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09-28 11:24

80. 만남 그리고 사명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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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80. 만남 그리고 사명

 

사도행전 22:1-21

1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2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3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4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6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1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12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4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17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8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21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내용은 바울의 간증설교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습니다. 복음 자체에 능력이 있지만 복음을 통해 자신이 변화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간증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유대인들 앞에 서있습니다.  

장소는 안토니아요새의 입구 계단입니다. 소란스런 군중들을 손짓으로 조용하게 한 후 히브리말로 주님을 만난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간 바울의 간증을 살펴보면서 그의 삶을 요약한 두 개의 단어에 집중할 것입니다. 첫 번째는 만남입니다. 

 

1 우리의 구원은 찾아오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이루어집니다. 

기독교는 만남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동안 바울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아는 것과 만나는 것은 다릅니다. 안다는 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고 만난다는 것은 체험하여 아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2:3 

3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바울은 구약성경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당시 가말리엘 문하에게 공부하려면 13세 전에 토라를 다 외워야 했습니다. 토라는 모세오경을 말합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어릴 적부터 토라를 외우게 합니다. 전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앞에서 토라는 외우고 있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의 부모가 철저한 유대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예루살렘의 가말리엘 문하로 유학을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태어난 다소도 당시 대학도시였거든요. 교육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훌륭한 랍비가 되길 바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릴적부터 구약성경을 달달 외우면서 하나님에 대해 배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앎과 삶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열정을 다해 섬겼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문자에 갇혀 있는 지식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무리 많은 공부를 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누군가에게 듣고 배우거나, 스스로 공부하여 얻은 지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 만남과 교제를 통해 아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저의 아버지에 대해 소개하면 여러분들은 저의 아버지가 어떠한 분이신지 알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과 살아계실 때 하셨던 일들, 그리고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아, 심목사님의 아버지가 이런 분이셨구나를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희 아버지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를 압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압니다. 제가 아버지를 아는 것은 함께 살았던 시간들 속에서 경험하고 체험한 것들을 통해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글을 읽어서, 누군가에게 듣고 배워서가 아니라, 만남과 친밀한 교제를 가운데 체험한 것들을 통해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길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공부하고 배워서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을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등장하는 신으로서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으로 이루어집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는 성경에 따라 할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믿었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 의로워진다고 믿었습니다. 

 

빌립보서 3:5–6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던 사람입니다. 

오늘날로 하며 신학대학원 석사 박사 졸업하고, 주일성수 십일조는 물론이고, 정기적인 기도, 금식 구제 등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구원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이뤄집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죽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22:6–9

6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햇볕이 뜨거운 정오의 시각, 바울은 태양보다 밝은 빛을 보게 됩니다. 그는 눈을 뜨지 못하고 땅에 엎드러집니다. 직감적으로 하나님께서 임재 하셨음을 알았습니다. 이미 구약에서 선택된 선지자들에게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도 임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이때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여러분, 바울이 이 질문을 들었을 때 어땠을까요? 바울은 한번도 하나님을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았고 지금도 하나님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죽이려고 가는 길 아닙니까? 

그러니 이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답대신 질문을 합니다. 

“주님 누구시니이까?”

 

여러분! 이 장면이 이해가 되십니까? 바울은 그동안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던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칭찬과 인정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굉장히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누구십니까?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입양교육을 받게 되면, 항상 듣는 내용이, 입양사실을 어릴 적부터 알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청소년기에 알게 되면 충격을 받거나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입니다. 홀트아동복지회 같은 경우에는 6세로, 동방사회복지회는 초등 2학년 때를 적정시기로 말합니다. 실제로 청소년기에 입양사실을 부모가 아닌 다른 경로로 알게 되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당연히 나를 낳아주신 나의 엄마 아빠로 알고 있던 자녀가, 어느 날 너를 낳아주신 부모가 따로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혼란스러움과 충격은 가늠이 안 됩니다.  

아이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올 수 있는 첫 번째 반응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엄마는 누구예요? 아빠는 누구예요?

