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43. 베드로가 전한 복음
사도행전 10:34–43
34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36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7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9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오후나 밤이었을 것입니다. 고넬료의 집에는 친척들과 친구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통하여 어떤 이야기를 들을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고넬료의 초대를 받아 이곳에 온 곳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가 오기 전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이 본 환상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천사가 나타나 욥바로 가서 베드로를 청하라는 환상이죠. 그뿐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드디어 베드로가 도착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십명의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는 순간 멈칫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관습상 이방인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환상 중에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더럽다고 하지 말라는 체험을 했기에, 이러한 상황이 비록 처음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33절에 보시면,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이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고넬료는 베드로를 통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위대한 사도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전하는 메시지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넬료는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만 보아도 고넬료가 참 경건한 사람이구나 알게 되죠. 하나님 앞에 있다는 신전의식. 코람데오의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를 통해서 이제 듣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온전히 아멘으로 화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넬료의 자세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 설 때 하나님 앞에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설교자를 통해 듣는 메시지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설교자들은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반드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말씀은 인간의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설교자가 전하는 메시지가 아무리 탁월하다고 할지라도 사람에게 주목하거나 그를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처음 만나자 그 발 앞에 엎드려 절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그를 일으키며 나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사람도 경배를 받아선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코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도 이러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22:8–9
8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베드로는 이제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여기 기록된 내용은 그가 전한 복음을 간추린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무엇인가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복음의 목적입니다. 그것은 화평입니다.
36절에,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베드로는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즉 복음은 우리에게 화평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누구와의 화평입니까?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의 상태가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복음은 화평치 못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평의 상태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듣기 전,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골로새서 1:21
21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원수관계였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에베소서 2:2–3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하죠. 4가지로 표현하죠.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 잡은 권세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딸 지내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는,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과 화평의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로마서 5:1 (NKRV)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골로새서 1:20 (NKRV)
20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두 번째, 그렇다면 하나님과 화평의 길이 어떻게 열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되었다는 것이 베드로가 전한 복음입니다.
먼저, 베드로는 간략하게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사역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사도행전 10:37–38
37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너희도 알거니와”라고 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은 당시 이스라엘 땅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알려졌던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의 죽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듣던 고넬료를 비롯한 사람들은 크게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얼마 전 있었던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선한 일을 했던 것과 신비한 많은 일들, 예를 들어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 처형을 당해 비참하게 죽었고, 죽음의 이유는 유대인을 선동하여 로마에 대해 반역을 주동한 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베드로가 꺼내고 있으니 적잖이 당황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내가 그 예수와 함께 있었고 그가 행하는 선한 일과 마귀에게 눌린 사람을 고치는 모든 것을 직접 보았다고 말입니다. 그러한 일들은 분명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된 일임을 말입니다.
베드로는 두 번이나 이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증인이라는 단어입니다.
39절에 보면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증인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실을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만큼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에 관련된 사건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증인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다른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변화산에 영광가운데 신적으로 변화되신 예수님을 보았던 일입니다. 이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도 함께 있었습니다.
당시 예수를 체포하려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것도 베드로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이 심문받을 때 도망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 받을 때 증인 역할을 했어야 옳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 여종이 너도 저 사람과 함께 있지 않았느냐는 말에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를 부인합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이후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서 심문받을 때도 예수님을 위해 증인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할 때도 베드로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장사 되어 돌무덤에 안치되었을 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누군가의 집에 모여 있었습니다. 죽은 지 삼일 째 되던 날,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시신에 향유를 부으러 가고 그곳에서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발견합니다. 그녀는 신속히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와 예수의 시신이 없어졌음을 알립니다. 이때 가장 먼저 달려가 빈 무덤을 확인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가 보았던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의 머리를 쌓았던 수건과 몸을 둘렀던 세마포였습니다. 성경은 수건과 세마포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누군가에 의해 벗겨진 것이 아니라 몸이 빠져나와 세마포와 수건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들은 베드로의 증거를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베드로의 증거를 듣고 기록한 것입니다.
