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89.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신명기 33:29–34:7
29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1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2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5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7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신명기 강해 마지막 시간입니다. 2022년 1월에 시작했으니 2년이 걸린 셈입니다. 여러분은 신명기를 통해 어떤 은혜를 받으셨나요? 저 개인적으로는 율법으로 시작한 말씀이 은혜로 마무리 되는 것을 보면서 다시금 은혜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허물이 많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구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가나안까지 인도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러분들도 동일한 은혜를 받으셨으니라 믿습니다.
신명기 33장은 모세의 축복기도입니다. 모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을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한 일이었습니다. 르우벤 지파를 시작으로 12지파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34장은 느보산에 올라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삶을 마무리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마무리됩니다. 33장까지는 모세가 기록했고, 34장은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가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모세가 12지파를 축복하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 내용은 이것입니다.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120년의 인생을 살았던 모세가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내린 결론은 그들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곳에 계신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이스라엘에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 한번 고백해 봅시다. “지형아!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행복한 사람일까요?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1.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3:29
29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이스라엘은 특별한 은혜를 받은 민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많고 많은 민족이 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사랑받을 만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신실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7:6–8
6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전적으로 기뻐하시고 사랑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선택하셨습니다. 자신의 백성으로, 자녀로, 신부로 선택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나온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사랑받을 만해서가 아닙니다. 나에게 어떤 조건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적인 그 분의 주권 가운데 나를 기뻐하시고 선택하셨습니다.
로마서 5:8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시점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알기도 전이었습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 향방 없이 살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29–30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이스라엘이고, 성도들입니다. 에베소서 1장의 표현으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그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부르십니다. 부르신 자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의롭게 하십니다,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미리 아셨습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아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미리 아셨습니다.
나를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는 내 삶에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건물 하나만 져도 세밀한 도면을 가지고 철저한 계획하에 건축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 계획이 없으실까요?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 삶은 내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인도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숙명론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로운 판단과 선택을 존중하십니다. 우리의 선택을 막지 않으십니다. 억지로 우리 인생을 끌어가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뜻 안에서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자유로운 판단과 선택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편에서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분명히 망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선함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8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심으로 우리 삶에 선을 이루시고,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조율하고 계십니다.
빌립보서 1:6
6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착한 일’은 원어로 ‘아가토스’인데 ‘선함’, ‘좋은’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 ‘good’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선한 일, 좋은 일, good work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실수와 죄까지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과거에 지은 부끄러운 실수와 죄까도 그분의 선함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제 인생에서도 지우고 싶은 과거의 부끄러웠던 잘못들이 있습니다. 딜레이트(지움 버튼) 키로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순간들을 허용하셨고 그 일을 통해 우리를 한 차원 높은 신앙의 사람들로 세워가고 계십니다.
다시 이 말씀을 볼까요?
로마서 8:29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미리 아신 자들을 어떻게 하신다고 합니까?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신 하신 다는 것입니다. 이를 이해 우리를 미리 정하셨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4:13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사는 존재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그곳으로 끌고 가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48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온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온전함의 모습이 무엇일까요? “그러므로”는 이 앞부분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내용인가 하면, 첫째,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지만, 너희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라는 것입니다. 또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주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막연한 원수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손해나 상해를 입힌 사람을 사랑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더 나아가 그를 위해 기도까지 하라니, 이것이 이 땅에서 가능하기나 한 것입니까?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말씀은 천국에서 그렇게 산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원수가 없습니다. 오른편 뺨을 치는 사람도,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우리가 이뤄야 할 윤리의 수준, 인격의 수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조차 자신을 조롱하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이뤄야 할 하나님의 온전함은 결국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정하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닮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밖에 몰랐던 이기적인 내가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대단한 변화입니다.
“여보, 그 성도님 요즘 어떠셔? 표정이 안 좋으셔서.”
“그 성도님 몸이 좀 안 좋으시다던데 좀 괜찮으신가?
