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82. 말씀 중심의 삶
신명기 27:1–10
1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2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3요단을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라
4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5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6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7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8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
9모세와 레위 제사장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아 잠잠하여 들으라 오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10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도착한 후에 가정 먼저 해야 할 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율법을 기록한 돌을 세우는 것과,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먼저는 말씀 중심의 삶을 살라는 것과 또 하나는 예배 중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성도의 삶을 견고하게 하는 중심축입니다. 예배 중심의 삶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기 때문에 오늘은 말씀 중심의 삶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명기 27:2–3
2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3요단을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한 큰 돌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큰 돌들을 세우고 표면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줍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백성 삶의 중심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말씀이 정확하게 기록되고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씩 살펴보겠습니다.
1.말씀중심의 삶은 무엇인가?
여러분, 말씀 중심의 삶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말씀의 통제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 우리가 하는 말, 어떠한 것을 판단할 때, 그리고 우리의 모든 선택과 결정에 하나님의 말씀에 통제받는 것을 말합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내 언어를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내 모든 판단의 기준에 하나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선택의 순간 하나님 말씀을 따라 선택해야 합니다.
모든 결정의 순간 하나님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라이프 스타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가장 먼저 말씀의 기념비를 세우듯, 우리가 죄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하나님 말씀을 여러분 삶의 중심에 세워야 합니다.
이제는 내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 경험과 지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단순한 신앙의 원리이지만 많은 성도가 간과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삶에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까?
우리가 말씀중심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내 자아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강할수록 하나님 말씀이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자아가 강할수록 자기 욕망이 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알고 있음에도 자기 욕망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 말씀은 윤리적 교훈과 종교적 교양을 주는 차원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좋은 설교를 들어도 “참 좋은 말씀이야.” 정도에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내 뜻이 더 강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내 삶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씀중심의 삶을 사는 성도들은 모든 상황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묻습니다. 또한 순종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비록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지만 그래서 더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순종하기 위해 애씁니다. 자기 뜻과 달라도 말씀에 순종합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없어도 오히려 손해를 보아도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시편1편은 말씀 중심의 삶의 방식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시편 1:1–6
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떻다고 말합니까?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라이프 스타일입니다. 이런 성도들은 늘 성경책을 가까이합니다. 틈틈이 성경을 읽습니다. 말씀 묵상의 시간을 따로 떼어 놓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인들의 꾀를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의 길에 설 것입니다. 오만한 자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 중심의 삶을 사는 성도들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합니다.
반면 악인들은 어떻습니까?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그들은 중심이 없으므로 이리저리 날아다닙니다. 기준도 없고, 원칙도 없습니다. 일관성도 없습니다. 자기 욕망과 이익이 기준입니다. 따라서 작은 이익에도 쉽게 자리를 옮겨 다닙니다. 그 결과, 악인들은 망합니다.
우리 모두는 요단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간 자들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을 세워야 합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복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내 판단과 결정이 최선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내 수준에서 최선일 뿐입니다. 그리고 늘 바뀌지 않습니까? 상황에 따라, 그때의 감정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고...
그것이 여러분의 삶을 복되게 하지 않습니다. 눈앞에 이익을 따라 가면 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절대적입니다. 진리는 보편적입니다. 진리는 불변합니다. 따라서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면 후회하지 않습니다. 망하지 않습니다. 축복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일상은 말씀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의 조항들 총 613가지의 ‘하라’ 와 ‘하지 말라’는 계명에 통제받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유치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것 하십시오.’ ‘이것은 하지 마십시오’라고 통제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유치한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어릴수록 “하라” 와 “하지 말라”의 계명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에게는 많은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이거 하면 안 돼.’ ‘이것은 해야 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장하게 되면 설명을 붙입니다. 왜 해야 되는지, 왜 하면 안되지는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영적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라’와 ‘하지 말라’의 계명으로 그들의 삶이 다져지길 바랐던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부모를 공경하라.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러한 계명들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신약의 성도들 즉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가 우리 삶에 말씀의 기념비를 세우고 말씀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우리도 구약의 성도들처럼 하라와 하지 말라의 계명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요?
2 말씀중심의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신약의 성도들에게 말씀 중심의 삶은 두 단계로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가장 기초적인 단계입니다. ‘하라’와 ‘하지말라’의 계명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먼저 되어야 다음 단계의 신앙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념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주일예배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주신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성경 66권 안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에 먼저 순종해야 합니다. 주일 설교를 통해 저는 하나님의 뜻을 여러분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깨닫고 알았다면 순종해야 합니다. 단지 듣지 좋은 말씀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먼저는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단계입니다. 이렇게 말씀중심으로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세웠다면, 다음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항상 민감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어떤 에너지나 신비한 힘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이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지금 우리 곁에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심령을 채우고, 여러분의 의식이 항상 성령님께 열려 있을 때 성령님은 여러분에게 분명한 하나님 뜻을 알려 주십니다.
