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06-29 06:55

68.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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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68.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행전 19:1–7 

1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본문은 바울의 에베소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3차 선교여행입니다. 

에베소는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꼭 가려고 했던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길을 막으시고 마게도냐 지방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후에 이곳에 들려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변론하기도 했지만 오래 지체 할 수 없어 동역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남겨두고 떠났었습니다. 

이제 3차 선교여행 때 이곳으로 돌아와 장기 체류하며 사역을 진행하게 됩니다. 

 

교통의 요지며 에게 해 연안의 전략 중심 도시, 무역이 발달한 상업 도시, 온갖 이방 종교들이 집결한 우상의 도시, 바로 이 도시가 에베소입니다. 에베소는 당시 소아시아 최대 도시로서 수리아의 안디옥,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지중해 연안 3대 도시로도 불렸습니다. 또 에베소 주변에는 230개 이상의 독립된 지역 공동체들이 에베소와 거래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에베소의 지역적 위상과 중요성은 곧 에베소 교회의 중요도와 직결되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설립하고, 2년 3개월 간 체류하며 직접 전도하고 목회했던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본격적인 에베소 사역은 어떤 제자들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9:1

1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어떤 제자들”은 누구일까요?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닙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성령을 알지도 못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요한의 제자입니다. 

요한의 제자가 에베소에 있을 것으로 보아 요한의 영향력이 얼마큼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볼로의 경우를 보면,  

사도행전 18:25 

25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바울에 버금가는 사역자였던 아볼로도 처음에는 요한을 추종했던 제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에베소에는 요한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례요한은 이미 헤롯에 의해 참수당한지 오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이 에베소에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세례요한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신앙은 참된 신앙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이 구약성경을 알았고 요한의 세례를 받았지만 참된 신앙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바로잡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하심으로 참된 신앙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과정을 통해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참된 신앙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워낙 많이 강조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신앙인들 가운데 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베소의 요한의 제자의 경우 그들의 신앙의 대상이 예수님이 아니라 세례요한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이 신앙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지요. 

2절에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이 질문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너희의 신앙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정말 참된 믿음의 있고 그 믿음 안에서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이들이 신앙은 불완전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들에게 그들이 신뢰하던 세례요한의 말을 인용하여 결국 너희가 믿어야 할 분은 예수님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사도행전 19:4 

4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여기서 우리는 잠시 세례요한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그가 어떤 인물이기에 에베소에 까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을까요?  

 

세례요한의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사명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고”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메시지에 감동을 받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은 당시 타락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마태복음 3:7–12

7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1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러한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로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그의 사역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요한복음 1:6–8

6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임을 밝히고 있고 그의 사명은 사람들을 빛이신 예수께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라고 말한 것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고 착각할 만큼 그 영향력이 막강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 요한 자신도 분명하게 밝힙니다. 

요한복음 1:19–20

19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그러면서 요한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한결같이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1:26–27

26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한은 회개를 선포하였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어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종교적 행위를 통해 위선적 신앙으로 자신을 포장한 자들의 마음속의 죄를 지적하고 들추어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믿었던 것은 이제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 모든 죄악을 심판하시고 정의와 공의로 그분의 나를 이루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가 선포한 메시지를 통해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3:16–17 

16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리스도가 오시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푼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세례가 있고 불세례가 있다는 것입니까?

17절의 보시면 “불에 태우시리라”는 표현이 있지요. 이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즉 세례요한이 기대했던 메시야는 심판의 주로서의 메시야 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죄악된 세상을 불로 태우듯 심판하고 공평과 정의로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보를 보니까 그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고 교제하며 용서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들을 정죄하고 심판하기 보다는 오히려 불쌍히 여시고 용납해 주셨습니다. 

 

이에 요한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 예수가 과연 그리스도인지를 물어보게 합니다. 

누가복음 7:19–20

19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세례요한조차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기대했던 메시야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대하여 이런 평가를 하십니다. 

누가복음 7:28 

28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평가입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저에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심지형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한다면 최고의 찬사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게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칭찬입니까? 아니면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에게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일까요? 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할 때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말합니다. 여러분과 저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지극히 작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례요한 보다 크다는 것이거든요. 

여러분!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는 이유는 무엇이며, 또 우리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지극히 작은 자가 요한 보다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과 연관됩니다. 

세례요한은 마지막 선지자로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보지 못하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을 들었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 위에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사역을 지켜보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 보다 큰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헤롯에 의해 붙잡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동행하면서 주님의 사역을 보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보았고 그분의 부활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도 보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데로 오순절에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였고 성령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사역을 펼쳤습니다. 

