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08-03 11:48

73. 사역자의 자세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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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73. 사역자의 자세

 

사도행전 20:13–21

13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14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15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16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17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9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계속해서 사도행전 말씀 함께 나누겠습니다.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빌립보교회를 떠나 이제 그가 

계획했던 루트를 따라 진행합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개의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는 드로아에서 앗소로 가는 길에 대한 설명입니다 바울이 홀로 이 길을 걸어가는데 먼저, 이 부분을 살펴보고요, 다음으로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고별설교를 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참 감동스러운 장면인데요. 바울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주까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바울이 앗소로 가는 여정입니다. 

지도를 보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3차 선교여행지도

지난 시간에 드로아에서의 있었던 사건을 살펴보았지요. 누가 생각나십니까? 유두고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던 중 졸다가 떨어져 죽었으나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그를 살려내신 사건입니다. 기억나시죠? 그의 이름의 뜻이 ‘운이 좋은’이란 뜻이거든요. 성경을 보면 이름대로 사는 경우가 참 많아요. 

 

바울이 밤이 새도록 말씀을 전했으니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앗소로 출발하는데, 이때 바울이 뜻밖의 행보를 합니다.

사도행전 20:13 

13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우리는”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겠죠. 누구입니까? 누가와 동행한 선교일행입니다. 그런데 누가와 선교일행이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고 하죠. 그가 무엇 때문에 혼자 이 길을 가고자 했는가는 설교 말미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은 앗소에서 선교일행과 합류하여서 배를 타고 어디로 갑니까? 14절에 “미둘레네”

거기서 이튿날 “기오”. 그 이튿날 “사모” 그 다음날 “밀레도”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 에베소로 가지 않고 밀레도로 곧장 갑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죠. 

사도행전 20:16 

16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아무래도 에베소에서는 데메드리오를 위시한 우상을 만드는 조합들이 여전히 바울을 적대시 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발목을 잡히면 선교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입니다. 바울은 오순절전에 예루살렘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재한 사건이 예루살렘에서 있었기에 그것을 기념하고자 하는 것과, 이때 동행한 각 지역교회의 대표들과 연합함으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무래도 오순절에는 많은 성도들이 모일 것이므로 교회가 연합함에 있어 가장 적절한 시기입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바울은 여정을 서두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는 드로아에서 앗소로 가면서 걸어서 가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것도 누가를 비롯한 선교일행은 배로 앗소로 가고 바울 혼자가 그 길을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본문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나 시간 살펴본 것처럼 빌립보에 머물렀던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바울은 혼자가 앗소까지 걸어갔을까? 성경은 13절에서 바울이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고 하거든요. ‘정하다’(디아타소)라는 단어의 용법을 보니까 ‘명하다’라는 의미로 주로 쓰이거든요. 바울이 주일에 밤이 새도록 말씀을 전하고 아침이 되어 선교일행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형제님들, 여러분들은 배를 타고 가십시오. 저는 걸어서 뒤따라가겠습니다.” 이렇게 한 것입니다. 이때 바울의 의도와 생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이러한 뜻밖의 행동은 이어지는 밀레도에서의 고별설교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다음번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의 고별설교는 바울이 과거의 사역을 회고하고 또 미래에 자신에게 닥칠 일들을 전망하며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 장로들을 청합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까지는 48Km로 멀지 않는 곳입니다. 

먼저 바울은 과거의 자신의 사역을 회고합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은 오늘날 사역자들이 가져야할 자세와 힘써야 할 사역의 내용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사역자의 자세입니다.

1) 겸손 

주님의 일을 할 때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뜻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주님을 높이기에 주님이 사랑하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결국 사람을 대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중요한 자세가 겸손입니다.  

교만하면 주님이 사용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내 지혜와 경험과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할 때도 내 지혜, 경험, 능력을 의지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일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히 주님의 지혜를 경청하고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들은 주님의 뜻을 이룹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습니다. 내 지혜, 경험, 능력 이상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바울은 겸손함으로 사역했습니다. 그는 출신배경이 출중했고 학문에도 능했지만 그러한 것을 자랑하거나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능력만을 나타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로마 감옥에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에베소서 4:1–2 

1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빌립보 성도들에게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빌립보서 2:3 

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골로새 성도들에게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골로새서 3:12 

12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바울이 성도들에게 일관되게 권면하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2) 눈물입니다.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눈물로 사역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만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눈물 흘릴 일도 없습니다. 학원 강사가 수강생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습니다. 수강생이 시험을 못봐도 성적이 안 올라도 눈물 흘리지 않습니다. 학원강사는 지식을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회사 동료들이 내가 해고당한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지는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사랑하는 사역입니다. 사역자가 성도를 사랑하고 성도가 사역자를 사랑하고,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인가를 알려면 눈물이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성도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눈물을 흘린다면 그 공동체에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바울은 눈물의 사역자였습니다. 

사도행전 20:31 

31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에 성도들에게 편지하면 이렇게 썼습니다. 

고린도후서 2:4 

4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서 3:18 

18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바울은 성도들을 향한 애틋한 사랑 때문에 울었고 또한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사랑 때문에 울기도 했습니다. 그 영광이 가려지는 것에 대한 비통의 눈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만큼 하나님 때문에 그리고 성도들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까? 저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가 자신을 돌이켜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 시험을 참는 것입니다. 

