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11-09 11:45

86. 바울을 죽이려는 이유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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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86. 바울을 죽이려는 이유

 

사도행전 25:13–27 

13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20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23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4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26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신임총독 베스도는 부임 후 빡빡한 공식일정을 갖습니다. 

3일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대의 유력인사를 접견한 후 돌아와 곧장 바울을 재판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그립바 왕의 접견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총독이 아그립바 왕을 만나 자신의 고충을 나누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장면입니다.  

베스도의 고민은 다름 아닌, 전임총독이 구류한 바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사도행전 25:14–21

1벨릭스가 가두어 둔 사람이 하나 있는데, 

15내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 유대 사람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발하여, 유죄판결을 청하였습니다. 

16나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로마 사람의 관례로서는, 피고가 원고를 직접 대면해서, 그 고발한 내용에 대하여 변호할 기회를 가지기 전에는, 그 사람을 넘겨주는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17그래서 그들이 여기에 함께 왔으므로, 나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 다음날 재판석에 앉아서, 그 사람을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18원고들이 일어나서 그를 고발할 죄목을 늘어놓았지만, 내가 짐작한 그런 악한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19그들이 그와 맞서서 싸우는 몇몇 문제점은, 자기네의 종교와 또 예수라는 어떤 죽은 이에 관한 일인데, 바울은 그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20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 사건으로 거기서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21그러나 바울이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그대로 갇혀 있게 하여 달라고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황제에게 보낼 때까지 그를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지난 주 살펴본 내용 그대로입니다. 

베스도는 상당히 곤란한 상황입니다. 예루살렘의 유력자들은 바울의 사형집행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칙대로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밝혀진 것은 바울에게는 죄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2년 전 있었던 전임총독 벨릭스의 재판기록을 뒤져보았을 것입니다. 그때도 무죄였습니다. 성전을 모독한 적도 없고, 유대인의 율법을 범한 적도 없습니다. 또한 로마의 반역을 꾀했다고 하는데 그것도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했습니다. 정황증거도 없고, 물증도 증인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을 풀어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산헤드린공회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소동을 일으킬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전임총독도 바울을 구류시켰던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바울이 황제에게 항소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을 황제에게로 보내야 하는데 이때 보고서를 작성하여 올려야 합니다. 바울의 죄목과 그동안의 재판 과정을 상세하게 작성하여 올려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에게 죄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 보고서를 작성할지 난감한 것입니다. 

 

우리는 2년 전 바울이 예루살렘의 안토니오 요새에서 가이사랴로 호송될 때 천부장이 쓴 보고서의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뭐라고 작성했습니까? 

사도행전 23:25–30

25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26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27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28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29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30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여러분, 이 글이 단지 편지가 아니고 공적문서로 남겨진 것입니다. 법적인 효력이 있는 공문입니다. 이 보고서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죄한 그를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떠오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 판결을 빌라도 총독이 했습니다. 그 과정가운데 몇 차례의 심문이 있었고 그때마다 예수는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23:4 

4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누가복음 23:13–15 

13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여기 등장하는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디바입니다. 그는 조카딸의 요청으로 세레요한을 참수시킨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를 심문했지만 죄를 찾지 못했고, 결국 빌라도가 다시 재판했지만 죄를 찾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3:22 

22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세 번째 말하되, 셋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재판한 빌라도 총독은 예수에게 죄가 없다고 완전하게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판결한 로마법의 공식 판결문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바울도 동일하게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 서게 됩니다. 총독은 그에게 죄를 찾을 수 없어 아그립바 왕에게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겪으신 일을 동일하게 겪고 있습니다. 당시 총독도 왕도 바울에게 어떠한 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권력과 세상 권력은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죄 없는 바울을 왜 그리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부분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왜 이렇게 바울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것입니까?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성전을 모독하거나 율법을 범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의 무엇이 유대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했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나사렛 예수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 메시야,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30년 전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장본인입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는 자신들이 기대한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다윗 왕 때의 태평성대를 이루게 할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행보를 보면 전혀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메시아라고 하기 에는 너무나 초라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말과 행동은 파격적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자들, 병든 자들,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들과 함께 어울렸습니다. 그것을 지적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면서 그들 내면에 숨겨진 죄악을 들추어 내셨습니다. 

 

온갖 종교적인 제반행위로 포장한 그들의 외식을 폭로하셨습니다. 