 

어떻습니까? 세례요한이 큽니까? 아니면 지극히 작은 자인 예수님의 제자들이 큽니까? 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 부활의 주님을 믿습니다. 우리가 믿을 때 성령님께서 오셨고 그분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삶의 순간순간 마다 성령님께서 도우심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 지난 2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이들을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되었고 성령님의 놀라운 권능과 역사가 펼쳐짐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나에게도 그 복음이 증거되어 지금 이 시간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며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지극히 작은 우리들이 세례요한 보다 낳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낳지 않습니까?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기독교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실하고 탁월했던 세례요한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고, 교회 역사 가운데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도라고 할지라도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라고 할지라도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천주교는 지금도 여전히 성인들을 세우고 그들을 믿기도 하고 그 이름으로 기도도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바울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을 만나 그들이 신앙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이 말씀을 통해 우리 각자는 내가 가진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혹시 나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사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는 아닌가? 간혹 대화하다보면 어떤 분은 돌아가신 옥한음목사님의 제자입니다. 어떤 분은 조용기목사님의 제자입니다. 어떤 분은 고 하용조목사님의 제자입니다. 이 차이를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어떤 목사님들은 제자훈련이나 성경공부를 매개로 자신의 제자로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는 것은 너희의 믿음이 과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참된 신앙은 우리 안에 성령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은 너희 믿음이 참된 것이라면 너희 안에 성령님이 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시점이 언제입니까? 믿을 때입니다. 이 시점이 중요합니다. 믿고 난 후 어느때가 아니라 믿을 때입니다. 즉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는 그때 성령님이 임합니다. 아니 성령님이 임재 하셨기 때문에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님 가운데 이 부분에 대한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오순절파나 은사주의 자들은 믿음을 가질 때와 성령님의 임재의 시점은 다르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분리하여서 믿을 때 물세례를 받지만 성령세례는 성령님이 임재할 때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방언이라고 합니다. 

이것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오늘 본문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의 요한의 제자들이 물세례만 받고 성령세례를 받지 않았는데 바울의 안수를 통해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도하고 예언도 했으니, 아무리 물세례를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성령세례를 받아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축복된 성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렇게 믿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방금 살펴본 것처럼, 요한의 제자들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성령이 임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 물세례가 있고 성령세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라는 것은 내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하나의 극적인 표현을 통해 나타내는 것입니다. 침례든지 물을 뿌리든지의 외적인 행위를 통해 죄가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 표현하는 예식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다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세례는 믿음의 있음을 나타내는 형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을 때 성령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세례입니다. 믿음을 고백하는 성도는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보면, 바울이 안수하매 성령이 임하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 방언을 못하니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것인가 하는 것이죠.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오늘 본문은 성령세례가 무엇인가에 대한 모델을 제공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성령세례는 이런 것이고 성령세례를 받을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남으로 모든 성도는 이와 같이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라 라고 어떤 모델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내용을 가지고 일반화 시키면 안됩니다. 

 

만일 이것이 성령세례의 모델이라면 바울이 선교하는 모든 곳에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동일한 현상은 없었습니다. 단지 사도행전에 성령이 임하고 방언과 예언을 하는 사건이 꼭 네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에게 임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이때 사람들이 방언을 했습니다. 

두 번째는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복음을 선포하고,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물론 이때의 세례를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푼 세례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성령받기를 기도하거든요. 이미 물세례를 받은 자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 성령세례를 받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물세례를 받은 성도에게 성령세례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일까요? 여기서는 방언을 받았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방언이었기 때문에 방언을 했을 것으로 봅니다.  

세 번째는 베드로가 욥바에 있는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집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입니다. 이때도 성령이 임하고 방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입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이 네 개의 본문을 보시면, 예루살렘, 사마리아, 유대에 있는 이방인 그리고 에베소 즉 이방지역입니다. 어떤 말씀이 생각나십니까? 

사도행전 1장8절입니다. 

사도행전 1:8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예루살렘에 임한 성령님께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증거하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네 개의 본문은 성령님께서 이방인지역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임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세례에 대한 모델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신 그 말씀이 성취됨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과연 당시 저주받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성령님이 임하시는가? 그것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가? 그럴 때 사도들을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성령을 받게 하시고 그 증거로 방언받게 하심으로 자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성령이 임했습니다 라는 것을 확증하시는 것입니다. 

고넬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그와 그집에 모인 사람들,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그 증거로 방언을 받게 하심으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 뿐만 아니라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성취됨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입니다. 에베소라는 이방의 땅에 있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그 증거로 방언을 받게 함으로 이방 땅에도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별한 사건을 일반화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좀 어렵지요. 

중요한 것은 믿을 때 성령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믿을 때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믿기는 믿는데 성령을 받는 것은 확신할 수 없습니까? 믿음이 있다면 성령을 받으신 것입니다. 방언을 받지 않아도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 확신 가운데 성령님과 동행하시는 복된 삶 사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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