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85.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사도행전 25:1–12
1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2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3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4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5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6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7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8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9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10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12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바울이 구금된 후 2년이 흘렀습니다. 때는 주후 59년 여름입니다.
총독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폭동을 잔인하게 진압한 이유로 로마로 소환되었고 그의 정치적 인생은 막을 내립니다. 그 뒤를 이어 베스도가 임명됩니다. 보르기오 베스도, 그는 부임 후 첫 일정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을 만나고자 한 것입니다. 유대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유대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협력과 후원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산헤드린공회원들과 인사를 나눈 후, 유대지역의 상황에 대하여 대략적인 브리핑을 받습니다. 어느 정도 대화가 진행되었을 때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공회원 중 한 사람이 묻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이라는 사람이 구금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인수인계 과정에서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죄수이기에 비교적 자유로운 신분으로 감금되었는가? 베스도도 그에 대해 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유대 종교권력자들은 집요했습니다. 2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이들의 집요함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벨릭스 총독 때에 하지 못했던 바울의 사형선고를 신임총독을 통해 강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2년 전 실패했던 계획을 다시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2년 전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산헤드린공회는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재판정으로 불러내달라고 청하고, 바울이 안토니아 요새에서 이동할 때 숨은 자객들로 하여금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 첩보는 바울의 생질에 의해 바울에게 알려졌고 결국 천부장에까지 보고가 됩니다. 천부장은 750명의 병력을 동원해 바울을 가이사랴로 호송시킵니다. 이후 벨릭스 총독의 주관아래 진행된 재판이 열렸고, 대제사장과 함께 온 변호사 더둘로는 교묘한 전략과 언변으로 고발했지만, 바울은 조목조목 반론하였고 증거부족으로 인해 재판은 무기한 연기된 상태였던 것입니다.
베스도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은 바울이라는 사람이 미결수로 구금되어 있다는 사실뿐입니다.
산헤드린공회는 아직 업무파악도 안된 총독을 구슬려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불러 재판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호송될 때 길에 매복해 있다가 죽이기로 계획을 세워 논 상태입니다. 참으로 집요하지 않습니까? 신임 총독이 예루살렘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즉시 세운 테러계획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젊은 총독 베스도를 잘못 보았습니다. 당시 베스도의 나이가 30대 중반입니다. 어설픈 새내기 총독이라고 얕잡아 본 것이죠. 그러나 그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역사는 그를 탁월한 행정가로 평가합니다. 부임 직후 행보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부임한지 3일 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여독이 풀리기도 전입니다.
또한 그는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5:6
6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예루살렘에서 사건을 접수한 후 바울의 재판을 가이사랴에 도착한 다음날 진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상당히 열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바울을 고소할 때 이렇게 반응합니다.
사도행전 25:4–5
4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5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베스도는 여러 가지 고소내용을 들었을 것입니다. 로마정부에 반역을 일으킨 자다, 이단 사설로 유대인들의 마음을 혼잡케 하는 자다, 그는 전염병 같은 자이므로 속히 처단해야 된다는 둥, 이런 저런 고소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스도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간단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정식재판을 청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적인 자리에서 의논할 사항이 아니고 공적인 자리에서 재판을 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스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입니다. 정치가이고 행정가입니다. 그러나 그가 전임총독과 확연히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이성적 판단과 합리성 그리고 전문성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공정하고 평등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을 유대총독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물론 황제가 임명하고 파견한 것이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의 간섭과 손길이 있었습니다. 베스도의 이러한 사리판단이 결국 바울로 하여금 로마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열게 합니다. 이 부분은 조금 후에 설명될 것입니다.
1. 우리는 여기서 첫 번째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합리성과 전문성을 갖춘 사람들울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안하게 신앙생활하기 위해서는 이런 사람들이 권력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앞으로 대통령선거가 있는데, 이 부분을 꼭 점검하셔야 합니다.
