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58. 기독교의 세 가지 핵심 윤리
사도행전 15:22–35
22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5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26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7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9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30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2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3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4(없음)
35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 예루살렘 총회가 이방인의 할례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었고 그 과정 가운데 열띤 논쟁과 토론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의 이방인 전도의 체험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최종권위는 기록된 성경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오늘날 교회가 주님의 뜻을 묻고 결정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주제는 예루살렘 총회가 결정한 내용입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거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을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네 가지 금기사항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이 네 가지는 반드시 지켜야 된다는 결정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5:20
20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첫째는 우상의 더러운 것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음행을 멀리하라. 세 번째는 목매여 죽인 것을 멀리하라. 네 번째는 피를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편지에 담아 유다와 실라 그리고 바울을 통해 안디옥 교회와 여러 교회에 전달하게 됩니다. 편지에 담긴 내용이 2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5:29
29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우상의 더러운 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동일합니다. 피를 먹지 말라, 목매어 죽인 것을 먹지 말라는 것, 그리고 음행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을 필요도 없고 구약의 율법을 지킬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이 네 가지는 성도로서 지켜야 할 규범임을 정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 네 가지 금기사항을 살펴보면서 이것에 담겨있는 성경적 윤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방인들이 먹는 고기는 대부분 시장에서 파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기들은 이방신전에 바쳐진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로 따지면 제사음식입니다. 제사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 바울의 의견은 좀 다릅니다. 고린도 후서 8장에 보면
바울은 우상 자체가 없기 때문에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었다고 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 때문에 형제 중에 실족하는 자가 있다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하거든요.
저는 제사음식 먹습니다. 그것은 귀신이 와서 먹었다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그냥 음식일 뿐입니다. 먹는데 별로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 중에 제가 제사음식 먹는 것 때문에 시험에 드시는 분이 계시다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서신의 말씀입니다. 제사음식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것을 먹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행여 형제가 실족할 수 있다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먹고 안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안먹는 형제에 대한 배려가 있는가? 그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피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구약의 율법입니다. 레위기 3장, 17장, 신명기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그 피에 있기 때문에 금지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 목매어 죽인 것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당시 부드러운 고기를 얻기 위해서 동물을 목매여 죽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동물이라 할지라도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한 것이기에 금지된 것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동물복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가능하면 동물복지 음식을 먹는 것이 좋습니다. 비싸서 그렇지 좀 여유가 있으신 분들은 그런 것 드시는 것이 좋습니다. 맛있는 고기 먹겠다고 동물을 학대하는 것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죄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의 음식은 채소였거든요. 생식입니다. 그러다가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고기를 먹도록 허용하셨습니다. 지금도 가장 건강한 식단은 생식 아닙니까?
네 번째 음행을 금지했습니다. 음행은 정상적인 결혼관계를 벗어나 이루어지는 모든 성행위를 말합니다. 이를 금지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정을 무너뜨리는 행위이기에 지금도 여전히 금지되는 중요한 사항입니다.
동성애, 근친상간, 혼전성관계, 간음 등이 포함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5:11
11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에베소서 5:3
3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히브리서 13:4
4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이 밖에도 신약성경에는 음행을 금지한 내용이 상당히 많습니다.
성경이 이 부분에 대해서 예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가정을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창설하셨거든요. 그래서 가정을 깨뜨리는 그 어떤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음행은 내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가족까지도 파괴합니다. 그래서 심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은 오늘날 교회가 따라야 할까요?
이 결정에 따라 오늘날 할례를 행하지 않거든요. 구약의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네 개의 금기사항은 어떻습니까? 지켜야 할까요? 아니면 지키지 않아도 될까요?
