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82.
사도행전 23:12–30
12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13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14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15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16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17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이르되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 하니
18천부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이르되 죄수 바울이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 말이 있다 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 하매
19천부장이 그의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20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21당신은 그들의 청함을 따르지 마옵소서 그들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니
22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알렸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23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24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25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26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27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28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29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30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사도행전 강해 82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산헤드린 공회에서 담대하게 증언했던 바울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함 때문이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그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을 주목할 것입니다.
첫 번째는 잘못된 종교 신념에 갇힌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에 대한 것입니다.
1. 잘못된 종교적 신념에 갇힌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23:12–13
12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13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본문은 날이 새매로 시작합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폐회한 후 다음날입니다. 유대인 가운데 바울을 죽이겠다고 40명이 동맹합니다.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유대교 열심당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들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결연하고 엄숙한 맹세를 한 것입니다. 그것 만일 이 맹세를 깨뜨린다면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전날 공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발언과 태도에 몹시 분개한 것입니다. 바울이 대제사장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던 것과, 하나님이 너를 치실 것이라는 말, 그리고 바리새인의 아들로 태어나 지금까지 하나님을 섬겼다는 발언을 했다는 것을 듣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신성모독이며 유대교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더 이상 바울을 공권력에 맞기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죽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들이 계획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행전 23:14–15
14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15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산헤드린 공회원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결연한 의지, 무엇입니까?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는 맹세죠. 이것을 말하고 공회원들과 천부장에게 부탁하여 다시 청문회를 열어달라는 제안을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안토니아 요새에서 청문회장으로 이동하게 될 터인데, 이때 자신들이 매복해 있다가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들이 세운 계획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잘못된 종교적 신념 때문에 사람을 죽이기로 맹세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특심한 충성과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사유에만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증명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신실한 신앙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믿음의 근거가 참된 진리인가 아니면 종교적인 신념인가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반면 종교적 신념은 인간이 만든 신앙체계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은 항상 선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신앙체계에 충성하게 되면 파괴적인 행동을 합니다.
바울을 죽이기로 맹세했던 40명의 결사대는 자신들이 믿는 종교적 신념에 목숨을 건 자들입니다. 이들은 사람을 죽이는 계획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 일에 자신의 목숨을 거는 자기 파괴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에 목숨을 거는 것은 신실한 신앙입니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에 목숨을 거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한때 한국 사회에 이념(이데올로기)이 종교적 신념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80년대 학번의 분들은 아마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한국사회에 민주화 열기가 불면서 대학가에는 온통 이념의 물결이 가득했습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제가 91학번인데요. 91년 4월부터 6월까지를 분신정국이라 부릅니다.
그 당시 10여명의 학생들이 온몸에 신나를 붓고 불을 댕겼습니다. 어떤 학생은 건물 옥상에서 투신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존귀한 생명들이 죽어갔습니다. 물론 그들로 인해 민주화가 앞당겨졌다고 말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가치보다 존엄한 것은 없습니다. 그 누구의 생명도 내가 믿는 신념 때문에 파괴할 수 없습니다. 또한 내 자신의 생명도 내가 믿는 신념 때문에 희생시켜서도 안 됩니다.
신념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자신이 믿는 정치적 이념에 종교적 신념을 더하여 과격하고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마치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며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을 받아 무고하게 죽으셨지만,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체포하러 온 군인들에게 칼을 휘둘렀던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52–53
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내가 가진 충성과 열정이 과연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특정한 목회자,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 또는 종교적 신념과 같은 것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바친 시간과 노력은 다 헛된 것입니다.
나의 충성과 열정의 대상이 살아계신 하나님일 때만이 진정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
바울을 죽이려는 계획은 실패하게 됩니다. 그 과정 가운데 어떠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는지 보겠습니다.
먼저, 테러에 대한 첩보를 바울의 생질이 알게 됩니다.
사도행전 23:16
16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은밀하게 진행된 일을 바울의 생질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생질은 바울 누이의 자녀를 말합니다. 바울과는 조카와 삼촌사이입니다. 그가 어떻게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을까요? 학자들은 아마도 바울이 청소년기에 예루살렘에 유학할 때 이미 누나가 살고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바울이 50대의 나이니까 아마도 20대 청년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가 안토니아요새로 바울을 찾아와 이 사실을 알립니다.
