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7.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통치
신명기 2:26–37
26내가 그데못 광야에서 헤스본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평화의 말로 이르기를
27나를 네 땅으로 통과하게 하라 내가 큰길로만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라
28너는 돈을 받고 양식을 팔아 내가 먹게 하고 돈을 받고 물을 주어 내가 마시게 하라 나는 걸어서 지날 뿐인즉
29세일에 거주하는 에서 자손과 아르에 거주하는 모압 사람이 내게 행한 것 같이 하라 그리하면 내가 요단을 건너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르리라 하였으나
30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가 통과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31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이제 시혼과 그의 땅을 네게 넘기노니 너는 이제부터 그의 땅을 차지하여 기업으로 삼으라 하시더니
32시혼이 그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우리를 대적하여 야하스에서 싸울 때에
33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에게 넘기시매 우리가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모든 백성을 쳤고
34그 때에 우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그의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35다만 그 가축과 성읍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
36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모든 땅을 우리에게 넘겨주심으로 아르논 골짜기 가장자리에 있는 아로엘과 골짜기 가운데에 있는 성읍으로부터 길르앗까지 우리가 모든 높은 성읍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37오직 암몬 족속의 땅 얍복 강 가와 산지에 있는 성읍들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가기를 금하신 모든 곳은 네가 가까이 하지 못하였느니라
3주 만에 신명기 강해로 돌아왔습니다.
본문은 헤스본 왕 시혼과의 전쟁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왕의 대로를 통하여 북쪽으로 올라가려고 했습니다. 모세는 헤스본 왕에게 사신을 보내 에돔과 모압 지역을 통과할 때처럼 먼저 평화롭게 그 길을 사용하고자 요청합니다. 그러나 허락하지 않습니다.
잠시 지도를 보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 지도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명기 2:30
30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가 통과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첫 번째 살펴볼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시려고 헤스본 왕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같은 표현이 출애굽기에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입니다, 성경은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 라고 표현했다가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총16번 언급되고 있는데, 몇구절만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7:3
3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출애굽기 7:13
13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애굽기 9:12
12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출애굽기 9:34
34바로가 비와 우박과 우렛소리가 그친 것을 보고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하니 그와 그의 신하가 꼭 같더라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말합니다. 바로가 마음의 완강해진 것은 스스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죄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셨다고 하심으로 그의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합니다. 성경은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 명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명제를 조화시키려고 하는 시도가 있지만 그것은 어느 한편을 강조함으로 한편의 진리를 약화시키는 오류에 빠질 수 있어 주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하여, 바로가 완강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다 라고 하면 하나님은 바로의 죄를 조장하신 분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 바로의 완강함이 본인의 책임이다 라고만 하면 바로의 존재가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남으로 하나님은 전능성이 손상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두 개의 진리, 즉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함께 강조함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책임있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헤스본 왕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신 것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는 스스로 마음을 완강하게 한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완강하게 하심으로 전쟁하게 하셨고 결국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실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삶을 이 두 개의 명제로 다스리십니다.
그런 일들이 있지요.
왜 그때 그분의 마음이 완고해져서 나와 갈등을 일으켰을까? 그때는 상처도 받고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일이 아니었다면 이렇듯 좋은 결과가 있었을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17년 동안 아이를 주시지 않았을까? 이것은 저희 책임이기도 하지만 또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희수와 의성이를 만나게 하시고 결국 형원이까지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며칠 전 큰아이 때문에 정신건강학과 진료를 받으로 갔어요. 참 마음의 안 좋았습니다. 왜 큰애가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하고 늘 불안하고 짜증이 많을까? 희수의 책임도 있고 또 저의 책임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이해하지 못한 저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 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희수를 그렇게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희수의 삶을 붙잡고 계시거든요.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것이 우리 가정에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게 하실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앞두고 크게 싸웁니다. 마가를 데리고 가야 하는가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평소 바나바의 성격 같으면 그렇게 싸우지 않았을텐데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됨으로 오히려 두 개의 선교팀이 구성될 수 있었고 아시아의 복음 전파가 속도를 낼 수 있었습니다.
