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9. 베드로의 설교 2 절망에서 소망으로
사도행전 2:22–42
22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27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29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도행전 강해 9번째 시간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로는 두 번째에 해당합니다.
먼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어떤 한 정황 속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이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날은 오순절입니다.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은 방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흩어져 하나님 나라의 큰일을 증거하였고 예루살렘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이때 베드로는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현재 일어난 있에 대하여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이들 대부분은 오순절 명절을 보내기 위해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15개의 나라에서 이민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불과 50일 전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주 충격적인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30대 초반의 청년이 두 명의 강도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한 사건입니다.
이 청년은 3년 동안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습니다. 주로 그는 걷지 못하는 자 앞을 볼 수 없는 자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을 치유하였고 또 귀신들린 자를 고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르침도 많이 했는데 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신기한 기적도 많이 베풀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기로 하였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의 사람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일은 평소 친분이 있던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을 사건들이 순식간에 이스라엘 전 지역에 퍼지게 되면서 당시 로마의 압제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혹시 이 사람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경제적 군사적 강국을 만들어 다윗 왕 때 누렸던 태평성대를 이루게 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특히 오병이어사건을 경험하면서 이 분이 우리의 떡의 문제, 즉 경제의 문제를 해결해줄 메시아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예루살렘 입성 때입니다.
오늘이 교회절기로 종려주일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를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때 성안의 많은 사람이 나와 환호하며 반겼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겉옷을 길에 펴고 또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환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살렘에 들어온 예수는 전혀 뜻밖에 행보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성전에서 일으킨 소동은 로마정부를 긴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종교지도자들을 자극시켰습니다. 당시 성전에서는 제물용 짐승을 팔았습니다. 성전 제사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짐승의 피를 흘려 바쳐야 했는데 원거리에 오는 신자들을 위해 짐승을 팔았던 것입니다. 수익이 괜찮았기 때문에 상인들인 입점하기 위해 제사장에게 상당한 돈을 주었습니다. 짐승을 팔때는 최소 10배에서 30배의 폭리를 취하여 짐승을 팔았던 것이죠.
예수는 성전에 들어가자 채찍을 만들어 짐승을 내쫒았고 장사꾼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엎은 것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수익을 챙겨 이를 통해 로마권력에 빌붙어 있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상당한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본격적으로 꾸미게 됩니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예수가 했던 말이었습니다.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세우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성전은 말 그대로 거룩한 장소로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헐라는 것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를 추종했던 사람들의 마음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메시아로 추종했던 기대와는 달리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행보는 조용했습니다. 그는 별다른 이적을 보여주지 않았고 주로 가르치는 사역에 집중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경고하시기고 했고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하여 무섭게 책망하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제자들과 모여 있을 때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이라며 나약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날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당시 종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계급의 종들이 하는 했던 것입니다.
메시아로서 믿기에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그 중의 한 제자였던 가롯유다가 종교지도자들과 결탁하여 예수를 잡을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를 두 개의 죄목으로 역어 고문하고 결국 처형하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죄목은 종교적 차원에서의 죄입니다. 그것은 신성모독 죄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것과 성전을 모독했던 발언을 그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십자가 처형을 하는 것인 불가능했습니다. 더 자극적인 죄목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국가반란죄였습니다.
예수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충동질 하여 로마에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려주일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큰 소동이 바로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반역세력의 선봉에 서서 결국 로마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칠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생각해낸 것입니다.
결국 예수는 붙잡혀 대제사장에게 불려갔고 여기서 종교재판이 행해집니다. 두 가지 질문을 받습니다.
네가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느냐? 이때 예수는 침묵하십니다. 그러자 두 번째 질문,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고 묻습니다. 이때 예수는 “네가 말하였느니라” 하면서 인정합니다. 그러자 대제장이 옷을 찢으며 분개합니다.
신성모독죄가 성립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빌라도 총독에게 끌려가 두 번째 재판을 받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는 “네 말이 옳도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으로 민란의 주동자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입니다. 국가 반란죄가 성립된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속셈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지만 그것만으로 처벌을 하기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분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때 유월절 명절을 지내러 약 3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작은 도시에 모인 것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명절입니다. 이 명절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사회는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단합하였고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업고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 싶었던 것입니다.
당시 본국 로마 정부로부터 신임을 얻지 못했던 빌라도는 이 사건을 잘 이용하기만 하면 정치적 입지가 단단하게 세워질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론몰이를 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명절에 특별 사면하는 전례가 있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누구를 놓아주길 바라느냐? 바라바는 당시 유명한 죄수였습니다.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며 군중심리를 자극하시 시작합니다.
빌라도는 당연히 바라바를 선택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질문을 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군중들은 바라바를 선택합니다.
빌라도의 여론몰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이것은 재판관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총독은 오늘날로 하면 시장쯤 되는 것이죠. 국가 일을 하는 공무원입니다. 그가 법과 질서에 따라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여론몰이를 하고 그것에 편승하여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외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시위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간혹 보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시위모습은 상당히 과격합니다. 동작도 굉장히 큽니다. 우리는 주먹지고 손을 올리는 정도지만 이들은 표현은 거칠고 강합니다. 아마도 당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할 때 그들의 동작이나 외침이 얼마나 과격했을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외침을 수용하여 빌라도는 십자가형을 명하게 됩니다.
