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92. 우리의 사명
사도행전 28:11–31
11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12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13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낸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14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15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16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17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18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19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20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21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2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23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24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29(없음)
30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사도행전 강해 92번째 시간입니다.
멜리데 섬에서 3개월간 겨울을 보낸 바울은 배를 타고 로마로 향하게 됩니다.
그 여정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도 – 바울의3차 전도여행
저자 누가는 이 모든 것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배의 머리에 달려있는 표식이며, 또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 며칠을 머물렀는지 언급함으로 사도행전이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드디어 그토록 원하는 로마에 도착합니다. 비록 죄수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이 또한 자신이 선택한 것입니다. 그는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를 받고 재판 과정 중에 가이사 황제에게 상소했던 것입니다.
부득이한 선택이었지만 최선의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격한 유대인들에게 테러를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로 가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을 선택했고 그것은 황제에게 재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미결수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결국 안전하게 도착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펼쳐질 일들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모든 문명의 최첨단을 달리는 로마에서의 사역이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역시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에 감사했습니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믿음의 형제들의 따듯한 환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보디올에 도착했을 때입니다.
사도행전 28:14
14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보디올 거주한 성도들의 따듯한 환대를 받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7일을 머물면서 영육간에 안식했을 것입니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어땠습니까? 이곳에서도 따듯한 환대를 받습니다.
사도행전 28:15
15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바울은 계속되는 형제들의 환대을 받으며 하나님께 감사했고 또 담대한 마음을 얻게 됩니다.
여리서 우리는 첫 번째로 귀한 교훈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주의 일에 헌신 한 자들이 어디를 가든 믿음의 형제들을 통해 위로하고 용기를 주며 담대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공동체로 모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지치고 힘들 때 위로 받는 것은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통해서입니다. 아무리 능력의 사역자 바울이라고 할지라도 지칠 때도 있고 두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힘과 용기를 주셨던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배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삶을 나누는 곳이 교회입니다. 단지 예배만을 위해 교회에 다닌다면 어느 교회든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우리에게 믿음 형제자매들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들을 통해 받은 위로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 신앙생활의 기쁨을 얻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선 공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바울은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보낸 로마서를 통해서만 알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은 복음 안에서 모두가 형제요 자매였던 것입니다.
저는 해외에 가면 먼저 교회를 찾습니다. 아무리 낫선 곳이라도 교회에 가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지만 친숙합니다. 언어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지만 한국에서 만난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같습니다. 실제로 그분들은 그렇게 대해 주셨습니다. 오클랜드의 세인트 헬리어스 교회에서 사역할 때입니다.
현지인 교회 사역을 시작한지 얼만 되지 않아 아내가 감기에 걸렸습니다. 긴장한 탓도 있고
무리한 탓도 있습니다. 프랜이라는 동역자가 있습니다. 나이는 장모님과 같은데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간호사였습니다. 자주 집을 방문하고 전화도 해 주면서 챙겨 주었습니다. 스탠 목사님은 마누카우꿀과 레몬을 사들고 와서 이곳에선 감기에 이것을 먹는다면 신경써 주셨습니다. 교회 회계업무를 하던 중국인 비비안은 한약재를 넣은 닭죽을 끓여 가져다 주었습니다. 별거 아닌 감기에 성도님들에게 받은 사랑이 참 따듯했습니다. 그래서 인지 금새 회복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주변이 믿음의 사람들이 있고, 그분들의 따듯한 사랑이 있다면 견디고 감당할 수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코로나로 인해 힘든 순간들이 있었지만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성도들의 따듯한 마음과 사랑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돈을 주고 살수도 없고요,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도 없습니다.
우리가 험악한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러한 성도의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주목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 안에 사랑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교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감사의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3
3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바울이 기도의 자라에서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했기 때문입니다. 일부 몇 사람만이 아니라 모두가 서로 풍성한 사랑을 나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다가오는 새해에는 기쁜우리교회 가운데 더욱 깊고 풍성한 사랑의 교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로마에 도착했지만 자유로운 신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감금된 죄수의 신분도 아니었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로마에서의 삶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군인들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28:16
16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또한 바울은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유숙하는 집에 있다가 나중에는 셋집에 살게 됩니다.