저는 제사음식 먹거든요. 피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선지국도 먹거든요. 오늘날 교회는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 사항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내용이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살펴보게 되겠지만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성도들이 어떠한 윤리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것을 살펴보기 전에, 예루살렘의 총회의 결정이 오늘날 교회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원리인가 하면, 구약의 율법이 신약시대에 어떻게 적용되는가에 대한 것을 알면 이 부분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더 이상 구약의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약의 율법은 예수님 안에서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구약의 모든 예배의식, 정결의식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죄를 사함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런 의식들이 실제로 우리의 죄를 정결하게 하거나 거룩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속죄제사의 경우, 범죄한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해서 흠 없는 소나 양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잡아 피를 제단에 뿌리고 그 고기를 번제단에 바친 다고해서 정말 그 사람의 죄가 용서함을 받을까요? 그렇지 않거든요. 이러한 제사의식이 보여주는 것은 나의 죄가 사해지려면 누군가 내 죄 값을 대신 담당하고 피흘려 죽어야 하고, 내 죄를 담당할 그 사람은 전혀 죄가 없는 사람이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모든 율법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다 그 목적한 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구약의 그 많은 율법이 다 페기된 것은 아닙니다. 그 율법에 담겨진 정신이 있습니다. 그 율법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이 있거든요. 그것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안식일법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습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거든요. 우리가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지키지 않습니다. 이 날 쉬거나 모여 예배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주일에 모여 예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안식일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행위를 마치시고 안식한 날을 기념하여 지키라고 주신 날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안식이 사라집니다. 사람은 죄로 인해 더 이상 안식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가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했기 때문이라고 하시거든요. 안식일을 지켜야 되는 이유가 창조에서 구원으로 바뀝니다.
무슨말인가 하면, 처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행위를 마치시고 안식하셨기 때문에 너희가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면서 안식하며 그분의 영광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인류가 타락하면서 더 이상 안식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도 안식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잃어버린 안식이 다시금 회복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인류를 구원하게 되는 때 다시금 안식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날이 언제입니까?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구원하신 날이 언제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의 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준미의 부활의 날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부활의 날 그날을 초대교회는 주의 날이라고 불렀고 오늘날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이 날을 우리는 안식일로 지킵니다.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영혼의 안식을 누리고, 일을 쉬고 육신이 안식하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고 예배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재림 때에 임할 영원한 안식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는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는 않지만 그 율법의 정신을 온전히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대함에 있어 이러한 원리가 오늘날 적용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조항 자체를 우리는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온전히 지켜야 합니다.
이와 같은 원리로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을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금기사항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정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저는 오늘날 성도들이 갖추어야할 성경적 윤리관을 발견하게 됩니다. 단순히 ‘무엇을 하지 말라’가 아니라 무슨 뜻으로 어떠한 하나님의 성품과 뜻 때문에 이러한 것을 금기시켰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기독교 윤리는 이웃을 향한 배려와 사랑이 기초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지만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상 자체가 없기 때문에 우상의제물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형제가 실족할 수 있으니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형제와 이웃을 향한 배려와 사랑이 성도들의 윤리적 삶의 기초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술을 먹을 수 있겠지만 먹지 않는 것입니다. 다함께 대면예배를 드릴 수 있겠지만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웃을 향한 배려와 사랑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는 항상 공동체의 유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의 자유는 이웃의 자유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멈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가 있지만 타인에게 위협이 될 때 써야 되는 것입니다. 카페에서 큰 소리로 대화할 수 있지만 타인의 대화에 방해가 될 때는 줄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윤리적 원칙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항상 타인을 향한 배려와 사랑이 그 기초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어떠한 선택과 결정을 하려고 할 때 반드시 이 윤리적 원칙을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기독교 윤리는 생명의 존엄성을 가장 귀한 가치로 여깁니다.
