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03-02 11:04

52. 복음의 능력과 결과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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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52. 복음의 능력과 그 결과

 

사도행전 13:42–52

42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46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51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계속해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선교의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마가의 이탈로 바울과 선교일행은 충격을 받았지만 다시 추스르고 복음전도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바울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구약의 역사는 약속과 예언이었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음을 전파했습니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죄사함 받아 의롭게 되지만, 믿지 않으면 멸망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첫 번째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도행전 13:42–43

42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바울이 복음전함을 마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다시 듣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다시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여기서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전했던 복음입니다. 동일한 복음을 다시 전해달라는 것입니다. 

 

또 보시면 모임이 끝난 후에 경건한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랐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다음 안식일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13:44

44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그런데 보시면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재미있거나 유익하지 않습니다. 최근에 인터넷 강의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경제, 인문학, 철학, 역사 등 다방면에 걸쳐 유명강사들이 진행합니다. 들으면 재미도 있고 유익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겁습니다. 진지합니다.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할 만한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복음을 다시 듣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복음이 어떤 교훈적인 이야기라면 재미와 감동의 요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거든요. 또는 복음이 강의나 가르침이라면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습니다. 

복음은 소식입니다. 영어로 굿뉴스입니다. 뉴스가 무엇입니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이 일은 2천년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가 십자가형으로 죽은 것도 사실이지만 부활한 것도 사실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법정에서 어떤 일에 대해 사실여부를 판단할 때 증거를 채택합니다. 물적증거와 정황증거입니다. 그리고 증인의 증거입니다. 부활의 물적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빈 무덤입니다. 모든 종교는 창시자의 무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는 무덤이 없습니다.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정황증거는 제자들의 변화를 들 수 있죠. 예수가 체포되어 신문받을 때 제자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느 순간 예수가 부활했다고 담대하게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부활은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증인의 증거입니다. 성경은 증인들의 증거입니다. 사도행전도 증인의 증거 아닙니까?

당시 예수님의 제자 외에도 부활을 목격한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전한 것입니다. 마치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소식을 전하듯 바울은 이 사실을 전한 것입니다. 예수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었고 그분의 부활은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한 부활이었습니다. 이것을 전한 것입니다. 이 복된 소식이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고린도후서 10:10 

10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고린도후서 11:6 

6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의 말을 다시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가진 능력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람의 마음을 넘어서 영혼을 사로잡는 힘이 있습니다. 그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재미와 감동이 없어도, 어눌하게 전해도 복음이 전해지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로마서 1:16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고린도전서 2:1–5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니 여러분,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을 잘 못해도 괜찮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두 번째 나눌 내용이 이것입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긍정적인 반응이 있었지만 부정적인 반응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3:45

45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사도행전 13:50 

50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복음의 능력 앞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반면,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반박하고 비방했습니다. 그러다가 안디옥시의 고위층을 포섭하여 바울 일행을 박해하고 쫒아냅니다. 그들이 고위층을 선동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울이 구브로섬 바보에서 총독 서기오를 전도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추천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반대와 박해를 받았을 때 바울과 선교일행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곳을 떠납니다. 

사도행전 13:46 

46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사도행전 13:51 

51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지역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 하는 행동입니다. 부정한 지역에서 나왔다는 표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이러한 행동을 전도에 적용시키셨습니다. 

누가복음 9:5 

5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어떤 의미일까요? 복음에 대하여 적대적이거나 반대하면 미련을 갖지 말고 그곳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발에 먼지를 털어 버림으로 그 책임이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 까지라는 것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까지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전도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잘 전해서 그 사람을 믿게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잘 못 전해서 그 사람이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십니다. 

따라서 상대방이 믿지 않는 것은 나의 책임이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전했다면 할 바를 다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발에 먼지를 털어 버리는 행위입니다.  

 

물론 내 주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을 때 안타깝습니다. 그 대상이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자녀라면 그 안타까움은 더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지혜와 노력으로 상대방을 믿음가운데로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의 일은 단지 복음을 전하는 것까지입니다. 

 

세 번째 구원이 하나님의 일임을 믿을 때 우리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3:48

48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합니다. 

이것은 구원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합니다. 영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임을 말합니다. 우리의 애씀과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생주시기로 작정한 자들에게 복음 전파자를 보내시고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구원에 전 과정이 하나님의 일임을 말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복음을 전함에 있어 담대함을 줍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문제는 내가 수영을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구하러 들어가면 같이 빠져 죽는 것입니다. 구원은 마치 이런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류는 마치 노아 때에 홍수처럼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여있습니다. 모두가 물에 빠져 죽어 가는데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석가가 구원하겠습니까? 모하메드가 구원하겠습니까? 공자가 구원하겠습니까? 같이 빠져 죽어가는 인생끼리 누구를 구원하겠습니까? 