고린도후서 3:3
3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 구약성도들은 돌판에 쓴 말씀을 따라 살았다면, 너희는 성령이 너희 마음에 새긴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성령님께서 새겨 넣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예례미아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예레미야 31:33
33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약의 돌판에 새긴 율법은 우리의 연약함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이루지 못하게 했지만, 앞으로 성령님께서 너희 가운데 임재하시면 그 율법이 너희 마음에 새겨져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6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신약의 성도들은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마침내 순종하게 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하고 싶어도 성령님이 막으시면 멈추어야 합니다. 아무리 하고 싶지 않아도 성령님이 원하시면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은 가장 먼저 가롯유다의 자리를 채우는 일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그들은 먼저 후보자를 두 사람으로 압축했습니다. 유스도 라고 하는 요셉과 맛디아입니다. 이때 사도들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사람을 세우기 위해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제비뽑기는 구약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에 들어가 땅을 분배할 때 이 방식을 사용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매끄러운 돌로 추정되는 우림과 둠밈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사도들도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제비뽑기를 방식을 시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제비뽑기는 이때가 마지막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제비뽑기를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사도행전 2장에 어떤 사건이 기록되었습니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이후 사도들은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갑니다.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놀라운 사역을 펼쳤습니다. 귀신이 떠나가고 중풍병자가 나았습니다. 수많은 표적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전도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사마리아에서 안정적으로 사역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그를 남쪽 예수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보내십니다.
사도행전 8:26
26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그곳에 가보니 수레가 지나고 있었습니다. 에디오피아 재무부 장관이 탄 수레입니다.
사도행전 8:29
29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베드로가 기도 중에 환상을 봅니다. 하늘로부터 부정한 짐승이 내려오고 그것을 먹으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욥바에 사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라고 하십니다.
사도행전 10:19–20
19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바울은 다니는 곳마다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아시아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막으셨습니다.
사도행전 16:6–7
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성령님께서는 가라고도 하시고 막으시기도 하십니다. 분명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제비뽑기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돌판에 기록된 말씀을 따라 살았다면 신약의 성도들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물론 성경 말씀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상태에서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은 위험합니다. 먼저는 신구약 성경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하나님께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단단하게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의식이 성령님께 열려 있어야 합니다.
제가 그동안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결정을 했을 때 당장에는 좋아 보였지만 후회가 남았습니다. 특히 경제적 이익을 중심에 두고 결정했을 때는 큰 후회를 남겼습니다.
한국에 들어와 사역지를 알아볼 때였습니다. 제가 지원한 교회는 부목사 사례비가 중대형교회 담임목사님보다 많았습니다. 세차를 뽑았고, 양가 부모님께 용돈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좋은 곳에서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제 아내는 우울증에 걸렸고 나중에는 공항장애까지 겪었습니다.
뉴질랜드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지만, 저와 아내는 이미 한국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분명한 하나님을 뜻을 거절하고 우리 뜻대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역지도 기도하며 결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삼년 동안 저희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우리 뜻대로 결정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가 였습니다.
이후 저희는 항상 무언가를 결정할 때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 판단과 기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듯 선한 열매들이 맺어졌습니다. 그리고 형통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일들을 선택할 때 돈을 따라 가지 않습니다. 어떤 유익이 있는가를 살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오랜 동안 기도하고 결정한 일들은 언제나 성공적이었고 감사가 있었고 기쁨이 있었습니다.
3, 말씀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의 말씀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이해하고 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7:8
8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
말씀을 큰 돌에 석회를 바르고 기록하라는 것은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분명하고 정확해야 합니다. 빼거나 더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씀 그대로 기록하여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에 가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단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빼거나 더하고, 이상하게 조합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교주를 경외하게 합니다. 상식과 이성, 윤리와 도덕을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쓰레기 버리듯 버립니다. 가족을 파괴합니다. 이단 교리로 가스 라이팅, 심리적 지배를 하여 종교에 노예로 삼아 버립니다. 이들 대부분이 성경을 가지고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어야 합니다. 분명하고 정확하게 해석되어야 하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분명하고 정확한 신앙이 세워집니다.
불분명하고 비정확한 해석 위에 세워진 신앙의 집은 쉽게 무너집니다. 따라서 말씀 중심의 삶에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분명하고 정확한 기록과 이를 바탕으로 한 해석과 적용입니다.
따라서 지금도 신학자들은 성경의 원문을 충실히 번역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주신 의도에 맞게 번역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개역한글 성경은 1961년 이전 성경을 개정한 것입니다. 그러다 1998년에 개역개정으로 판이 나옵니다. 그동안 불분명했던 구절을 더욱 분명히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러 산에 올라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두 종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개역한글의 경우
창세기 22:5
5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개역개정의 경우,
창세기 22:5
5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우리가 돌아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큰 차이입니다. 우리가 돌아온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지만 함께 돌아올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 하나님께 그를 살리실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이를 증언합니다.
히브리서 11:17–19
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기록하고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이 무엇인지도 명확해집니다.
저는 일은 하나님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세상의 지혜, 처세술, 감동적인 이야기들 보다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을 끌어나갈 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견고하게 세우시길 바랍니다. 늘 말씀을 가까이 하시고, 읽고 묵상하는 일에 부지런을 내시길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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