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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5. 초대교회의 두가지 모습
사도행전 1:12–14 (NKRV)
12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오늘 우리가 읽는 본문으로부터 시작하여 2장까지는 처음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있습니다. 항상 처음은 순수합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도 있습니다. 처음교회가 순결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처음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회복해야할 교회의 모습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처음교회가 보여준 두 개의 모습을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처음 교회는 차별이 없는 평등한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이후 제자들은 과연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미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장엄한 장면을 목격 한 이후에 예루살렘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서로가 말도 없이 한 방향을 향해 나갔던 것입니다. 약속한 것도 아닙니다. 어디로 가자고 누가 제안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있는 다락방에 모이 것입니다.
저자 누가는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언급은 승천 사건이 안식일에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을 노동으로 보아 금지하였습니다. 단지 가까운 거리, 약1.5km정도는 허락되었던 것입니다. 감람원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2km입니다. 걸으면 20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도 걸을 수 있는 가까운 곳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목격하였고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은 찾아 오셨고 그들을 다시 모으셨습니다. 승천하시기 전까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전하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 모두가 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짧은 거리를 걸으면서 각자 마음속에 비장한 각오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습니다. 그것은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15절에 보면 모인 무리가 약120명이라고 언급된 것으로 보아 상당히 큰 다락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이 정확히 어떤 다락방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다락방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마가 요한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집 다락방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이 제자들을 핍박할 때 바로 이곳에서 기도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장소는 언급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디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이곳에 사도들과 제자들을 비롯한 약120명의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이들은 바로 교회의 창설멤버였던 것입니다.
누가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상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11명의 사도들의 명단이 먼저 등장하죠. 그리고 14절에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여자들은 누구일까? 사도들의 아내들과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입니다.
여자들의 대한 언급은 독특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의 인식 가운데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은 카운트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오병이어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몇 명입니까? 오천 명입니다. 그런데 이 이 숫자는 남자만을 카운트한 숫자입니다.
그 당시 여성들은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 여성들이 상당한 역할을 하였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실 하나님 나라는 차별이 없음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사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먼저 목격한 자들이 여인들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직접 만났다고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먼저 전하였습니다. 마가는 그 여인들의 이름을 기록하였습니다. 막16장1절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또 살로메였습니다. 다락방에 모인 여인들 중에 이 여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이 사실임을 강조하기 위해 여인들을 내세우는 것은 불리합니다. 당시 문화가 여자들의 증언을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은 법정에서 증인으로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의 저자들이 여인들을 부활의 목격자로 강조하여 기록한 것은 처음 교회 공동체 가운데 차별적 문화가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 어릴 적 기억에 남녀를 차별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3대가 같이 살았는데 어머니가 밥 준비를 하면 남자들은 따로 상을 받았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다른 상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따끈한 새 밥은 남자가 먹고 남은 찬밥은 여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죠. 여성의 인권이나 존엄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최근 들어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성경은 이미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 차별적 문화들이 없어진 것입니다.
상전과 종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남자와 여자가 한 식탁에서 먹었습니다. 권력자와 평시민이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첫 번째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존엄한 그분의 자녀들로 있습니다.
교회는 성별, 장애, 외모, 나이, 출신, 국가 인종,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죄로 봅니다.
골로새서 3:11 (NKRV)
11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야고보서 2:1–4 (NKRV)
1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여러분! 세상은 차별하는 문화입니다.
좋은 학위, 높은 지위에 올라가려는 목적이 차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가장 분노할 때가 언제입니까? 차별받을 때입니다.
저는 학창시절이 참 우울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그랬습니다. 차별대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어머니가 학교를 왔다 가면 다음날 그 아이를 대하는 선생님의 자세는 달라졌습니다. 특별한 것도 없는 저는 늘 학교에서 이름조차 불리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다가 미션 스쿨인 숭실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차별적 문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차별은 사람을 우울하게 하고 분노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세상은 죄인들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차별이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치있게 여기고 존엄하게 여깁니다.
교회는 처음 시작될 때부터 차별이 없었습니다.