 

저는 이 순간 바울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에는 내가 지금까지 믿고 있었던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리고 내 앞에 계신 하나님은 누구인가? 라는 혼돈과 충격 속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가 그동안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었던 모든 지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여러분, 이 순간 바울이 받았을 충격이 어떠했을까요?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열정을 다해 살았던 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 그의 삶이 완전히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신앙과 열정이 주님을 박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때까지 나사렛 예수는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신성모독죄를 범한 미치광이로 알았습니다. 그가 나무에 달려 죽는 형벌을 받음으로 결국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저주 받은 나사렛 예수가 부활했을 뿐만 아니라 승천했다고 주장하며 그를 따랐던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살려 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십자가의 저주를 받아 죽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또 부활했다는 것은 무슨 미친 소리인가?

그래서 바울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2:19–20 

19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스데반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가두고 때리고 붙잡아 죽이는 일에 열심을 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 앞에 임재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부활의 주님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주님을 만남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구원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으로 인해 이루어집니다. 

바울이 주님을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찾아 오셨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 구원에 이른 경우가 있습니까? 인간의 그 어떤 의지와 노력으로도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만 가능합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숭배 하던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애굽의 압제 속에서 고통당하던 이스라엘을 찾아오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동족을 박해하는 애굽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쳤던 모세를 찾아오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삶에 허무를 느끼며 살았던 여인을 찾아오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동족들에게 멸시 당하던 여리고 세리장 삭개로를 찾아오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도망간 베드로를 찾아온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 믿는 자를 붙잡아 죽이러 가던 바울을 찾아온 것은 나사렛 예수님 이십니다.

그들은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여러분과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구원은 찾아오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이루어집니다. 

내가 아무리 착하게 살고 선한 행위를 많이 쌓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정기적인 기도, 구제 등 기독교가 말하는 모든 종교적인 제반 행위를 충실히 한다고 해서 구원 얻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말이 아닙니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모든 행위는 헛된 종교행위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살아계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셨습니까?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를 만나셨습니까? 

 

어떤 분들은 분명하고 또렷한 만남의 사건이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 그렇지 못한 분도 계십니다. 저 같이 어릴 적부터 어머니 손에 끌려 교회에 나간 모태신앙인들은 내가 과연 언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는지 잘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셨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내 삶속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이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비록 바울처럼 빛 가운데 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을지라도 주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이 있다면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은혜에 대한 체험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죄사함의 은혜입니다.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나의 모든 죄가 사함 받았다는 것을 믿고 회개한 순간이 있었다면, 여러분은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순간 성령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찾아오신 것입니다. 성경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임하셔서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죄인인지를 자각 하게 하셨고, 이러한 죄인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신 증거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거든요. 여러분에게 이 믿음이 있다면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여러분과 동행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구원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으로 인해 이루어집니다. 

그때 우리는 더럽고 추악한 죄인이었습니다. 삶은 무의미 했고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내 삶에 빛을 비추지 않았다면 내 삶을 공허하고 허무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에 대한 체험은 즉각 사명으로 이어집니다. 

 

2.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면 사명이 생깁니다. 

 

사도행전 22:10

10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이 질문은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동안 바울은 은혜를 받기 위해 애쓰고 노력했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젠 달라졌습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자신의 삶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은혜에 대한 감격 때문에 노력하는 것은 다릅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라 기쁨이 없고 쉽게 지칩니다. 

그러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노력은 자발적이고 기쁨이 있으며 오래동안 지속해도 지치지 않습니다. 

바울이 주님께 무엇을 하리이까? 라는 질문은 자신을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주님 제가 무엇으로 이 은혜에 보답하겠습니까? 주님 제가 주님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게 되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고 싶어집니다. 

자기 유익과 욕망을 추구하는 삶에서 주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과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에 합당한 삶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소요리문답 1문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대답이 이것이죠.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이 마음이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이 없다면 주님께 은혜를 구하십시오.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 그리고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사명 감당, 이것이 바울의 인생이었습니다. 그의 삶을 두 단어로 요약하면 이것입니다. 만남, 그리고 사명.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에게 사명 주신 주님께 감사합시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삶은 전도자가 말한 것처럼,

전도서 1:2–3 

2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그러나 주님을 만남으로 그리고 사명을 감당함으로 우리 삶은 비로소 참된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의 길로 계속해서 걸어가시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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