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42. 경건한 자에게 임한 은혜
사도행전 10:23–33
23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24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27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28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30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32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33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사도행전 강해 42번째 시간입니다.
본문은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의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고넬료는 구원을 받게 되죠.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고넬료가 받은 은혜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입니다. 우리의 기특한 행위로 인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고넬료의 경건의 행위에 대하여 강조합니다. 이 부분을 살펴보면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와 애씀과 노력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볼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고넬료의 경건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구원하신 것이 그의 경건한 삶 때문임을 보여줍니다.
이 부분은 여러분이 오해 없이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한 행위를 많이 쌓아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선한 행위를 결코 간과하지 않거든요. 꼭 선한행위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선행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음을 강조합니다.
사도행전 10:2
2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사도행전 10:4
4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다음으로 22절입니다. 이 장면은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베드로를 만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사도행전 10:22
22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 대
그렇죠. 짧은 본문의 내용속에 그의 경건을 강조하는 장면이 세 번씩이나 등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선행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하나 주목하는 장면은 무엇인가 하면, 고넬료가 사람을 베드로에게 보낸 후 했던 행동입니다. 그는 베드로가 오기 전에 친지들과 주변의 친구들을 모았습니다.
사도행전 10:24
24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그는 앞으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있었지만, 무언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떠한 은혜를 베풀어 주고 있음을 직감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자신만 받는 것아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받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 한 장면은 이것입니다.
베드로가 집에 도착하여 들어올 때 고넬료의 모습입니다.
사도행전 10:25 (NKRV)
25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고넬료는 로마군대의 백부장입니다. 베드로는 식민국의 이름 없는 유대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보낸 사람임을 인정하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이것을 통해 그의 겸손함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늘 기도하며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이웃과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성경은 그가 보여준 이와 같은 삶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빌립이 만나 복음을 전했던 에디오피아 내시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달리는 마차에서 이사야 성경을 읽을 만큼 말씀을 사모했던 사람입니다. 에티오피아에서부터 성전이 있든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할 만큼 하나님을 향해 열정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빌립을 그에게 보내시고 복음을 듣게 하셔서 구원하셨습니다.
이렇듯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아무에게나 무작위로 베풀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하여 구원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 그리고 겸손한 자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잠언 8:17
17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성경은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결코 간과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2:12–13
12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의 구원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야 할 만큼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13절이 중요하죠. 구원을 위한 우리의 노력과 애씀이 결국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려는 마음의 소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소원을 행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애씀과 노력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소원도 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신 일입니다.
그러니까 고넬료의 경건과 겸손은 결국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라 고넬료 자신도 스스로도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은혜라고 말할 때는 것은 항상 과거를 뒤돌아보면서 하는 고백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나의 의지와 결단과 노력과 애씀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말이 되어 한해를 돌이켜 보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지나온 세월이 하나님의 은혜였구나를 깨닫습니다. 아! 그때 참 힘든 순간이었는데, 돌이켜 보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구나 깨닫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당시에는 어땠습니까? 당면한 현실 앞에서 내가 결단하고 애쓰고 노력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돌이켜 보니까 그러한 나의 기특했던 모습 또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고린도전서 15:10
10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의 고백을 잘 보십시오.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라고 합니다. 그는 애쓰고 노력했습니다. 그 애씀과 노력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으니 자동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니 저렇게 복음을 전하고 순교의 자리까지 갔지 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당면한 현실의 문제 앞에서 애쓰고 노력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까? 의지력을 가지고 노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바울의 모습을 본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의 또 다른 고백을 살펴봅시다.
