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60. 주님의 일을 할 때 필요한 세 가지 자세
사도행전 16:1–10
1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4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1-5절은 디모데를 세운 것과 할례를 받게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6-10절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던 바울과 선교일행이 마게도냐로 오라는 환상을 보고 선교여행을 수정한 일입니다.
두 개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할 때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며 또 어떻게 순종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주님의 일을 할 때 필요한 자세는 상황화와 유연함입니다.
사도행전 16:3
3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바울이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방인의 구원에 있어 할례를 행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예루살렘 총회까지 가서 격렬한 토론 끝에 결국 할례의 무용성을 이끌어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무엇 때문에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게 한 것일까요?
3절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앎이러라”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헬라인입니다. 유대인의 경우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자녀도 유대인이 됩니다. 아버지의 국적과는 상관없습니다. 어머니의 혈통을 중시합니다. 그러니까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디모데는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그동안 이방인 문화권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할례를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 대부분 이방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주변에 할례를 받으라고 권유한 유대인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 그런데 바울이 그와 선교사역을 함께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만나야 되거든요. 이방인들이야 상관없지만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보는 것이 할례아닙니까? 물론 디모데가 할례를 받지 않는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상대하다 보면 쓸데없는 논쟁에 휘말릴 것이 뻔한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그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유대인으로 규정하여 쓸데없는 논쟁을 피하고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선교에 있어 어떤 자세를 가져야 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복음을 받는 사람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교용어로 ‘상황화(contextualization)’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초기 선교사님들의 경우에 우리와 같은 옷을 입고 국밥을 먹으면서 선교사역을 했습니다.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우해 우리 문화에 흡수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화의 원리가 한국교회 안에 다양한 모습으로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를 들어 새벽기도 같은 경우에 우리의 선조들의 새벽치성이 그 기원입니다. 또 불자들은 불당에서 새벽염불을 하거든요. 이런 종교문화가 교회의 새벽기도로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는 한국교회만 있습니다.
대심방의 경우도 그렀습니다. 예전에는 마을마다 무당이나 점쟁이가 연말연시에 동네를 돌면서 심방을 했다고 해요. 이것이 교회에 대심방으로 자리매김 한 것입니다.
전에 부목사때 대심방을 하는데요, 하루에 많게는 20가정을 합니다. 아파트 단지를 돌면서 30분 단위로 하는 거예요. 새벽 6시부터 시작합니다. 저도 링거 맞아 가면서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심방 전에 설교30편을 준비해 놓고든요. 그리고 그 가정의 상황에 맞게 그 중에 하나를 설교합니다. 그런데 심방이 끝나면 동행했던 전도사님과 권사님 표정이 별로 안 좋은 거예요. 왜 그런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전도사님과 둘이 차를 타고 오는데 말씀하시더라고요.
“목사님 그렇게 설교하시면 안 돼요.” 기분이 않좋더라구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축복설교를 하셔야죠.” 그때 알았습니다. 대심방은 각 가정을 돌면서 축복을 기원하는 것이구나. 우리의 샤머니즘 문화에서 왔구나를 그때 알았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새벽기도가 나쁜 것입니까? 대심방이 쓸데없는 것일까요? 새벽치성과 무당심방에서 기원했으니 잘못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우리가 새벽기도를 통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습니까? 또 대심방은 어떻습니까? 한해를 시작하면서 각 가정을 돌며 축복을 기원하는 일은 성경적입니다. 우리의 문화와 상황에 맞는 형태의 신앙생활이 정착된 것입니다.
여러분! 통성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성기도의 시작이 한국교회입니다. 외국에서는 코리안 스타일 기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데 우리나라 선교사님들이 세계 곳곳에 다니면서 통성기도를 가르쳤어요. 그래서 지금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어디를 가도 통성기도를 합니다. 서구 교회에서도 통성기도 하거든요. 예전에 우리나라가 힘들고 어려울 때 부르짖는 기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통성기도가 나쁜 것입니까? 그렇지 않거든요.
이러한 상황화의 원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 꼭 필요합니다.
최근에 공공신학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복음이 공적인 영역에서 자연스럽게 들려지도록 하자는 취지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 배경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기독교의 용어들은 낯설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이 별질 되거나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희수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용찬이에게 전하는 것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같지만 사용하는 용어와 전달 방식은 다르겠죠.
이렇듯 주님을 일은 상대방의 상황과 입장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19–23
19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저는 통성기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여 삼창하고 통성기도해야 마음이 시원하신 분들이 계세요. 이런 분들과 기도할 때는 통성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새벽기도를 꼭 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새벽기도를 한다고 잘하는 것도 아니고요 안한다고 잘못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새벽기도를 통해 은혜 받는 분들이 계시니까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진 본질입니다. 본질은 복음입니다. 복음을 위해 우리는 다양한 모습이 될 수 있고,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려가 없이 열정만 가지고 복음을 전하게 되면 어떨까요? 사람들은 일방적이고 무례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무례한 성도들이 돼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가 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음식을 드시고 같은 옷을 입으셨습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과 아픔을 다 겪지 않으셨습니까?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억지로 복음을 주입하거나 순종을 강요하지 않았거든요.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설명하시고 설득하십니다.
우리가 뭐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주님의 일을 하실 때 일방적이거나 무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상대방을 상황과 감정을 배려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방식만 고집하지 마시고요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 교회의 권위와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6:4
4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바울은 여러 성의 교회를 방문하여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사항을 전달했습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이방인이 구원받음에 있어 할레를 받거나 모세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고, 단지 4가지, 우상의 제물, 피, 목메어 죽인 것 먹지 말고, 음행을 피하라는 것이죠. 이러한 결정 내용을 각 교회에게 전달했다는 것입니다.