물론 야고보서에서 차별을 지적한 것을 보면 당시 교회도 차별적 모습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땅의 교회는 불완전합니다. 우리가 불완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뉴질랜드에 있을 때 클리포드라는 보는 만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클리포드라는 강아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만화입니다. 보다가 깜짝 놀란 것이 다리가 하나 없는 강아지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또 아이들이 등장하는데 휠체어를 탄 아이가 등장하기도 하고, 흑인아이, 백인아이, 동양인 아이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유아들이 보는 만화입니다. 저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이런 영상을 접하면 얼굴색이나 장애로 인해 차별하는 문화가 많이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차별의 문화 속에서 대우받은 아이들이 아니라, 차별을 없애는 아이들로 세워나가야 합니다. 이사하기 위해 집을 알아보면서 안타까운 것이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다가구 주택들이 대부분 계단이 먼저 있고 그 위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휠체어나 유모차가 들어가기가 참 곤란합니다. 엘리베이터까지 들고 올려야 되기 때문이죠. 설계자가 건축자나 이것을 허가한 공무원이나 모두가 노약자나 장애인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자녀들이 차별에 대하여 무감각한 세상에서 차별을 없애는 아이들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차별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것은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11장에 보면 우리가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줍니다.
이사야 11:6–7 (NKRV)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세상은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지만, 회복된 하나님 나라는 강자와 약자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로마서 15:1> 1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 나라는 강한 자가 약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교회가 바로 그러한 모습이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은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대할 때 차별은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자녀들입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형제와 자매들에 하는 것을 곧 자신에게 하는 것으로 받습니다.
누군가 우리 자녀를 욕하거나 때리면 어떻습니까?
열 받고 화나지 않겠습니까? 반면 자녀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잘 대해주면 참 고맙죠.
왜 그런 것입니까? 자녀와 우리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러기에 성도들 한분 한분을 소중히 여기고 존엄하게 대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존귀하게 여길 때 하나님 나라가 이곳에 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처음 교회는 기도에 힘쓰는 공동체였습니다.
14절에 보니까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말합니다.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120명의 성도들은 자신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줄 알았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고 했으면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약속이니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기도했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것이니 그 약속이 이루어지길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니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 뜻이 이루어지길 능동적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도들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닙니다. 또는 우리가 그분의 사역에 꼭 필요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을 스스로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것을 명하신 것은,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일하시길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에 성도들이 기도를 통해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누리시는 하늘의 축복은 함께 누리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은 항상 기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교회 성도들은 약속만 믿고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전념했던 것입니다.
여기 그들이 보여준 기도의 두 가지 자세가 나옵니다. 마음을 같이 했다는 것과 힘썼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떠한 일을 앞두고 마음을 같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중요한 일을 앞두고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부가 어떤 일을 진행할 때 마음을 같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한 가지의 목적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처음 교회 성도들은 성령님의 오심과 이를 통해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이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같이 해야 할 것은 서로의 마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것에 우리의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운 계획이나 목적들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물어야 합니다.
가족이 함께 모여 주님이 이 상황에서 무엇을 원하실지를 의논하셔야 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뭐야? 내가 원하는 것이 이것이야를 의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이럴 때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일까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깨닫게 된 주님의 뜻에 우리의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한 마음이 되어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은 기도에 힘을 써야 합니다.
기도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힘써야 기도가 됩니다. 예수님도 기도에 힘쓰셨습니다.
<누가복음 22:44> 44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사도행전 2:42> 42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도행전 6:4> 4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로마서 12:12> 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우리가 대부분 기도가 되지 않는 이유는 기도에 힘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만큼 기도에 힘쓰고 계십니까?
기도에 힘쓴다는 것은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도할 시간을 만들고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내가 정한 시간에 어떤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에 나의 의식과 언어를 기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운동의 습관이 몸을 건강하게 하듯이 매일의 기도가 영적으로 건강하게 만듭니다.
저는 함께 모여 예배하는 못하는 이 시기가 우리의 영적 건강을 테스트하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나태해 지면 안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텐션이라는 단어를 많이 씁니다. 영적인 긴장감 텐션이 적당히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게으름과 나태에 쉽게 빠져버립니다.
잠은 잘수록 늡니다. 게으름도 피울수록 게을러집니다. 영적인 게으름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전서 4:7 (NKRV)
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베드로전서 4:7 (ESV)
7The end of all things is at hand; therefore be self-controlled and sober-minded for the sake of your prayers.
성경은 말하죠.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무얼 해야 합니까?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근신이라는 것은 영어로 self-controlled 스스로 자신을 컨트롤 하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며 기도에 힘썼다면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집에만 계신다고 긴장을 푸시면 안됩니다. 시간을 정하여 운동도 하시고 또 기도도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도 묵상하시고 경건서적도 주문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self-controlled 근신하시면서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시기가 끝나고 다시 모였을 때 모두가 영적으로 더욱 성장해서 건강해진 모습으로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