저 사람이 기독교인이더라, 하는 것이 판단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기독교가 장로 대통령을 세우자고 해서 잘 된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세상 권력은 그런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제가 수술을 받게 된다면 기도 많이 하는 의사보다는 전문성을 갖춘 의사에게 제 몸을 맡길 것입니다. 친절한 의사가 아니라 수술 잘하는 의사에게 맡길 것입니다.
여러분, 합리성과 전문성은 무언가를 판단하고 결정하고 진행함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는 더욱 요청되는 요건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합리적이고 더 전문적이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일에 10년 이상을 종사하고도 전문성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열정과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일을 사랑하지도 않고 잘 하려고 하는 의지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10년 이상씩 하고도 성경을 1독도 하지 못하고, 성경구절을 찾는데 한참 시간이 걸리는 분들이 있다면, 말씀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핑계에 불가합니다.
저는 목사님들 중에도 어떤 판단과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느니, 어떤 꿈을 꾸었느니 하는 분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분들을 신뢰합니다. 신앙에는 분명히 신비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합리성과 전문성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전에도 이런 말씀 드린 적이 있지요. 몸이 아프면 기도원에 올라가지 마시고 병원가시라고요. 민간요법 의지하지 마시고 전문의를 찾아가세요. 약 처방받으시고 의사 말 들으세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우울증으로 힘드시면 정신건강의학과 가셔서 상담 받으시고 약 드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호르몬의 문제입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뉴질랜드 사람들은 차를 알 아는 것 같아요. 작은 고장은 집에서 수리합니다. 저도 브레이크 패드가 갈려고 시도해 본적이 있습니다. 토요일 아침부터 시작했는데요, 저녁에 해질 때까지도 마치지 못했습니다. 당장 주일에 차를 써야 하는데 난감해진 것입니다. 결국 늦은 저녁에 출장 수리하는 분에게 전화하여 거금을 주고 수리를 마쳤습니다. 그때 제가 결심한 것이 있어요. 전문가에게 맡기자. 무조건 전문가에게 맡기자. 그들에게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자. 전문가들을 어떤 일을 쉽게 빠르게 편하게 합니다. 그들이 쉽게 하니까 쉬워 보이지 그 경지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이고 경험치를 쌓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자리에서 합리성과 전문성을 갖춘 주의 종들이 되십시오.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마시고 계속해서 성장하시기 바랍니다. 맡겨진 일만 하시지 마시고 그 일을 잘하려고 애쓰셔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성공을 위해 이렇게 하지만, 우리는 충성을 위해서입니다. 주어진 일을 잘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다하나님 앞에서의 충성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충성스럽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삶을 잘 사는 것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밀도의 문제입니다. 오래 살도록 기도하기보다 밀도 있게 살도록 기도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가이사랴에서 두 번째 재판이 열립니다.
2년 전의 고소가 동일하게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바울도 자신을 변호합니다. 그의 변호를 보면 산헤드린의 고소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5:8
8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세 가지죠. 유대인의 율법, 성전, 가이사에게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진술합니다.
앞의 두 가지는 종교적인 죄목이고 나머지는 정치적인 죄에 해당합니다. 가이사는 로마의 황제를 칭하는 용어입니다. 이름이 아니고 직함입니다. 바로가 이집트 왕의 이름이 아니라 왕을 지칭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통령이 이름이 아니라 직함인 것과 같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산헤드린공회는 종교적인 죄목만으로는 사형선고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정치적인 죄목인 국가반란죄를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정황증거나 물증도 없고, 그 어떤 증인도 없었던 것입니다.
베스도는 재판을 통해 바울의 무죄를 확신합니다. 그러나 베스도도 정치인입니다. 유대인의 정치적 지원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사람은 아닙니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지지세력 아닙니까? 산헤드린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사도행전 25:9
9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베스도는 아직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산헤드린공회가 바울을 죽이기 위해 자객을 준비한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예루살렘에 올라다 재판을 받게 되면, 가는 길에 죽게 될 것을 말입니다.
이제 바울은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던지 아니면 가이사랴에 머물던지 둘 중 하나입니다.
가이사랴에 머문다는 것은 복음의 확장이 멈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예루살렘에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뜻밖의 제안을 합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었습니다.
