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56. 바울의 중심사역
사도행전 14:19–28
19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24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8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본문은 바울의 1차 선교여행이 마무리 되는 장면입니다.
먼저 지도를 보면서 확인했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은 더베까지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복음을 전했던 곳을 경유하여 파송교회인 안디옥교회로 돌아갑니다. 본문의 내용은 바울이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곳에서 진행한 사역과 가르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오늘날 교회가 해야 될 사역과 가르침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살펴보길 원합니다.
1.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삼는 것.
21절입니다.
사도행전 14:21
21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바울이 가장 힘썼던 사역은 복음을 전하는 것과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익숙합니다. 그러나 제자를 삼는 사역은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었을지 그려지지 않습니다.
14장 1절부터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소개되는데, 3절을 보시면,
사도행전 14:3
3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오래 있었다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의 기간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씨앗이 잘 자라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시점까지일 것입니다. 이 기간에 무엇을 했는가 보면, “은혜의 말씀을 증언”했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은혜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양육한 것입니다.
21절에서 제자를 삼았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를 말합니다. 바울이 은혜의 말씀을 가르친 목적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핵심 사역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회개하여 하나님 자녀가 된 사람들을 예수님처럼 살아가도록 은혜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사명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8:18–20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제자라는 의미는 단순히 배우고 학습하는 자가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깨달으며 자기 행동의 지표로 삼는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한 것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이기도 합니다.
저희 사명이기도 하고 여러분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교회 원로목사님이셨던 故 옥한흠목사님은 이 사명이 일찍 눈을 뜨셨습니다. 1980년대 많은 교회들이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식의 복음을 전할 때 옥 목사님은 제자훈련에 헌신했습니다. 소그룹으로 성도들을 모아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옥목사님 설교 중에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때가 소그룹으로 모여 제자훈련 할 때라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예수님의 제자들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옥목사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사랑의 교회는 이러한 제자훈련을 통해 성장했습니다. 성도들의 질적 성장은 양적 성장으로도 이어지게 되었고 현재의 사랑의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변에 많은 목사님들이 옥 목사님의 사역을 본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간혹 어떤 분들은 교회 성장의 방법으로 제자훈련을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제자훈련은 교회성장의 방법으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분부하신 사명이기에 하는 것입니다.
저도 이전에 성도님들과 소그룹으로 모여 말씀을 나눌 때 참 좋았습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소그룹 성경공부가 작년부터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팬데믹 상황이 잠잠해지고 모임이 가능해지면 저희 교회도 제자훈련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있든 없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간혹 주변에 어떤 목사님은 자신은 옥목사님의 제자라고 소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께 제자훈련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제자여야 합니다. 아무리 영적으로 탁월한 목사님께 말씀을 배웠다고 해도 사람의 제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나눈 것처럼, 사람은 우리가 믿고 의지할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반석이시고 든든한 산성입니다. 주님의 제자로 세워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의 제자로 세워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골로새서 3:16–17
16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님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해야 합니다. 2021년도 1분기가 지나고 있습니다. 올해 작심하신 성경읽기와 듣기와 쓰기는 실천되고 있으신지요? 다시 마음을 다잡으시고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도록 힘쓰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묵상한 그 말씀이 부족한 우리를 주님의 모습으로 바꾸어 갈 것입니다.
2.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게 함.
사도행전 14:22
22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라면, 양육 즉 제자훈련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에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면 그 나라에 머물면서 그 나라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시작하지만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알고 믿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여전히 세상나라의 삶을 삽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고 했잖아죠. 이미 이곳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죄악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머물 리가 어렵습니다.
최근에 LH직원들과 공무원들의 땅 투기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적인 정보를 이용하여 사적이익을 추구했습니다. 세종시에 아파트 특별분양을 받은 LH직원은 되파는 방식으로 6억 이상의 이익을 얻었습니다. 평생을 일해도 아파트 한 채 얻지 못하는 서민들에게 이러한 뉴스는 허탈감과 분노를 일으키게 합니다. 문제는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시민단체들의 제보 때문에 들통 나서 그렇지, 그동안 드러나지 않는 것만 해도 많은 것입니다.
세상의 삶의 방식은 공적유익이라 아니라 사적유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공적인 자리에 있을 때 최대한 사적유익을 챙깁니다. 정권이 오래 지속되면 부패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공적인 자리에 있을 때 한몫 챙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삶은 방식은 공적유익을 추구합니다. 자신의 공적인 권력과 정보를 이용하여 공동의 유익을 세웁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 사적유익을 추구하는데 그 속에서 공적유익을 추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세종시 아파트 특별공급 받아서 6억 이상의 이익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는 어렵습니다.
“부장님도 그렇게 했고 과장님도 그렇게 했데, 너도 한번 해봐.”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충분히 무장되어 있고 그 말씀 속에서 삶의 원칙들이 세워지지 않는 한 흔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도 한번 해볼까” 라는 마음이 들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 가치와 삶의 방식에 흔들리는 성도들에게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마음을 굳게 한다는 것은 마음을 견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마음을 견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결론부분에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24–27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주님의 우리 신앙의 집을 반석위에 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반석이 무엇입니까?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것”, 곧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행함의 원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삶을 흔드는 어려움과 유혹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3. 하나님 나라의 삶을 가르침 - 환난을 직면하여 돌파함
22절 뒷부분에 보면
사도행전 14:22
22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가르쳤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환난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아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거의 죽다가 살아났습니다.