이것은 여러분, 큰 변화입니다. 예수 믿고 변화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갑자기 새벽기도하고, 방언 기도하고, 성경만 읽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돌아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점점 사랑의 사람, 용서의 사람, 긍휼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변화가 처음에는 확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저래? 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빚어가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좀 연약한 분들이 계신다면 기다리고 인내하셔야 해요. 성도가 왜 저래? 집사가 왜 저래? 라고 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분 안에서도 일하고 계세요. 그분 안에서 착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8:30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화롭게 할 것이다“가 아닙니다. 이미 ”영화롭게 하셨다“입니다. 내 모습 보면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한데 영화롭다니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시점입니다.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우리 존재를 보실 때 이미 완성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이라고 할 때 그들은 이미 영화롭게 된 존재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주어진 역사를 살아감으로 그 자리로 인도하면 받지만, 하나님의 시점에서는 미리 정하신 자들은 영화롭게 된 것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이 그분의 지혜로 우리 인생을 반드시 영화롭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2.우리가 행복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3:29
29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행복한 이유가 하나님이 돕는 방패가 되고 영광의 칼이 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땅에 들어가기까지 또 들어가 땅을 차지할 때도 하나님은 그들의 방패가 되셔서 적들의 공격을 막아주셨고, 칼이 되셔서 승리케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돌보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과 늘 함께하셨습니다. 단 한 순간도 그들을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한번 위기가 있긴 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십계명을 받으로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은 산 아래에서 하나님을 신상으로 만들고 경배했던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분노하셔서 이스라엘을 떠나려고 하셨습니다. 이때 모세의 간절한 중보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돌이켰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후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잘못해도 징계는 하셨지만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언약을 깨지만 하나님은 결코 언약을 깨지 않으십니다. 언약에 자신을 묶으시고 끝까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동행한다는 증거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었습니다. 구름기둥이 진행하면 이스라엘이 따라갔고 구름기둥이 멈추면 그 자리에 멈추었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이 이스라엘 진영을 밝혔습니다.
우리 삶에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습니다.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우리 곁에,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인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 죄를 사해주시고 자녀 삼아주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신명기 2:7
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그의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시면서 그 이유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8:20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세상 끝날은 역사의 종말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역사는 끝이 나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약속이 성령님의 강림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성령님은 한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이사야 41:10
10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저는 모세의 죽음을 통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비록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지라도 행복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복이었다면 그는 실패한 인생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토록 사모했던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죽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이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에게도 가나안땅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마음에 간절히 소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들이 있지 않습니까?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자녀들이 밝고 건강하게 자라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안정된 직장에 취업하고, 신앙의 가정을 이뤄 신앙생활도 잘하고, 비록 소박하지만 각자 마음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떻습니까? 한해를 돌아보시면서 그러한 소망들이 이뤄졌습니까? 오히려 낙심된 순간들이 더 많지 않았습니까? 예상치 못했던 질병으로 낙심하기도 하고, 자녀들로 인해 눈물로 기도할 때가 많았고,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삶의 문제 속에서 힘들지 않으셨나요?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가나안을 바라만 볼 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실패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붙들었고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우리 곁에 계셨습니다. 우리와 늘 동행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행복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늦은 나이 신학을 공부하시고 40대 중반에 상가 지하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20년 동안 지하 교회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햇빛이 들어오는 교회로 이사했지만, 얼마 후 암으로 투병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만일 목회의 성공이 큰 교회를 이루는 것이라면 저희 아버지는 실패한 목회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성공적인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성도의 행복은 무엇을 이루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 삶의 목적이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들을 성취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좀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로 가야겠다. 사업에 대박을 내야겠다.’
이러한 동기로 열심히 살아가게 되면, 점점 허무하고 삶의 무의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들이 아무리 충족된들 우리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있는 빈공간은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창세기 5장은 아담의 계보를 적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 인류에게 임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낳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입니다.
창세기 5:4–8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5장 전체가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낳고 죽는 인생 가운데 독특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에녹입니다. 그의 인생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창세기 5:21–24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모두가 낳고 죽은 허무하고 무의미한 인생을 살았지만, 에녹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하나님께 그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죽었다고 표현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가셨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늘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이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이 손을 붙잡고 천국으로 데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데려가신다는 것입니다.
에녹보다 오래 산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낳고 죽은 것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고 말합니다. 모세의 인생도 동일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도 행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저희 외할머니는 97세입니다. 일본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었습니다. 두 자녀와 두 사위를 먼저 천국으로 보냈습니다. 힘겨운 인생을 사셨습니다. 외할머니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이 아니었다면 몇 번이고 무너졌을 것입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볼 때 할머니 인생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는 행복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한해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가올 새해도 동행하실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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