 

그러니 구원은 인간세상 바깥에서 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세상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으면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에베소서 1:4–5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의 구원을 창세전에 이미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의 구원을 예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복음을 잘 전해서 그것을 믿게 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나를 구원으로 인도한 분들은 너무나 귀한 분들입니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나를 구원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 속에 쓰임 받은 분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주변에 아무리 전도해도 안 믿는 분들 보면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했다면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역사하여 그들에게 영생이 임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얼마 전 ‘새롭게 하소서’라는 간증프로그램에서 가수 엄정화씨가 예수님을 믿게 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울감에 힘들어 할 때 개그맨 이영자씨가 전화를 끊으면서 ‘정화야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셔’ 라는 말이 귀에 맵 돌았답니다. 그날은 남산을 산책하면서 교회가 나오면 꼭 들어가서 기도해 보리라고 마음을 먹었답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교회가 보이지 않더랍니다. 한참을 울면서 걸어가는데 중학교 때 이후로 연락이 없었던 동창에게 전화가 온 것입니다. 무슨 일이냐는 친구의 말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어 교회를 찾는데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때 친구의 말이, 내가 그동안 네가 하나님 믿도록 기도했어! 라고 하면서 영접기도를 해 준 것입니다. 기도 후 눈을 들었을 때 교회 십자가가 보였고 그 길로 교회에 나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일을 누가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연세대 서우경교수의 회심이야기도 은혜로웠습니다. 

불교학으로 논문을 쓸 정도로 불교에 열정이 있었던 그녀가 어느 날 아침 설거지를 하는데 고요한 밤을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더니 기쁘다 구주 오셨네로 연결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방언을 시작한 것입니다. 방언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방언을 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결국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그녀에게 복음을 전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알고 있는 것은 기쁘다 구주 오셨네 자주 들었던 캐럴송을 흥얼거리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가 노력했습니까? 그에게 구원에 대한 의지가 있었던 것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8장에 보면, 바울의 고린도전도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곳에서도 안식일에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바울을 대적하면서 비방합니다. 바울은 옷을 털면서 이방인에게로 가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선교를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 밤에 일어난 일입니다. 

 

사도행전 18:9–11 

9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는 대적하고 비방하는 자들로 인해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한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일년 육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간혹 그런 분들이 있어요. 하나님이 구원할 자들을 예정해 두셨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아무리 전해도 그가 예정 받지 못한 분이라면 우리의 애씀과 노력이 소용없지 않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것은 예정론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구원받을 자들이 작정되어 있다 예정되어 있다는 것은,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누가 구원받고 누가 안받고 하는 것이 예정론이 아닙니다. 또는 숙명론처럼 내 인생이 나의 의지나 노력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끌려갈 것이다 믿는 것도 예정론이 아닙니다.

 

예정론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나올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언제 회심하여 믿음으로 반응할지 알지 못합니다. 죽기 전에 회심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좌우편에 강도 중에 한 사람이 구원받지 않습니까?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저 사람은 절대 믿음을 가질 사람이 아니야! 라고 누가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네 번째, 복음은 우리를 은혜가운데 있게 합니다.  

 

사도행전 13:43

43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합니다. 

구원은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들어가기와 머물기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으로 들어갔다면 이제 그 은혜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은혜안에 있으라 할 때 ‘있으라’는 단어는 ‘프로스메오’입니다. 이 단어가 사도행전에서 사용된 곳을 보니까 

사도행전 11:23 

23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이 말씀은 바나바가 자신이 담임했던 안디옥교회 성도들에게 했던 말씀입니다. 그가 강조했던 말씀이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표현은 바울의 표현이 아니라 바나바의 표현입니다. 

비시디안 안디옥에서도 은혜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라고 권면했던 것도 바나바일 것입니다.

 

사도행전 14:22 

22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이것도 바나바의 권면이었을 것입니다. 머물러 있으십시오. 믿음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전도의 목적은 결국 은혜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머물고 주님 안에 머물고 믿음 안에 머무는 것 이것을 위해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은혜 안에 머물고 계십니까? 

행여나 낙심과 불안과 염려 가운데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복음은 우리를 은혜 안에 머물게 합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과 또 영상을 통해 예배를 드리시는 분들은 대부분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분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 안에 머물러 계십시오.

이것이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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