피를 먹지 말라, 목매여 죽인 것을 먹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동물의 생명까지도 귀하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생명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아동학대 사건이 많은 이유가 생명의 존엄성이 상실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낙태법이 폐지된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낙태법은 2020년 12월 31일부로 폐지되어 더 이상 낙태은 위법행위가 아닙니다. 헌법은 태아의 생명권보다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여 이와 같이 결정하였습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풍조로 확대될 것이 분명합니다. 생명이 하찮기 때문에 아동의 생명도 쉽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동학대를 막으려면 아동학대를 금지하는 법을 촘촘히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명의 시작인 태아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풍토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이제 앞으로 수많은 반려동물들이 하찮게 버려질 것이고, 죽어갈 것입니다. 모든 생명이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 그 생명이 나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어지고 내가 계속해서 희생해야 된다면 우리는 쉽게 그 생명을 버리거나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낙태법의 정신 아닙니까?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나의 행복한 삶을 위해 생명을 죽여도 좋다 이것 아닙니까?
뉴질랜드에 있을 때 선교사님으로 들은 이야기입니다.
교제하는 성도님 가정에 아기가 생겼답니다. 엄마는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며 모자를 뜨기 시작했습니다. 산전 검사를 받은 엄마는 의사로부터 심각한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아기에게 심각한 질병이 있어 유산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태어나도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부부는 흔들리지 않았답니다. 엄마는 계속해서 아기가 쓸 모자를 떴습니다. 드디어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부부는 너무나 행복해 했답니다. 엄마는 그동안 정성스럽게 뜬 모자를 아기에게 씌워주었습니다. 예상대로 아기는 얼마 살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러나 부부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답니다. 오히려 아기와 함께 했던 그 짧은 시간을 행복해 하며 감사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생명의 가치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생명은 그 차제로 존엄합니다. 그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루더라도 생명은 살려야 하고 또 살아야 합니다.
셋째, 기독교 윤리는 가정을 소중히 여깁니다.
음행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을 소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은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가정을 건강하게 세우고 지켜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대부분 가정에서 누리는 것들입니다.
무엇보다 남편과 아내의 신실한 사랑과 신뢰가 기초입니다. 그 위에 가정이라는 집에 건강하게 세워집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오를 지라도 가족에게 존경받지 못한다면 실패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장로와 집사의 조건이 한 집안을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좋은 남편, 존경받는 아빠가 좋은 목사도 되고 장로도 되고 집사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아내에게 인정받지 못하는데 성도들에게 인정받는 다면 위선입니다. 자녀에게 존경받지 못하는데 성도들에게 존경받는 것은 가식입니다.
성도들의 윤리적 삶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좋은 성도가 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내, 좋은 아빠, 좋은 엄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기 원하십니까? 부모님께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우리 청년들 아무리 사랑해도 부모가 원치 않으면 결혼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입니다. 가정의 불화와 갈등상황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음행하지 말라는 것은 가정의 갈등 상황을 만드는 행위, 가정을 깨는 행위 그 모든 것을 금지하신 것입니다.
아들 셋 키우면서 깨닫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신앙적인 부분에서 저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가 조금 낫다고 하면 성경에 대한 지식이 좀 많은 것뿐, 다른 모든 면에서 우리 성도님들이 저보다 훨씬 낫습니다. 정말입니다. 자녀들 다 키워서 출가시킨 분들은 정말 훌륭하신 성도님들입니다. 사춘기 아이들 신앙으로 키우기 위해 몸부림치는 우리 성도님들 보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좋은 부모 되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신앙이거든요. 다른 곳에서 참 신앙인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자녀들 신앙으로 양육해서 믿음의 가정에 시집 장사 보낸 분들은 정말 훌륭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성공한 신앙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기독교 윤리를 기반으로 성도들의 윤리적 삶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것을 결정하고 편지로 써서 각 교회에 보내게 됩니다. 이때 이러한 언급을 합니다.
사도행전 15:28
28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성령과 우리”라는 표현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세운 세 가지 윤리적 지침이 성령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한 기독교 윤리를 성령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첫째, 형제와 이웃을 향한 배려와 사랑입니다.
둘째, 생명의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두는 것입니다.
셋째, 가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이 세가지 윤리를 삶의 원칙으로 세우시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시길 축복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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