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83. 복과 저주를 선포하라
신명기 27:11–26
11모세가 그 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2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13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14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15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
16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7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8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9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0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1짐승과 교합하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2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어머니의 딸과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3장모와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4그의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5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6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우리 인생은 둘로 나뉩니다. 복받은 인생과 저주 받은 인생입니다. 사람도 둘로 나뉩니다. 복있는 사람과 저주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복 받은 인생입니까? 아니면 저주 받은 인생입니까? 여러분들은 복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저주 받은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에발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복있는 인생, 복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저주 받은 인생, 저주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주 말씀과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명기 27:11
11모세가 그 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 날’은 같은 날을 말합니다. 27장 전체가 같은 날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말씀과 연결된 것입니다. 말씀의 기념비를 세우고 난 이후에 이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12지파가 6 지파씩 둘로 나뉘어 그리심산과 에발산에 서고 그리심산에서는 축복을 에발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발산에서 선포할 12저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심산에서 선포할 축복은 생략되었습니다. 본문을 잘 보면 에발산에서 행해야 할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먼저 에발산에 말씀을 기록한 기념비를 세우고 제단을 세우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야 합니다.
신명기 27:4–5
4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5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또 이곳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27:13
13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당시의 장면을 연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여섯지파, 르우벤, 갓, 아셀, 스불론, 단, 납달리 지파가 에발산에 오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사진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그리심산 에발산
왼쪽에 있는 산이 그리심산이고 오른쪽에 있는 산이 에발산입니다. 그 사이에 있는 마을이 세겜입니다. 그리심산은 해발867미터이고 에발산은 해발925미터로 그리심산보다 58미터 높습니다. 이곳은 현재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어 성지순례를 할 때도 들어가기 힘든 지역입니다. 제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상당히 긴장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가 성 여인을 만났던 야곱의 우물과 요셉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에 출애굽할 때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오지 않습니까? 그 유골이 이곳에 묻혀 있습니다.
에발산에 오른 여섯 지파는 큰 돌들을 준비하게 됩니다. 돌 표면에 석회를 바릅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세웁니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은 다듬지 않은 돌을 가져와 제단을 쌓게 됩니다. 제단이 완성되면 그 위에 짐승을 잡아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는 제물을 태워 그 향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제사입니다. 이후 화목제사를 드립니다. 화목제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분쟁을 종식하고 화평과 친교와 연합이 이뤄졌음을 감사하는 제자입니다. 따라서 이 제사는 축제적 분위기에서 진행되었고 제물을 함께 나눠 먹으면서 감사와 찬양을 드렸던 것입니다.
신명기 27:7
7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그러니까 분위기가 엄숙하기보다는 축제적 분위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번제와 화목제가 끝나고 나면,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기 위해 산에 서게 됩니다. 이때 레위인들이 선창으로 저주를 선포합니다. 그러면 산에 선 백성들이 ‘아멘’으로 화답하게 됩니다.
이런 식입니다.
신명기 27:14–15
14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15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
이렇게 열두 저주를 하나 하나 선포할 때마다 아멘을 화합했던 것입니다.
여기 기록된 열두 개의 저주를 보면 네 부분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1.수직적 관계에서의 저주입니다.
1)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저주를 받을 행위입니다. 15절의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행위입니다.
2)수직적 관계에서의 부모 경외입니다. 부모를 경홀히 여기면 저주를 받습니다.
2.수평적 관계
이어지는 세 저주는 수평적 관계, 즉 이웃과의 관계에서의 저주받을 행위입니다.
3)경계석을 치우는 것, 무엇입니까? 이웃의 재산권에 손해를 입히는 것을 말합니다.
4)시각 장애인을 속이는 것, 무엇입니까? 신체적 약자를 억울하게 하는 일입니다.
5)고아 과부 객 등의 사회적 약자를 억울하게 일입니다.
3.성범죄/다음으로 이어지는 네 개의 저주는 성범죄와 관련됩니다.
6)의붓 어머니와 동침하는 자, 장모와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7)모든 형태의 수간은 저주를 받습니다.
8)이복형제와 성관계를 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9)장모와 성관계 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4.살인/ 다음 두 가지는 살인과 관련됩니다.
10)살인은 저를 받습니다.
