기도에 들어간 것입니다.
성경은 베드로가 기도하는 그 시간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성에 거의 도착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식사시간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식사가 다 준비되었으니 내려오십시오” 라는 말을 기다리며 기도합니다. 그때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늘로부터 보자기에 쌓여있는 짐승이 내려오고, 그 짐승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부정한 짐승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혐오스럽게 그것을 바라볼 때 음성이 들리죠.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베드로는 완강히 거절합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
그러자 두 번째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그 그릇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베드로는 어리둥절한 가운데 이 환상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였습니다. 아래층에서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베드로가 여기 있습니까?”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순간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죠.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이렇게 해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과 베드로가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장면에서 주목하는 것이 바로 타이밍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완벽한 타이밍에 진행되고 있음을 봅니다.
만일 베드로가 정오에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가지 않았다면 환상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부정한 짐승을 먹으라는 환상을 보지 못했다면 그를 찾아온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았다면 고넬료를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고넬료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일이 없었다면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들도 복음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파됨에 있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음을 봅니다. 장소와 시간까지도 완벽하게 통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복음 전파의 방법은 사람을 통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통해 복음을 듣게 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가 만나게 되는 사람, 그 사람을 만나게 되는 장소, 그리고 그 시간까지 완벽하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실행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누군가로부터 복음을 들었을 것입니다. 모태신앙으로 성장과정에 자연스레 예수님을 영접하신 분들이 있고, 불신 가정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회심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각자가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통해 복음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이 모든 배후에는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계획은 완전하고 그 실행도 완벽합니다. 내가 처한 어떠한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을 통해 가장 완벽한 때에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사는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북쪽 지방 갈릴리로 가시면서 사마리아로 통행하여 가자고 제안하십니다.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혐오의 대상이어서 그 지방으로 가지 않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굳이 사마리아를 통행해야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수가성에 도착했을 때는 햇볕이 뜨거운 정오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을에 가서 먹을 것을 사오라고 명하시고 우물곁에 쉬고 계셨습니다. 그때 저만치서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옵니다.
무언가 사연이 있는 여인입니다. 정오의 시간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우물을 뜨러 온 것입니다.
“물을 좀 달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과 그녀와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대화 가운데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 동거남임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삶의 허무를 남성과의 만남을 통해 채우려 했던 여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배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고, 그것은 영적인 갈급함이었고, 평소 궁금했던 예배의 장소에 대하여 예수님께 질문을 하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리라고 말씀하자,
여인은 그 대답이 시원치 않았던지, 그리스도가 오시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라고 답하십니다.
순간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잘 보십시오. 여기서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만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수가성 여인의 구원을 이미 계획하셨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우물가로 간 것입니다. 그녀가 정오의 시간에 우물라고 나온 다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녀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을 아셨기에 일부러 제자들을 마을로 보내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인편에서 생각해 봅시다.
그녀는 삶의 허무함과 무의미 속에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남성들과의 만남을 통해 삶의 결핍을 채우자 했습니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평상시와 같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정오의 시간 물동이를 이고 야곱의 우물로 향합니다. 그곳에 낮선 유대인 남자가 홀로 앉아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지역에 유대인이 있다는 것이 의아했을 것입니다. 바가지를 내려 우물을 뜨려 할 때 유대인 남자가 말을 걸어옵니다. “물을 좀 달라” 그리고 대화가 진행되고 마침내 그녀는 자신과 대화했던 남성이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됩니다.
여인의 편에서는 이 모든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형편과 사정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몇 시에 어떤 장소에 나오는지 까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녀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은 세밀하게 계획되었고 완벽하게 실행되었습니다.
이것은 어찌 사마리아 여인만 해당되겠습니까? 이것은 어찌 고넬료만 해당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성격, 성장과정, 삶의 현실 등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맞는 전도의 전략을 세우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서, 어떤 사람에게는 잠잠히 묵상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는 설교를 통해서, 어떤 사람에게는 뜨겁게 기도하는 중에 만나 주십니다.
그때 우리가 처한 삶의 상황들, 그때의 감정들, 그 모든 것을 배려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그때 나의 상황과 감정이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 무언가 갈급했던 상황이 아니었다면, 과연 예수님을 영접했을까요?