고린도전서 9:24–27
24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바울은 구원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 훈련을 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당시 마라톤 선수나 씨름선수가 훈련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상을 받기 위해 절제하고, 부지런했으며, 끊임없이 훈련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의지와 노력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년 전에 교회가 이곳으로 왔을 때, 주변에 여러 식당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김밥집 하나 남았습니다. 분식집 한 곳은 치킨 집으로 업종변경을 했고, 제가 자주 갔던 만두 전골집은 문을 닫았습니다. 제가 새벽에 기도하고 집에 가는 시간이 아침 7시입니다. 그때 딱 한집 문을 열고 장사를 하는데 바로 김밥집입니다. 부부가 장사를 하시는데요, 저는 그분들의 부지런함과 노력이 코로나 위기에도 불구하고 생존할 수 있게 했다고 봅니다.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죠. 그만큼의 애씀과 노력의 결과입니다. 그것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승진도 하고 좋은 평가를 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애씀과 노력에 대하여 정당한 평가를 해야 합니다. 없는 살림에 먹을 것 입을 것 아껴가며 저축하고 아파트 장만한 가정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애씀과 노력에 대하여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다 하나님의 은혜지 뭐,” 라고 하는 것은 말은 맡지만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부모 잘 만나서 그런거지”라는 판단도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됩니다. “우연히 그렇게 된 거야, 시기와 기회를 잘 타고 났어” 라는 것도 바보들이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변에 은혜 받는 분들, 축복 받는 분들을 보면서 그들이 얼마만큼 치열하게 살아가는지, 얼마만큼 부지런히 애쓰고 노력하는지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돌아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현실 속에서 내가 흘린 땀과 눈물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결단하는 일이고 내가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거야”라는 것이 우리의 게으름과 나태함을 포장하는 말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면에서 지금 우리는 너무 안일하게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코로나 상황이기에 어쩔 수 없다며 열정 없는 신앙을 계속해서 타협하지는 않습니까?
고넬료에게 임한 구원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의 경건함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항상 기도하며 구제하는 일을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과 겸손의 모습을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 그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히브리서 10:38–39
38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코로나 상황 속에서 여러분의 믿음이 행여 뒤로 물러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은 계속해서 상향 진보해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는 심는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공부하지 않고 시험에 합격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운동하지 않고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신앙이 진보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서 신앙의 진보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자신과의 연약함과 치열하게 싸우지 않으면서 인격의 성숙함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서점에 가니까 베스트셀러에 이 책이 있더군요.
제목이 “나의 하루는 4시30분에 시작된다.”입니다. 저자 김유진변호사는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에모리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했습니다. 미국 2개 주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현재는 모 대기업 사내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책 제목처럼 그는 새벽 기상의 힘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표지에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새벽에는 생각보다 많은 일이 일어난다. 내가 모르고 잠들어 있는 동안 어떤 사람은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고, 어떤 사람은 내가 원하는 위치에 이미 도알한 채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피곤하다고 계속 침대에 누워 있으면 달라질 수도, 멀리 갈 수도 없다. 반면 무거운 몸을 일으켜 무언가에 도전한다면 상상 이상의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하루를 어떻게 쓸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라 삶이 바뀐다.
새벽에 일어나 무언가를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피곤해서,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환경이 안되서, 미루고 미루다 보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일을 하기에 완벽한 때는 없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습니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과 애씀이 수반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피곤하죠. 시간이 없죠.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치열한 삶 속에서 새벽에 일어날 수 있는 의지력을 가질 때에 그에게 하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직감하고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6–8
6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은 죽는 날까지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마치 마라톤 선수처럼 달려갈 길을 꾸준히 달렸습니다.
그는 싸움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이고, 달음질을 멈추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제 후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을 주실 주님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하고 있는 그 싸움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달려가는 신앙의 경주를 결코 멈추지 마십시오. 끝까지, 마침표 찍을 때 까지 가야 합니다.
그때까지 쉬어서는 안됩니다. 나이도 들었고 퇴직하였으니 쉬려고 하는 것은 바른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전도도 해야 하고 교회와 자녀들 위해서 기도해야 지요. 주의 일에 정년퇴직은 없습니다. 그동안 일하느라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지 못했으니 이제는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죽는 날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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