이후 베드로는 갈릴리로 돌아가 이전의 어부생활로 돌아가게 되죠. 어느날 베드로는 날이 새어가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 새벽 미명을 맞습니다. 바닷가에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이에 던졌더니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새벽에 베드로를 위해 물고기와 떡을 구우시고 뭍으로 올라온 베드로와 함께 조반을 하십니다. 식후에 베드로에게 묻지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게 세 번을 물으셨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40일 동안 베드로와 제자들을 정기적으로 만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입니다. 그는 하늘로 올라가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일은 베드로가 직접 겪은 일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장 확실한 증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증거가 사실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당시 법정에서는 한 사람의 증거를 사실로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두 사람이 이상의 증거가 일치해야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 나열한 이러한 사건들은 베드로 혼자가 아니라 요한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둘의 증거는 일치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확실한 증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자기 확신이거나 자기 신념이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는데 부활했다고 믿는 신앙의 영역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는 실제로 빈 무덤을 보았고, 부활한 주님을 만났고 그 주님과 함께 식사를 했고 40일 동안 주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가 고넬료의 집에 모인 사람들 앞에 선 것입니다.
베드로의 사명은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증인의 사명입니다. 자신이 본 것 들은 것을 가감없이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명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10:40–42
40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예수님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미리 사람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택하신 열두명, 성경은 이들을 사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사도는 반드시 예수님의 처음 사역부터 시작하여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을 목격한 자들이어야 합니다. 이들만 사도입니다.
초대교회때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쓰인 많은 책들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 책들 가운데 오직 신적권위만 있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정경으로 선택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신약27권입니다. 당시 이미 구약성경은 있었구요. 신약성경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이때 교회가 정경으로 확정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 중에 하나가 바로 사도성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의 영감으로 작성한 글인가? 또는 사도들의 증거를 바탕으로 성령의 영감으로 쓴 것인가?를 확인했던 것입니다.
왜 그런것입니까? 사도라는 직분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만이 예수님을 가장 정확하고 확실하게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사도를 택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선택한 사도였고 그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사명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넬료의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역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과 승천하셨을 때까지의 모든 일을 말했을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간추려 기록되었지만 말입니다. 늦은 오후, 또는 저녁부터 시작된 말씀이 늦은 밤까지 이어졌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전한 설교의 결론이 이렇게 됩니다.
사도행전 10:42–43
42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 그 분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재판장이라고 할까요? 재판장은 죄인을 심판하는 자입니다. 결국 재판장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그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분이 예수님 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최후의 심판이 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9:27
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요한계시록 20:12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요한계시록 20:15 (NKRV)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여기 잘 보시면 요한이 앞으로 될 일을 보고 있는데,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이것은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보좌 앞에 서 있습니다. 보좌 앞에는 책들이 펴있습니다. 또 다른 책이 펴져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책입니다.
두 종류의 책이 있죠. 하나는 책들이고 또 하나는 생명책입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책들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행한 모든 일이 기록된 행위 책입니다.
그리고 생명책에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명단에 이름이 없는 자들은 불못에 던져지게 됩니다.
전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의 행위를 기록하려면 도대체 몇권의 책이 필요한가? 지금까지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행위를 다 담으려면 어마어마한 도서관이 필요 할텐데, 이것은 좀 말이 안된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지금은 어떻습니까?
작은 메모리칩 하나에 엄청난 분량의 기록이 저장됩니다. 그러니 충분히 가능한 것입니다.
죽은 자의 심판이 이렇다면 산자의 심판은 무엇입니까?
만일 이 시간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우리는 부활의 몸으로 변화됩니다. 먼저는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의 몸을 입고요 그 다음 우리 산자들이 부활의 몸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곧장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산자들의 심판이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면 두렵지 않습니까?
내가 이 땅에서 행한 행위대로 심판하시는데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울 것 같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한 행위가 별로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칼빈이 기독교강요에 이런 글을 썼어요.
우리의 구원자가 우리의 재판장이다. 무슨 의미냐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심판석의 재판장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재판의 결과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의인으로 선언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상상해 봅시다.
제가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섰습니다. 이제 심지형의 심문을 시작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저를 고소하는 사단의 발언이 있을 것입니다. 심지형은 몇 년 몇 월 몇시에 이러 저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하며 죽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행위 책에 낫낫이 기록돼 있을 것입니다. 재판장이신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단의 고소가 다 끝나고 나면 재판장의 판결이 있을 것입니다. 이때 재판장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심지형이 사단이 고소한 것처럼 이 모든 행위를 한 것이 맞습니다. 그는 죄인이고 심판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제가 심지형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그가 받아야 하는 모든 심판을 대신 받았습니다. 그러니 그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들, 심지형은 의인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43절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43
43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습니다.
죄사함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 그분께서 예배하신 모든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신랑이 되십니다.
성령께서 보혜사가 되새,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 은혜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때까지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