왜 이것을 정했다고 했습니까?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화합과 일치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는 것 다 할 필요가 없지만 그들을 배려하여 이것만큼은 지켜달라고 한 것이죠.
이렇듯 교회는 총회의 결정사항을 각 교회에 전달함으로 교회의 일치성과 하나됨을 지켜나갔던 것입니다.
사람이 결정했으니 지키지 않아도 된다가 아닙니다. 이미 나눈 것처럼, 사도들은 이 결정을 성령과 우리는 이라고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결정한 것처럼 보이나 성령님께서 이 모든 절차와 과정가운데 개입하셨고 따라서 성령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교회의 결정이 어떤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는지를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16:18–19
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 말씀은 교회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교회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게서도 풀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치리권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총회처럼, 사도와 장로들이 함께 모여 매고 풀었던 내용들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은 지상교회의 매고 푸는 권세를 통해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결정이 그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결정을 통해 교회는 하나됨과 질서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 하나됨과 질서를 통해 교회는 진리 가운데 서서 거룩함과 순수성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 안에 서기 위해 그리고 거룩성과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결정한 내용들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하는 규범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든든히 세워가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교회가 진리 안에서 하나됨과 질서를 세워갈 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16:5
5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질적성장과 양적성장이 함께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굳건해지는 것은 질적인 성장입니다. 믿음이 견고하게 성장했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을 흔드는 수많은 요소들 속에서 진리의 가르침은 성도들을 견고하게 세운 것입니다. 성도들이 믿음의 견고해지고 성장하게 되면 그 결과 양적으로도 성장합니다. 믿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가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이 꼭 숫자가 늘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양적인 성장은 질적인 성장을 가져옵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우리 교회에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지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신실하고 견고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교회에 오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들이 기쁘고 즐겁게 신앙생활하고, 견고하게 성장하는 모습 속에서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나올 수 있다면 그것이 부흥인 것이죠. 성도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억지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굳건해 지는 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믿음의 사람들이 늘어가는 진짜 부흥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먼저 교회는 진리위에 견고하게 서야 할 것입니다. 목사는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말씀중심의 신앙으로 견고해지셔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주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참된 예배를 드리며 바르게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주의 일을 함에 있어 자세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6-10절까지는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할 때 성령님께서 막으시고 다른 길로 인도하신 내용입니다.
지도를 보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바울의 계획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에베소를 염두해두고 복음을 전했던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막았다고 합니다. 서쪽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브리기아와 갈라디아를 거쳐 북쪽 무시아 지역에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길도 막힌 것입니다.
6절에서는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은 성령님의 뜻인데 왜 막으셨을까? 어떤 방식으로 막았는지 왜 막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의 계획이 어떤 식으로든 저항에 부딪혔을 것입니다.
7절에는 무시아에서 비두니아로 가려할 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거든요.
왜 6절에는 성령이라고 하고, 7절에는 예수의 영이라고 하는가? 예수의 영이 성령님입니다. 그러나 다른 표현을 쓴 것은 특별히 선교의 주도권을 부활하신 예수께서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홀로 선교사역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영인 것입니다.
잘 보시면, 성령님께서 어떤 길을 막으시면서 어떤 길을 열고 계심을 봅니다.
사도행전 16:9–10
9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아시아의 선교사역을 막으신 성령께서는 마게도냐의 선교의 길을 열고 계신 것입니다. 아시아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이곳은 마게도냐 선교이후에 진행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먼저 마게노냐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마게도냐 선교가 시급하다고 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이 분명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진행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사역을 우리를 통해 이루게 하실 때, 그분의 계획에 맞게 움직이길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계획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계획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계획과 실행가운데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과 실행이 아무리 완벽하더라도 항상 성령님의 뜻에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가 있거든요. 그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생각보다 높고 선하고 크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5:8–9
8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잠언 16:9
9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계획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행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성령님의 인도에 민감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막으실 때 까지는 내가 기도하고 세운 계획을 성실하게 진행하십시오. 그러다가 무언가 계속 저항에 부딪히고 될 것 같으면서도 잘 안되고 막히는 일이 있을 때는 성령님께서 막으시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억지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함은 이런 것이다라고 공식화를 시키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막히는 것이 성령님의 뜻일 때가 있고, 때로는 악한 영이 막는 것일 때도 있거든요. 그래서 바울과 선교일행도 환상을 보기 전까지는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결국 성령님께서는 바울에게 환상을 통해 마게도냐로 가게 하십니다.
이렇듯 성령님께서 내 계획을 막으실 때 다른 길을 열고 계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계획이 막히고 있다는 것은 다른 길을 열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왜 이 일을 막으실까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길을 못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위한 길을 열어놓으시고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사역자들이 자주 경험합니다. 어떤 길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진행하려고 하면 자꾸 막히는 것이죠. 그때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여셨던 일들이 여러 가지 생각나지만 시간관계상 다 소개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일들이 참으로 다행이었던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울이 본 환상이 무엇입니까?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이쪽으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환상을 선교일행과 나누었습니다. 이후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합니다. 환상을 본 후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사도행전 16:10
10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우리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우리’라는 표현에 저자 누가 포함되었는지는 논란이 있습니다. 저도 이 부분은 아직 정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의 환상을 선교일행이 함께 나눈 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했고 이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꿈과 환상이 공동체를 통해 점검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꿈을 꾸고 환상을 보았다고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혼자하는 일에야 상관이 없지만 공동체와 연관된 일이라면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를 함께 나누고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할 때 가져야 할 세가지 자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1. 상황화와 유연함입니다.
2. 교회의 권위와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3.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세로 주의 일에 더욱 헌신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