만일 누군가 우리의 죄를 지적하면, 너나 잘 하세요 하면 됩니다. 우리는 도긴개긴 별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순결하셨고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겉모습은 초라했지만 그분의 말씀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과감한 행동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것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죄인들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어둠이 빛을 당해낼 수 없듯이, 빛 되신 예수님을 어둠속의 죄인들은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7:7

7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다시 바울에게로 돌아와 봅시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죽인 그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증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만났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자를 죽인 셈이 됩니다. 그들이 그토록 경외하는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죽인 것이 됩니다. 그러니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악 중의 악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면 예수는 단지 자기 죄로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도 안 되고, 그러니 부활하면 더더욱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부활의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전에  500명이 있는 곳에 나타나신 적이 있는데 그때 일시에 그 많은 사람이 다 부활의 예수를 만났던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언급한 부분입니다. 

고린도전서 15:6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이런 이유로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소수이기긴 했지만 유대교입장에서는 암적인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전염병같은 자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죽이고, 예수 믿는 자를 조롱하고 핍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를 죽이는 방식은 아주 고상합니다. 예수를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는 하는데 단지, 부패한 세상에 항거한 혁명가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무시하고 인성만을 인정합니다. 역사적 예수에 집착하며 인권운동자 전태일 열사나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이한열 열사 정도로 여깁니다. 

이것 또한 예수를 죽이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포함한 동정녀 탄생 등 모든 신비를 제거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신성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이 또한 예수를 죽이는 행위입니다.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죽이는 일입니다. 

 

 

다음으로 빌라도, 벨릭스, 베스도, 헤롯가문과 같은 정치권력이 바울을 죽이려는 이유입니다. 

이들은 바울의 무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죄판결로 놓아주지 않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결국 자신의 정치기반을 잃을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라는 것은 주권자, 통치자를 의미합니다. 

당시 ‘주님’이라로 불릴 수 있는 존재는 황제뿐이었습니다. 황제만을 퀴리오스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하늘과 땅의 모든 주권자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구원자가 되시며, 만물의 통치자가 되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죽일 이유가 될까요?

누군가 예수가 주권자라고 고백하고 그를 믿으라고 한다면 그를 죽일만한 이유가 될까요?

 

인간 죄의 본성은 자기가 주권자가 되려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인생의 주인공이 되길 원합니다. 내 인생을 내 맘과 뜻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이것을 누군가 방해한다면 그를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 합니다.   

가정과 유치원에서 아동학대가 끊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이들이 내 인생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 맘과 뜻대로 하고 싶은데 아이들이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죄의 중심에는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 되려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내 삶에 주권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할 때, 나는 그 분의 종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상 권력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만일 예수가 주님이라면, 하늘과 땅의 통치자시라면, 우리는 마땅히 그분의 뜻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정치의 영역에서 예수님의 뜻이 구현되어야 하고요, 모든 법률안에는 예수님의 뜻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경제, 교육, 문화예술, 스포츠 등 모든 영역에서 주님의 뜻이 구현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이것을 받아들이기 싫은 것입니다. 자신들을 위한 세상이 되야 하거든요. 자신들 위에 주권자가 있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를 위해 살아야 하고 그를 믿어야 하고 그를 섬겨야 하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내가 내 삶에 주인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결국 자기의 뜻을 굽히고 예수의 뜻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이익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영광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권력자 앞에 섰습니다. 

사도행전 25:23

23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이들은 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기의 유익과 욕망을 추구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버니게가 대표적인 인물 아닙니까?

만일 버니게가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동안 향락과 권력을 추구하며 살았던 삶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얼마만큼 비참한 인생이었는지를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는 시중의 높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주권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머리 숙여 본 적이 없던 그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세상은 이것을 인정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자 관리를 향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8:24–25

24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돈 있고 힘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기 어려운 것은, 모든 것의 주권을 예수님께 양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이런 저런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삶에 고난이 없었다면 과연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님으로 믿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힘과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여전히 내가 내 삶의 주님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받아들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내 삶의 주권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 이라고 고백할 때는 주님이 내 삶의 주권자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내 맘과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택들을 해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손해가 되고, 불편하고, 미련하게 여겨질지라도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길이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가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 길로 가야합니다.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결단과 각오로 주님을 따르는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여전히 내가 주인노릇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은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예수를 죽이고, 그를 따르는 자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로마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는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목배임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죽었다고 복음이 죽은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죽인다고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죽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주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십니다. 

그분이 지금 우리와 함께 여기 계십니다. 

 

이후 역사 흐르면서 세상은 계속해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며 고상한 방법으로 예수의 부활과 신비를 제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은 여전히 죄인들을 구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주님이 복음을 통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가 바로 그 증인들입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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