황제에게 항소한 것입니다. 로마의 시민권자로서 황제에게 심판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5:10–12
10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12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바울은 자신의 무죄임이 분명하게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지역에서는 공정한 재판이 불가능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로마로 가서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판단이었는가 하면,
먼저 베스도입장에서 바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골칫거리입니다. 무죄가 입증되었지만 무죄로 석방하게 되면 유대권력의 지원을 못 받을 것이 뻔합니다. 그렇다고 로마시민권자인 바울을 계속해서 감금시키는 것도 부담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황제에게 소송했기에 자신의 관할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무거운 부담과 책임에서 면제된 것입니다.
또한 유대권력자들 입장에서도 반가웠습니다. 유대종교에 위협적이었던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은 바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유대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바울을 죽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것만으로도 반쪽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명 바울의 입장입니다. 바울은 항상 로마에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모든 것의 중심이 로마였습니다. 또한 모든 길은 로마로 향했기에 로마가 복음화 되면 세계선교의 길이 열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로마행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산헤드린 공회의 청문회가 끝나고 안토니아 요새에 있을 때입니다.
사도행전 23:11
11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로마에 갈 것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바울은 늘 로마행을 고대해 왔습니다.
사도행전 19:21
21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로마서 1:15
15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하나님이 뜻을 받고 로마로 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이사랴에 2년 동안 머물면서 과연 로마에 갈 수 있을지 의심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동안 그러했던 것처럼 자유한 신분으로 동역자들과 함께 역동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벨릭스가 해임되고 베스도 총독이 부임되고 그의 재판을 받으면서 그런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이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나면 사랑하는 동역자들을 모아 로마로 가자. 마가와 누가 그리고 디모데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자”
기대에 부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재판을 받으면서 그의 기대는 실망으로 바뀝니다. 베스도가 합리적인 사람이긴 했으나 그도 정치인인지라 유대권력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순간 바울의 뇌리에 번뜩이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으니 그것은 황제에게 상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로마로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비록 미결수의 신분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기대이상으로 일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이전 총독 벨릭스때에도 황제에게 상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벨릭스라는 인물이 전혀 말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 움직이는 탐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신임총독의 재판과정을 보면서 그래도 베스도가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때를 기회로 삼아 황제에게 상소한 것입니다.
역시 베스도는 합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5:12
12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바울의 판단이 맞았습니다. 그는 이 일을 혼자 결정하지 않고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황제상소를 수용합니다.
2.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기대와 넘어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게 됩니다.
바울의 로마행은 그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였는지 말입니다
먼저 만일 바울이 자유인 신분으로 로마로 가다면 가는 길에 유대인 결사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 군인들의 보호아래 안전하게 로마까지 호송됩니다.
또한 이때 바울의 나이가 60대입니다. 당시 60대의 나이는 지금과는 다르게 노인입니다. 그 나이에 이전처럼 이곳저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2년 동안 헤롯궁에 있으면서 체험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찾아오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 중에 벨릭스총독 부부도 있지 않았습니까? 놀라운 것은 바울이 로마에 가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빌립보서를 쓸 때는 로마의 감옥에 있었습니다. 가택연금상태입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마지막 끝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서 4:21–22
21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22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가이사가 누구입니까? 황제입니다. 가이사의 집 사람이라는 것은 황제의 측근들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로마의 심장부에 복음이 꽂힌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연금상태에 있으면서 황제의 측근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그러한 관심이 바울을 찾게 한 것입니다.
도대체 복음이 무엇이기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저토록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하는가? 자신들은 돈과 권력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불안하고 염려가 많은데, 왜 저들은 가난한 중에도 만족하며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사는가?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충격을 받았고 바울을 찾아와 복음을 들었습니다.
이후 312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받아들입니다. 이후 325년 로마는 기독교를 공인하기에 이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는 늘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서 역사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과 상황이 내가 기대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불안하고 염려되고 낙심되십니까?
하나님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우리의 눈물이 반드시 춤이 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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