헤스본 왕의 마음이 완강해진 것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시혼과 땅을 기업으로 얻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지금 내 삶을 힘들게 하는 그 사람으로 인해 하나님은 우리 가정과 나를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지금 내가 눈물로 기도하는 그 일 때문에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을 때 우리는 현재 당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살펴볼 것은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신명기 2:34
34그 때에 우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그의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이 진멸에는 헤스본의 남녀와 유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명령을 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전쟁을 즐기시는 무자비한 분입니까? 신약의 하나님은 자비롭지만 구약은 하나님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까?
우리는 먼저 가나안 전쟁의 목적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언급된 적이 있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가나안은 우상숭배로 인해 윤리적 타락이 극에 달했습니다. 우상숭배는 무섭습니다. 가족을 해체하고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회는 윤리적 도덕적 타락이 심각합니다.
창세기 20장에 아브라함이 네게브 땅으로 이주했을 때 일입니다. 그는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의 아름다움을 보고 반해 사람을 보내 사라를 데려 옵니다. 그 밤에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네가 데러온 여인이 남편이 있다고 알려줍니다.
아비멜렉이 깜짝 놀라 아침 일찍 아브라함을 불러오게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이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창세기 20:11
11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아브라함은 네게브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쉽게 범죄합니다. 누군가의 아내를 취하기 위해 남편을 죽이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이 사건 전에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소돔성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던 곳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처음에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각자의 소유가 많아지면서 갈라지게 됩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기업으로 삼을 땅을 먼저 선택하게 합니다.
창세기 13:10
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이 선택한 곳이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자원의 풍성했기 때문입니다. 또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동산같다는 의미는 롯이 보기에 그만큼 좋았다는 것입니다. 애굽 땅과 같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문명화된 도시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골에서만 살던 사람이 서울의 화려함을 보며 감탄하는 것과 같습니다.
롯은 문명화된 도시, 애굽과 같은 도시, 소돔에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13:13
13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하나님은 결국 이 땅을 심판하시기전 그 땅의 얼마나 죄악되었는지 창세기 19장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두 천사가 롯의 집을 방문합니다. 이것을 소돔 사람들이 본 것입니다. 노소를 막론하고 수십명의 사람이 롯의 집을 에워쌉니다. 그리고는 문을 두드리며 네 집에 온 사람을 끌어내라고 합니다.
창세기 19:5
5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상관한다’는 것은 집단으로 성폭행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남성을 말입니다. 그러니까 롯이 어떻게 하는가 하면 자신의 두 딸이 있으니 데려가 맘대로 하라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불량배들의 눈을 멀게 하심으로 위기를 탈출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당시 소돔과 고모라의 윤리적 타락이 극에 달아 있었습니다.
동성애, 집단 성폭행 등이 쉽게 자행되는 사회였습니다. 그 땅의 죄악상은 이것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 사건을 언급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 사회가 얼마만큼 타락했는가를 극명하게 알 수 있는 지표가 바로 동성애와 성폭행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아브라함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네게브 지역으로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함으로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가 그만큼 두려운 것입니다. 그곳은 지옥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들어가고자 하는 가나안 땅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았습니다.
가나안 사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윤리적 타락은 극에 달았던 것입니다.
신명기 12:31
31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께서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들의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자기들의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들에게 드렸느니라
가나안의 신 중에 몰렉신이 있습니다. 놋쇠로 된 사람의 몸에 황소 머리 형상을 했고 두 팔을 앞으로 뻗고 있는 형상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불로 달구어진 몰렉 신상의 팔위에 어린 자녀를 올려 불태워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이러한 인신제사가 가나안에 팽배했습니다.