바울은 백부장을 청하여 조카를 천부장에게 인도하여 이 사실을 알리게 합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은밀하고 신중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에게 바로 알리지 않고 천부장에게 직접 말하게 합니다. 행여나 이 사실이 외부로 새나갈 것을 주의한 것입니다. 바울의 부탁을 받은 백부장은 천부장에게 청년을 데라고 갑니다. 마치 분위기가 첩보를 다루는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사도행전 23:19
19천부장이 그의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천부장은 청년을 아무도 없는 공간으로 데리고 갑니다. 청년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그대로입니다.
사도행전 23:20–21
20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21당신은 그들의 청함을 따르지 마옵소서 그들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니
첩보를 들은 천부장은 당장에 바울을 비밀리에 호송할 계획을 세웁니다. 이 계획이 상당히 거창한데요, 보십시오.
사도행전 23:23–24
23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24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백부장 둘을 불렀다는 것은 일단 이백명의 군사를 동원한다는 의미죠.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기병 칠십명과 창병 이백명입니다. 기병은 말이 동원된다는 것이고요, 창병은 창을 든 군사거든요. 여러분, 바울 한 사람을 수송하기 위해 보병 이백, 기병, 칠십, 창병 이백 도합 470명이 동원된 것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수비배의 절반에 육박한 숫자입니다.
한 사람을 호송하는 것 치고는 그 규모가 상당합니다.
호송계획은 다음과 같습니다. 때는 제 삼시, 오늘날 저녁9시입니다. 먼저 보병의 보호아래 도보로 산길을 넘어 안디바드리까지 갑니다. 이곳까지는 60Km입니다. 다음 해안 평지길로 말을 태워 가이사랴까지 가게 됩니다. 이곳까지는 40km입니다. 철저한 계획아래 바울의 호송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까지 보면서 무엇을 깨닫습니까?
저는 바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스케일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자들을 보호하실 때는 그 스케일이 우리의 기대 이상입니다.
40명의 결사대를 상대하려면 100명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200명만 되도 넉넉한 숫자입니다. 그러나 470명입니다.
왜 이렇게 많은 숫자가 동원되었을까요?
그것은 이 일을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천부장이 진행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천부장을 통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천부장을 통해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시편 48:14
14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사무엘하 22:33
33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죽을 때 까지 인도하시며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우리의 계산과 기대를 초월하여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산법은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100명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은 470명을 동원하십니다.
사사기에 보면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할 때였습니다.
메뚜기 때처럼 많은 미디안의 군사를 상대하기 위해 3만2천명의 군대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군대를 3백 명까지 줄이십니다.
처음에는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 해서 2만2천명이 돌아가고 1만 명이 남습니다.
만명도 많다고 판단하신 하나님은 물가에서 물먹는 모습을 보고 분별하여 3백 명만 남깁니다.
혹자는 이들이 용사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물가에서 주위를 살피며 물을 먹었다고 해서 용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방식은 하나님께서 숫자를 줄이신 것에 불과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300명만을 남기셨을까?
사사기 7:2
2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만일 3만2천명으로 전쟁하여 승리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군사력과 계략 그리고 용맹함으로 승리했다고 스스로 자랑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이 승리가 하나님의 승리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랑할 수 없는 연약함의 상징적인 숫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숫자가 300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바울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각해 보십시오.
빈들에 남자만 오천명이 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하면 2만 명은 족히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자, 빌립이 계산합니다. 최소 이백 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그들을 먹이시고 12광주리가 남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계산법은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일하실 때 우리의 계산에 매이지 않으십니다.
만일 저의 가정이 결혼 후 10년 만에 형원이를 갖게 되었다면, 물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겠자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간혹 그런 분들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17년 만에 아이를 갖고 18년 만에 태어났습니다. 저의 기대를 초월한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 수준에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지혜와 전능하심으로 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바울은 안전하게 가이사랴로 호송되었고, 총독의 보호아래 헤롯 궁에 거하게 됩니다. 물론 재판을 앞둔 죄수의 신분이긴 했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로 헤롯 궁에 있게 됩니다. 당시 헤롯 궁은 바닷가에 지어진 최고의 휴양시설이었습니다.
#<헤롯 궁 1>
#<헤롯 궁 2>
바울은 이곳에서 안정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어서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를 안전하게 보하실 뿐만 아니라, 쉼과 안식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시편 23:4–5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우리에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시기가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에 늘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 원수가 목전에 있는데 상을 차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은 이것을 체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