사도행전 28:23
23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사도행전 28:30
30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이 셋집에서 이년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이 했던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재판을 받기위해 로마로 온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바울은 미결수신분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복음전도자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전도방식을 보게 됩니다.
1. 자신에게 익숙하고 친숙한 사람들이 우선적인 전도대상자들입니다.
바울의 로마의 사역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전도방식은 일관됩니다. 어디를 가든 유대인 회당을 찾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지요. 마찬가지로 로마에서도 유대인 그것도 지도층 인사들을 만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로마인들을 만나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익숙하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전도방식은 우리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 익숙하고 친근한 사람들 그들이 먼저 우리의 전도대상자들입니다.
2. 복음을 전할 때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고 유대지도자들의 방해가 받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로마로 오게 된 것인지 성경을 짤막하게 기록하였지만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살펴본 내용을 복기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8:17–20
17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18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19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20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바울은 유대교를 적대시 한 적이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오히려 우리 조상들이 기대하고 바라는 소망을 전함으로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소망이 무엇인지 압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처음부터 예수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로마의 전도를 조심성을 가지고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만일 이전에 했던 방식그대로 처음부터 너희가 죽인 나사렛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라고 하면, 로마에서도 유대인들은 복음을 듣기도 전에 적대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소망이라고 에둘러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로마의 유대 지도자들이 바울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전혀 모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막연히 새로운 종파가 등장했다고 여겼습니다.
사도행전 28:22
22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바울은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빨리 전하고 회심시켜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 바울의 성숙함이 드러납니다. 젋은 때는 열정이 앞섰다면 이제는 주위를 돌아보며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3. 성경을 가르치되 계획을 가지고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8:23
23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먼저 정해진 날짜에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성경 말씀을 가르친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성경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가르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주신 목적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공부하고 암송한다고 해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 성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당대 최고의 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는 토라 즉 모세5경을 달달 외웠습니다. 정기적인 말씀 공부 시간이 있었고 철저하게 경건훈련을 했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는 완벽한 신앙인 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에 바울은 이미 알고 있는 성경이지만,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함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가르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주신 목적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종교이고, 윤리적 교훈에 불과합니다. 생명의 사건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20:31
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성경을 주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까지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이런 사건이 등장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명의 제자들과 동행하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성경을 말씀하시며 성경의 모든 것이 결국에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하고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4:27
27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것은 우리의 말씀 공부와 묵상, 설교, 등 성경을 통해 진행되는 모든 것들의 목적이 결국에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려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4.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몫이지만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성경을 가르쳤지만, 그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사도행전 28:24
24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여러분! 이것이 복음을 대하는 세상의 반응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복음을 제대로 들으면 믿음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전하는 자의 탁월함에 있는 것도 아님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복음을 아무리 쉽고 감동적으로 전한다고 모두가 믿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믿음 사건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8:26–27
26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 말씀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사명을 받을 때에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나를 위해 갈꼬 할 때 이사야는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전해도 사람들이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6:8–10
8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이 말씀은 예수님께도 인용하셨고요, 사도요한도 인용했습니다.
그 만큼 전도자에게 중요한 의미를 담은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3:14–15
14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요한복음 12:39–40
39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저자 누가는 사도행전을 바울이 깨달은 이사야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사도행전의 역사가 이 말씀으로 정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결국
우리가 말씀을 전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눈을 띄어주시고, 깨닫고 해주시고, 알게 해주셔마나 복음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믿을 수도 있고 나중에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구원하고 믿음의 길로 이끄시는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여러분들 주변에 아직까지 복음을 듣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반드시 복음이 전해진 곳에서만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을 통해 죽은 생명을 살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처럼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일에 헌신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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