이후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는 십자를 지고 죽게 됩니다.
여론은 냄비처럼 끊었다 금새 식어버리죠. 그 끔찍하게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은 그 청년을 사람들은 기억에서 지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50일이 지나 오순절이 되어 다시 예루살렘에 모인 것입니다.
이날 그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120명의 예수를 추종했던 자들이 방언을 말하고 있고 그 가운데 열한사도가 서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중앙에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갔던 베드로가 서 서 담대하게 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설교가 바로 우리가 읽었던 말씀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2:22–23
22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베드로는 지금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3년간에 나사렛 예수라는 청년이 행했던 사건을 압축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라는 이름은 흔했습니다. 구원자라는 의미죠. 그래서 나사렛 출신 예수라고 칭함으로 사실성에 무게를 싣고 있습니다.
그가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베푼 것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빌라도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던 일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가 신성모독과 국가반란죄로 십자가가 처형을 당한 사실로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십자가 처형은 로마가 고안한 사형제도였습니다. 살인과 같은 극악한 죄를 범한 자나 국가반란죄를 일으킨 자들을 처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워낙 끔찍한 처형방식이어서 로마인들에게는 행하지 않았습니다. 공개처형 방식이어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는 목적으로 행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와 두 강도가 함께 매달려 죽었던 일들을 기억했습니다.
그 일을 자신들이 주도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며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제 충격적인 선포를 합니다. 그것은 그가 다시 살아났고 하늘로 승천하였으며 지금은 하늘 보좌 우편에서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너희가 그토록 존경하는 다윗의 후손 이였으며 다윗조차도 주님이라고 불렀던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36절에,
사도행전 2:36
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여러분! 그들이 얼마만큼 충격을 받았을까요?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그 나사렛 청년 예수가 주님이며 그리스도 즉 구원자이며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불과 50일전 군중심리에 이끌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라고 외쳤던 그들입니다.
예수는 죽었고 이후 들리는 소문을 통해 예수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제자들 중 누군가 훔쳐갔을 것이라는 소문이 들렸지만 당시 로마 군인들이 순번을 서가며 무덤을 지킨 것을 알았던 사람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또 어떤 소문에는 예수가 실제로 부활했고 그것을 본 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외치길, 예수는 살아나셨으며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32절 “사도행전 2:32
32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우리가 라는 것은 베드로뿐만 아니라 함께 서 있는 11사도를 비롯하여 120명의 성도들 모두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를 만났고 함께 있었으며 그가 우리가 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놀라고 있는 방언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던 청중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37
37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여러분 이것이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어질 때 일어나는 죄인들의 반응입니다.
먼저는 마음의 찔림이 있습니다. 그들이 느낀 마음의 찔림은 어떠했을까요? 자신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가 하나님께 보내신 메시아라는 사실에 손과 발이 떨렸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를 죽였던 역사를 알았던 그들입니다. 그 일을 설마 자신들이 행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신들이 죽인 것은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절망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기에 도망칠 수도 핑계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망할 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되지?”
그들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그들은 두려움 가운데 절망하며 사도들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절망이 구원에 이르는 중요한 과정이 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절망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자신에 대해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 내 능력이나 지혜를 의지하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죠. 절망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절망할 때, 구원의 소식이 소망으로 다가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절망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자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결국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죽어가는 자를 향해 저주를 퍼붓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복된 소식을 선포합니다.
38절에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을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회개는 삶의 목적과 방향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단순히 과거의 지은 죄를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얼마만큼 죄인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향하여 삶의 목적과 방향을 완전히 돌이키는 것입니다. 세례는 회개한 것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방식입니다. 내가 회개한 것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세례를 통해서입니다. 그때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40절에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선포를 통해 회개한 자들이 삼천 명이나 되었고 그들은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종려가지를 들로 예수를 환호했습니다. 몇 날이 안되어 그 손에 돌을 들고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이제 죄사함을 받기 위해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이 베드로의 외침이 2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라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때의 사람들과는 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는 시대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똑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지는 않을 지라도 SNS를 통해 예수를 향한 저주와 분노를 쏟아놓았을 것입니다. 청화 대 게시 글에 올려놓고 예수를 심판하자고 여론몰이를 했을 것입니다. 2천 년 전 베드로 앞에선 청중들이나 우리나 시대만 다를 뿐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처럼 우리도 자신에 대해 절망할 필요가 있습니다.
형제들아 그러면 어찌할꼬!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회개하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이 시간 구원의 은총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죄사함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죄를 지었든 간에,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향하여 저주를 퍼붓던 자들에게, 하나님,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며 용서를 구했던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하십니다.
이번 한주가 고난 주간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주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참 자유와 기쁨을 허락하신 주님을 깊이 묵상하시는 한주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