11)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5.마지막
12)율법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의 백성은 복 받는 인생 살겠다고 맹세,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저주 받는 인생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여기 기록된 12저주는 대표적인 저주 행위를 12가지로 요약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저주 받을 행위를 선별하여 규정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열두저주가 모두 개인적이고 은밀한 죄라는 사실입니다.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은 누가 어떻게 했는지 밝혀내기 어렵습니다. 당시 우상은 큰 것도 있지만 손에 쥘 정도의 작은 우상도 있었거든요. 드라빔은 가정의 수호신인데 휴대할 만큼 작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각 장애인이 피해를 입었을때도 가해자를 찾기란 어렵습니다. 피해당사자가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성범죄는 은밀하게 일어납니다. 살인도 그렇습니다. 대부분 은밀한 영역의 죄입니다.
이것은 비록 공동체가 함께 저주를 선포하고 아멘으로 화답했지만, 개인적인 맹세와 결단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기념비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에, 축제적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축복된 삶을 살겠습니다. 저주받는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라고 결단하고 맹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말씀을 잘 지켜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가나안땅에 들어갔습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처음 주어졌을 때,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잘 지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하는 삶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과 사람이, 사람과 사람이 조화롭게 사는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 법 을 잘 지키게 되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사람들과도 화평을 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게 되면 갈등과 대립의 관계가 되고, 폭력과 무질서나 난무해 집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그 법을 잘 지켜야만 구원을 받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법을 잘 지킬 때 하나님의 백성은 안전하고 또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면 하나님한테서 점점 멀어지다가 나중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며 또한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합니다. 이를 통해 성도의 인생을 복되게 하며 복있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비록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저주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 되지 쥐엄열매를 먹으며 배를 채우는 비참한 인생과도 같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나가도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참한 인생을 삽니다. 저주받은 인생을 삽니다. 그가 아버지 품에 돌아올 때만 비로소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우리는 구약의 율법 조상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성도들에게 일시적으로 주어진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가 뜻을 깨닫고 살아갈 때 우리에게 복이 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복과 멀어집니다.
희수가 용돈이 생겼는데 십일조 드리는 것을 아까워 합니다. 아내가 주일 저녁에 앉혀놓고 이렇게 가르칩니다. “네가 잘해서 용돈 생긴 것 아니야. 네가 태어나 아빠 엄마 만나고, 이렇게 동생들과 행복한 가정에서 살게 된 거. 다 네가 노력해서 된 거 아니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야. 그런데 하나님 앞에 십일조 드리는데 아까워. 하나님은 네 전부를 드리라고 해도 드여야 되. 그런데 고작 십일조도 못드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커서 네가 아무리 성공하고 부자가 되도, 네 인생 망한 것야.”
좋게 말할 수 있거든요. 그러나 중요한 가르침은 강하게 가르칩니다. 왜 그런가요? 망하지 말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 받은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주를 선포하게 하십니다. 저주 받지 말고 복 받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2가지 저주를 선포하게 하시고 아멘을 화답하여 맹세하게 하고 결단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복과 저주의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오늘과 앞으로 계속해서 나오는 신명기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과 저주는 무엇인가>
12절에 언급된 ‘축복’이라는 단어를 원문으로 보니까 ‘바라크’입니다. 이 ‘바라크’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곳을 보면,
창세기 1:22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동물을 창조하신 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아직 사람을 창조하기 전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땅의 모든 짐승을 창조하십니다. 그들에게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늘과 바다와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이 말하는 복은 살아 있는 생명체 –복은 생명체에게만 해당-그 생명을 마음껏 누리고 확장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서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사람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창세기 1:28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라크’ 복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체가 생육과 번성 땅에 충만이라는 생명의 누림 그리고 확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의 개념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시편 1편을 생각해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렇게 표현하죠.
시편 1:3
3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대지로부터 모든 좋은 수분과 영양소를 공급받습니다. 생명력이 충만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력의 확장을 말합니다. 이것이 복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레미야 17:5–8
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7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하나님께서 저주 받을 사람과 복 받을 사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주 받을 사람은 사막의 떨기나무 같다. 복 받을 사람은 물 가에 심어진 나무 같다. 저주는 생명력이 없는 결핍의 상태를 말하고 복은 생명력이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복은 생명력을 말합니다. 생명력이 충만하고 그것을 마음껏 누리고 확장해 나가는 것을 복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100세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복입니까? 저주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100세까지 건강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섬긴다면 복입니다. 분명한 복입니다.