이러한 가나안의 패역한 문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 온갖 윤리적 타락이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가나안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선택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전쟁의 성격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 목적은 그 땅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자신의 백성을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죄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 나라 건설이었기 때문에 전쟁의 방식은 진멸이었습니다.
그것은 죄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입니다. 잡초를 뽑을 때 뿌리를 뽑지 않으면 다시 자랍니다.
죄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의 죄를 심판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죄의 뿌리까지 뽑아내심으로 그 땅을 정켤케 하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진멸을 명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냉혹하신가 비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죄가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냉혹함을 비판하기 전에 우리 죄의 참혹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진멸을 명하실 정도로 가나안의 죄가 심각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죄는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죄는 매우 심각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저는 우크라이나에 떨어지는 폭격의 장면을 보면서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이들을 포함한 민간인 사상자가 1천 명을 넘어서고 있음에도 러시아의 푸틴은 핵전쟁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가 그냥 가볍게 취급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죄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만큼 심각한 것입니다.
인간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심판입니다. 그것도 완전한 진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죄를 품을 수 없습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숨겨진 우리의 죄를 추격하여 들추시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감출 수 있는 죄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그만큼 철저하게 처리하십니다.
우리 시대는 점점 더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져가고 있습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 성처럼 말입니다. 동성애가 쉽게 용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간의 성을 인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2019년 낙태죄가 폐지되어 자기 몸에 주신 태아의 생명권보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여러분,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2015년에는 간통죄가 폐지되어 가정의 기초인 부부 관계보다 인간의 성적인 자기 결정권과 사생활 비밀과 자유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 땅에 부부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뉴질랜드에 살 때 인도에서 선교했던 선교사님과 교제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인도에는 지금도 실종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제가 인터넷 검색해보니까 2020년 KBS 글로벌 뉴스에서 다룬 내용입니다.
인도에는 연간 7만명의 어린이들이 실종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8분에 한 명꼴입니다. 신고되지 않는 사례도 많아 숫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대부분 납치와 매매입니다. 한 명당 37만 원에 팔려 가사도우미 성매매 등을 한다고 합니다.
인도가 어떤 나라입니까? 우상숭배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일수록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합니다. 여성과 아이들은 학대와 천대를 받습니다. 동성애와 성적타락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진멸하냐고 비난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는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심판주로 계십니다.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며 진멸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은 이 또한 피조물이 창조주의 권위에 대해 도전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보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진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었다면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두려워 할까요?
여러분 어떨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진멸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할까요? 늘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받아주신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간혹 뉴스를 보면,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당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터뷰하는 기자에게 욕을 하고 마이크를 걷어찹니다.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과연 자신의 범죄로 평범했던 한 가정이 불행해진 사실을 알까?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 것을 알까? 그 강팍한 마음이 과연 깨어지기나 할까? 생각하면 회의가 듭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심판석에서 형이 선고될 때는 깨닫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때가 아니라면 형이 집행되는 순간에는 깨닫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만큼 인간의 죄는 강팍합니다.
우리는 심판이 명해지고 그것이 실행되어져야만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는 강팍한 죄인들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전쟁을 일으킨 푸틴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러시아인의 68%가 전쟁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것은 지도자 한 개인의 죄가 아니라 집단적인 죄입니다. 죄가 집단성을 띠게 되면 합리화되고 나중에는 평범해 집니다. 아이들이 포탄에 죽어가는 모습을 보아도 무감각해집니다.
자신의 아이들을 몰렉신에게 던져넣으면서도 무감각한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러시아인들을 비난할 수 있습니까?
만일 내가 러시아사람이라면 어떨 것 같습니까?
나치가 유태인을 학살할 때 수 많은 독일인이 동조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태인 학살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평범한 아버지들이었고 남편들이었으며 직장인들이었습니다. 내가 거기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우리는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전쟁의 비참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인간 죄의 참혹함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인들 가운데 나 또한 제외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함은 죄에 대해 진멸을 명하십니다. 죄인인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뒤에 숨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진멸당하셨기 때문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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