주의 일은 참는 것의 연속입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시험과 내부로부터 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바울이 당한 시험은 주로 외부로부터 오는 유대인들의 간계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사역을 비방하고 조롱했습니다. 이때 바울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참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지식과 논리로 유대인들을 충분히 대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참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부분 주의 일에 적대적인 사람들은 감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적인 사람들과 이성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에 시간과 마음을 뺏길 필요가 없습니다.  

 

참는 것의 극치는 오른쪽 뺨을 친 사람에게 왼쪽 뺨을 내미는 것입니다. 보통이상의 성숙함과 넉넉함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참는 수준이 우리의 성숙함의 지표입니다. 아이들은 참지 못하거든요. 그러나 어른들을 참지 않습니까? 어른이 되어도 참지 못하면 아직 어린이 수준인 것이죠.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면 참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상황들과 사람들에 대하여 참습니다. 참는 것에 한계가 넓어지는 것이 성숙입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잘 참습니까? 어려운 환경에 대해,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참고 계십니까? 

정신건강의학 전문의로 일하시는 서천석 박사의 강의에 이런 내용이 나오더라구요.

아이 때문에 화를 참지 못하는 부모가 상담을 받게 됩니다. A4지 용지에 “화내지 말자”를 뽑아서 이것을 집안 곳곳에 붙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후 엄마가 화나는 일이 생길 때 이것을 보니까 조금 참게 되더랍니다. 이때부터 아이가 조금씩 변화 되더랍니다. 재밌는 것은 아이가 이런 엄마의 행동을 보고 자기도 종이에 뽑아서 붙인 것입니다. “엄마 말 잘 듣자”

우리가 조금 만 더 참아도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말할 때 그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3:4 (NKRV)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훈련을 하라고 그 사람이 그렇게 내 속을 썩이는 것입니다. 내 앞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참아 내면서 우리는 성숙해 집니다. 그 대상이 남편일 수도 있고요,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직장의 상사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를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골로새서 1:11

11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에게도 이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능력주셔서 기쁨으로 견고 오래 참게 하옵소서. 

 

4)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결국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내 앞에 사람을 섬길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곁에 안계신 주님을 섬길까요. 그것은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아 각각 구분하기를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한다고 합니다. 

오른편에 있는 양들에게 이렇게 말하죠.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주었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

그랬더니 의인들이 말하죠.

“저희가 어느 때에 그랬습니까?”

주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5:40 (NKRV)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입니까? 이 말씀을 할 당시 함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내 곁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한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곧 성도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을 겸손과 눈물로 그리고 인내로 섬긴 것은 곧 주님을 섬긴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내 곁에 남편, 아내, 그리고 자녀와 부모를 섬기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꼭 교회 일에 헌신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목사가 선교사가 되어야만 주님을 섬기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서 직분자가 되어 섬기는 것만 주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지는 일차적으로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가족을 섬기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남편을 섬기는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내를 섬기는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섬기는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주님을 섬기는 진짜 우리 모습입니다. 

 

5)일관성과 지속성

사도행전 20:18

18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사도행전 20:31

31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처음부터 지금까지...항상”,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이러한 표현은 바울 사역의 일관성과 지속성을 나타냅니다. 

바울의 에베소 사역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처음 유대인의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지요. 3개월 동안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비방하는 세력에 의해 갈등을 빚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두란노 서원으로 장소를 옮겨 말씀사역을 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2년 동안 날마다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이 두란노 서원으로 말씀사역을 옮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일관성과 지속성을 가지고 이 사역을 진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한번 결정하고 시작한 일은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지속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주님의 사역은 오랜 기간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들이고 노력을 들여야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결국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사람은 단시간에 성장하거나 변화되지 않습니다. 신앙을 갖고 갑자기 사람이 변화되지 않거든요. 간혹 있기는 하지만 특별한 경우입니다. 대부분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고 인격과 성품이 성장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일관성을 가지고 얼마만큼 지속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사역의 열매를 좌우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들이 일관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신앙교육을 할 수 있을 때 자녀들의 믿음이 견고하게 세워집니다. 

 

제가 새벽예배를 마치고 운동을 하고 집에 오면 8시가 넘습니다. 집에 들어오면 방에서 엄마와 아이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화장실로 가서 샤워를 하고 나옵니다. 엄마와 함께 아침예배를 시작한지 2개월 정도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희수의 정서가 전보다 좋아진 것 같아요. 

그동안 말로 얼마나 훈계했겠습니까? 엄마는 엄마대로 저는 저 대로 계속 지적하고 가르치면 좋아질 것이라 착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침예배 드리면서 여러 면에서 좋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문제는 이것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살펴본 앞의 네 가지 자세, 

1) 내 자신의 지혜와 경험과 능력을 내려놓고 주님을 의지하는 겸손

2)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함으로 흘리는 눈물.

3) 어려운 상황과 사람을 참아내는 인내.

4) 내 곁의 사람을 섬김으로 주님을 섬기는 섬김,

이 네 가지 자세를 일관성 있게 지속할 때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는 각 가정이 사역지임을 인식하시고 가정에서 이 네가지 사역의 자세로 가족들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우리 가정을 회복하고 또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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