그러나 100세 아니 그 이상을 살아도 병실에 호스를 끼고 누워 있다면 복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우리에게 주신 생명력을 충만히 누리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짧은 인생을 살아도 생명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복된 인생입니다.
돈이 많은 것은 복입니까 저주입니까?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일 때 복이지만 생명을 죽이는 일에 쓰이면 저주입니다.
건강하면 복입니까 저주입니까?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면 복입니다. 그러나 죄짓는 데 사용하면 저주입니다.
자녀가 많은 것이 복입니까 저주입니까?
분명한 복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것은 복입니다.
시편 127:4–5
4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 신분이 높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복이 아닙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고 확장시켜 나갈 때 복이 됩니다. 그런차원에서 전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가장 큰 복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전도했다면 엄청난 복을 받은 것입니다.
시편 73:28
28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하나님께 가까지 함이 복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누군가 돈을 많이 벌었거나. 좋은 집으로 이사 간 것 보고 ‘저분은 복을 많이 받았어’라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분이 얼마만큼 생명력 있는 삶을 사는 가를 보셔야 합니다. 돈 버는데 바빠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면,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복 받은 것이 아닙니다. 돈이 많을 뿐이지 복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주어진 물질에 감사하고 누리는 삶을 살 때 복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성경적 기준을 올바로 세우면 어떤 인생이 복된 인생인지, 어떤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인지 명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으로 오늘 말씀을 보시면 복과 저주가 무엇인지 이해될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저주의 선포는 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우상을 만들어 섬기면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면 복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복입니다. 하나님의 계심을 믿게 되고 그 분이 우리의 창조주이심을 믿으며 구원자이심을 믿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기면 저주받습니다. 오늘날 우상은 돈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래서 돈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주받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 자체가 저주입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아이들 어릴 때부터 명문대 입학을 위해 로드맵을 만들고 거기에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 쏟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입시를 준비합니다. 모든 관심이 거기에 꽂혀 있습니다. 자유롭게 꿈꾸어야 할 아이들이 책상에 박혀 미래에 이뤄질지 모르는 꿈을 위해 달려갑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해야 할 아이들이 학업에 짓눌려 살아야 갑니다. 충만한 활기와 감성으로 기뻐 뛰며 춤추며 찬양해야 할 아이들의 얼굴은 분노와 불만으로 차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열방을 향해 나가야 할 청년들은 주어진 현실 앞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복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헌신하고 섬기는 자들은 복을 받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그들이 누리는 행복은 돈을 주고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이 땅에 소외된 사람들, 신체적 약자, 경제적 약자들을 돕고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복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자기 만족과 유익을 위해 이웃을 속이는 자들은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한 삶을 사는 것 자체가 저주입니다.
신체적 장애인, 경제적 약자들을 무시하고 오히려 힘없는 자들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자들 저주를 받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저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적인 욕망을 결혼이라는 하나님의 법과 질서 안에서 이루어가는 사람들은 복을 받습니다. 부부 사이가 좋습니다. 부부 사이가 좋으니 자녀들도 밝게 자랍니다. 가정에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부관계 밖에서 성적 욕망을 채우는 자들은 저주받습니다.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싸움과 갈등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자녀들의 마음은 늘 불안할 것입니다. 그 마음은 어둠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저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발산에 말씀의 기념비를 세우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 축복과 저주를 선포했고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내 삶의 개인적인고 은밀한 삶의 영역에서도 거룩한 삶을 살겠습니다. 다짐했던 것입니다. 저주 받는 인생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복받는 인생 살겠다고 맹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복받는 인생은 우리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이러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외적 행위로는 범하지 않았어도 우리 마음으로 우상숭배와 간음과 온갖 더러운 죄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생은 저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저주가 사라집니다.
우리 행위 때문에 마땅이 받을 저주가 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10
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13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우리 인생에 저주는 사라지고 복이 임합니다. 그 복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이고 영원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복입니다. 그 복을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3–6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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