만일 그때 내가 계획한 모든 것들이 잘 풀리고 자신감이 충만한 상태였다면 예수님을 영접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내 능력과 지혜와 경험으로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상태에 있지 않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교만한 인간은 절박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나의 절박했던 상황들을 누가 컨트롤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때때로 닥쳐왔던 아픔과 절망의 시간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비록 그 일이 나의 잘못과 실수로 되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상황들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왜 그때 하나님께서 나의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막지 않으셨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시거나 지혜가 없으셔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그 상황가운데 두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이루려고 하신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요구하고 집을 떠날 때에 아버지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습니다. 탕자가 허랑방탕하게 살 때 자신의 종들을 보내 잡아 올 수 도 있었습니다. 그 정도의 재력과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보도록 허용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무엇을 합니까?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아버지는 알았습니다. 아들이 스스로 돌이키지 않는 이상, 그는 언젠가 아버지 품을 떠날 것을 말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깨닫고 굴복하기 전에는 결코 변하지 않거든요. 강제하거나 강압한다고 해서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습니다. 본인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막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 한번 하나님 없이 너희 맘껏 살아보아라. 네 능력과 지혜와 경험 의지해서 한번 살아보아라 하십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실패와 절망입니다. 그때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께로 나오게 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를 참고 기다리고 계셨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계획하고 진행하십니다.
2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구원을 위해 베드로의 종교적 관습과 편견을 깨뜨리시는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부정한 짐승을 먹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환상 중에 부정한 짐승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저항합니다. 하나님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음성이라면 한 번에 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완강하게 거부합니다. 그만큼 종교적 관습을 버리는 것이 쉽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 환상은 고넬료와의 만남을 준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을 부정한 자들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환상이 없었다면 결코 고넬료를 만나러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 종교적인 관습이나 신념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할 때가 있습니다.
올해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여러 논쟁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만이 진정한 예배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분들은 영상이든 예배당이든 상관없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예배당에 들어가지 못해 주저앉아 우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가정에서 잠옷 바람에 커피를 마시며 예배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 또한 잘못된 모습입니다. 가정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더라도 복장과 자세에도 신경 써야 합니다.
성경적인 예배는 예배당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코로나와 같은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흩어져 예배할 필요도 있습니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만 거룩하고 가정에서 영상으로 드리는 예배는 속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배당에 나와 헌금봉투에 드리는 헌금은 거룩하고 인터넷 뱅킹으로 교회구좌에 헌금하는 것은 속되다고 여기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성과 속, 거룩함과 세속적인 것에 대한 구분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하시면 거룩한 것이고 속되다고 하시면 속됩니다.
그 판단과 기준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도 성과 속을 구분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가대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가대만 거룩한 찬양을 부르고 다른 성도들은 속된 찬양을 부르는가? 그렇지 않죠. 그래서 성가대라는 용어보다는 찬양대가 맞습니다.
또 성전이라는 용어도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장소인데 그러면 나머지 다른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가?? 그렇지 않죠. 그래서 성전이라고 부르지 않고 예배당이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성직자라는 용어도 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성도들은 세속적인 일을 하는가? 그렇지 않죠. 모두가 각자의 부름의 자리에서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 또는 교역자가 맞습니다.
디모데전서 4:3–4
3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당시 혼인은 속된 것이다. 어떤 음식은 속된 것이라고 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은 선하니 감사함으로 받으라고 하십니다. 혼인도 음식도 다 하나님이 주셨기에 선한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성과 속을 단정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거룩한 것인가? 또 무엇이 부정한 것인가?
그 명확한 기준은 성경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함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행여 우리 스스로 만든 신앙의 틀 안에서 교회와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내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만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리고 그 판단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살아온 삶의 경험과 내가 습득한 지식의 한계 속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들은 내 지식과 경험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는 내 경험과 지식를 넘어서는 상황이나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 판단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의존해야 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상황이 우리 가운데 닥칠지라도, 우리가 그 상황을 허락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사람과 어떠한 일을 함께 하게 하실 때 그 사람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 당시에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고 난 뒤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 가장 완벽한 상황이었고 가장 완벽한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