사도행전 14:19
19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저자 누가는 이 부분을 담담하게 처리하고 있지만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사건은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바울은 적대적인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여 돌에 맞았습니다. 이들은 그동안 복음을 전했던 지역의 적대적인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고 결국 루스드라 성에서 돌을 던진 것입니다. 피투성이가 된 바울을 죽은 것인 줄 알고 시외로 끌어 내쳤습니다.
20절에 보면 제자들은 바울의 주변에 둘러섰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은 것입니다. 마음이 위축되고 겁나지 않겠습니까? 나도 이렇게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됩니까? 모두 죽은 줄 알았던 그가 일어납니다. 학자 중에는 그가 실제로 죽었다고 살아났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바울이 인간적 노력으로는 살아날 수 없는 상황에 있었음은 확실합니다. 그런 그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이 임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지만 바울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울에게 남겨진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명이 다 할 때까지 그를 지키실 것입니다.
일어나 어떻게 합니까? 성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방금 돌에 맞았던 루스드라 성으로 다시 들어간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피투성이가 되어 성으로 들어오는 바울을 볼 때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장밋빛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만사형통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소원성취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업의 축복과 건강의 축복과 자녀들의 형통한 삶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게 될 때 핍박과 고난과 손해가 있음을 말합니다. 바울의 삶이 이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성도들에게 뭐라고 권면합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많은 환난을 격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에게 이미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갈 때 환난이 있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악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고 그 나라의 삶의 방식으로 살게 되면 환난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그 환난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했던 그곳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삶은 환난을 직면하여 돌파하는 것입니다. 정면승부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의 솔로몬 행각에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때 예수님은 충격적인 발언을 하십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합니다. 신성모독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피하여 요단 강 저편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과 친밀하게 교제했던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말합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고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죠.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가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나사로는 이미 죽은 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살리기 위해 유대로 다시 들어가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하나님 나라의 삶은 환난을 피하여 도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환난을 직면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것입니다.
저는 육아 초보 아빠입니다. 육아를 졸업하신 분들이 많으시고 출가를 시키신 분도 많이 계시죠. 그런데 저는 아직 초보아빠입니다. 애들 말 안들 때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둘이 살 때가 참 편했다. 어떤 때는 혼자 어디 가서 쉬고 싶은 때도 있어요. 재작년에 서울에 세미나가 있어서 2박3일 숙소를 정해놓고 있다 왔어요. 가기 전에 마음이 그렇게 설레는 거예요. 비록 혼자 육아할 아내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애들과 떨어져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저녁에 숙소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할 게 없어요. TV도 재미없고,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사먹는 음식도 별로고,
그 여유로운 시간에 하는 일이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아이들 영상 보는 거예요.
그때 알았습니다. 육아가 비록 힘들지만 참 가치 있고 행복한 일이었구나.
육아가 환난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죽지 않아서입니다. 아이가 힘든 것도 있지만 내 자존심, 이기심, 과거의 상처, 성장과정에서 처리되지 못한 분노, 이런 것들 때문에 힘들어집니다. 결국 내 연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문제를 도피하는 자들에게 환난은 없습니다. 도망가면 끝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를 직면하여 극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거든요. 그 문제가 없으면 우리는 쉽게 교만해지고, 나태해지지고, 현재 상태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삶의 환난들을 허용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세워 가십니다. 그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고 기도하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주님의 성품을 닮은 자들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많은 환난을 겪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 환난이 없는 분들 단 한분도 없습니다. 각 가정마다 끌어안고 씨름하는 문제들이 다 있어요. 어떤 분한테는 큰 환난이고 어떤 분한테는 작은 환난입니다. 그러나 당사자들에게는 다 힘든 환난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안심하세요. 나만 겪는 환난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환난이 없기를 기도하고 이를 위해 신앙을 갖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환난이 없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환난을 직면하여 극복할 수 있는 사람들로 세워가길 원하십니다.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환난을 피해 도망가던 사람이 환난을 직면하여 돌파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닮은 사람들로 성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4.사람을 세우는 것.
사도행전 14:23
23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지역을 다시 방문했던 목적은 사람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장로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장로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것과 교회를 치리는 것을 함께 감당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것이 분리되어 말씀을 전하는 장로를 목사라고 하고 교회를 치리하는 장로를 장로라고 합니다. 당시는 이러한 구분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장로를 세웠던 이유는 자신이 했던 사역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과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바울이 장로를 세웠을 때 그냥 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씀으로 충분히 양육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23절을 보시면, 장로를 택하여 금식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안디옥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세울 때도 교회가 금식했습니다. 교회가 금식하는 것인 사람을 세우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장로를 세워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장로들이 해야할 사역이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제자 삼는 사역이 그 만큼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합니다.
사람을 세우고 금식하고 주님께 의탁합니다. 주님께서 세워진 종들을 통해 역사하시도록 주님께 맡겨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안정적으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사람이 세워져야 합니다. 목사 한 사람에게 의존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자신들의 은사에 맞게 세워져 교회를 섬길 때 그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합니다.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세워져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분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분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성도를 위로하고 권면하는 분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러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첫째,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성도들의 마음을 굳게하여 믿음안에 머물러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환난을 직면하여 돌파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넷째, 사람을 세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모두가 기도해 주시고 이 일에 헌신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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