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66. 여호와께 가능한 것임이니라
신명기 23:17–18
17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18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신명기 강해 66번째 시간입니다.
본문을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여자 창기나 남자 창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창기가 번 돈은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윤리적 차원에서 이해되어 집니다. 또한 당연한 명령처럼 보입니다. 굳이 이렇게 율법으로 담을 필요가 있을까 할 정도의 말씀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은 아닙니다.
먼저 본문이 내용을 원문대로 해석하면 다름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딸(밧트) 중에 신전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아들(벤) 중에 신전 창기가 있지 못할지니”
이스라엘 여자라고 표현하는 것과 이스라엘 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스라엘 남자라고 표현하는 것과 이스라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다릅니다.
남자, 여자로 표현할 때는 일반적인 성별을 의미하지만, 아들, 딸이라는 표현은 인격인 관계, 친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이 앞에 붙으면 하나님의 선택받은 아들, 하나님의 선택받은 딸이라는 의미가 더해집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기에 너희의 아들과 딸들은 이러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희수가 “아빠 우리 반 아이들은 다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는데 왜 나만 안 돼?”라고 합니다. 그때 저는 “희수야,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안 돼.”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딸, 아들이라고 할 때 세상 사람과는 다른, 구별된 삶을 사는 자녀들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세상 사람들은 다 이러한 삶을 살고 이것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이지만 너희는 다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도망친 종을 예로 들어 봅시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 도망친 종은 붙잡혀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고 사형을 면치 못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일반적이었고 보편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형제로 대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갈지라도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 근동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방식과 전혀 다른 삶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창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어떠한 삶을 방식을 전제하고 있고 모두가 그렇게 살아갈지라도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의 말씀은 사회의 계급구조와 연관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종교의식과 연관됩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17절에 ‘창기’라는 단어는 ‘가데스’는 ‘신전창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남창이라는 단어도 똑같은 ‘가데스’ 신전창기를 의미합니다. 그냥 창기가 아니라 신전 창기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고대 근동에서는 신전에 창기가 있었을까요. 신전창기의 기원부터 알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에서 신을 믿는 것은 자연스러웠습니다. 오늘날 무신론자가 많지만, 고대 사람들에게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너무나 당연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이 어떤 분인가 할 때는 저마다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렇겠죠. 신은 우리 존재를 초월한 분이신데 초월한 존재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신을 설명하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고안해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고대의 신화가 대부분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사람이 만든 신들은 대부분 자연을 다스리는 신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연은 사람 마음대로 다스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우상이 바알과 아스다롯입니다. 모두 자연을 주관하는 신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신을 만들어 놓고 신을 조정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길 원했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신을 모실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전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신을 조정하려면 형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 앞에서 소원을 아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을 형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신을 신전에 모셔놓고 형상으로 만들면 언제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요청하여 얻어낼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사람이 신을 만들었기 때문에 신들은 인간 수준을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경험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만든 신들로 인간의 인식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자연을 주관하는 신들도 인간의 경험적 이해로 한정하여 인식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기우제입니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비가 내리는 것을 신이 땀을 흘리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신들끼리 성교하게 하면 그 결과로 비가 온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전에서 난잡한 성행위를 하면 신들이 흥분하여 성교하게 되고 그 결과 비가 올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신전에 창기가 두었습니다. 여자 창기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남자 창기도 있었습니다.
기원전 2400년, 수메르 우르크(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존재하던 도기국가)에는 사제들이 매춘 업소를 운영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에도 신전매춘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합법적인 매춘업소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성의 생식능력이 신이 준 선물로서 주술적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신전매춘은 단지 쾌락을 목적으로 한 행위가 아니라, 신을 기쁘게 하는 신성한 행위로 여긴 것입니다.
오늘날 사창가와는 다릅니다. 자신들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신전 창기들과 성행위를 하고 그 댓가로 돈을 지불합니다. 그 돈으로 신전을 관리했고 또한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거룩한 종교의식으로 행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표현된 ‘창기’라는 의미의 ‘가데스’는 ‘거룩한 것’, ‘바쳐인 물건’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창기들은 신께 바쳐진 거룩한 존재들로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신전창기를 포르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의복을 바르게 입었고, 언행이 고상했기 때문에 저잣거리의 매춘 여성과는 급이 달랐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당시 신전을 찾아 창기들과 성교하고 돈을 지불했던 것은 신성한 종교적 의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거룩한 의식이라고 여겼고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고대근동의 이러한 신관과 종교의식을 이해할 때 오늘 본문의 내용이 이해되어 집니다.
자 그러면 다시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신명기 23:17–18
17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18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18절의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이 나오는데, 개 같은 자는 남창을 말합니다. 그들의 소득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신을 흥분시키기 위해 사람들과 몸을 섞고 받은 돈입니다. 이것을 바친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드린 것입니다. 신성한 의식을 치루고 바친 돈입니다.
“어떤 서원하는 일로 네 하나님 전에 가져가지 말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시 신전 창기들이 받은 돈은 신성한 성적 의식 후에 자신의 소원을 담아 바친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단지 쾌락을 위해 창기와 몸을 섞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또한 불법적인고 더러운 돈을 하나님께 바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당시 가증한 종교의 형식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증하다는 것은 혐오스럽다는 의미인데 다른 성경에서 이 표현이 등장할 때는 사형에 해당할 정도의 죄악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했을까요?
열왕기하 23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하는데, 이런 장면이 등장합니다.
열왕기하 23:6–7 (NKRV)
6또 여호와의 성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다 거기에서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그 가루를 평민의 묘지에 뿌리고
7또 여호와의 성전 가운데 남창의 집을 헐었으니 그 곳은 여인이 아세라를 위하여 휘장을 짜는 처소였더라
여호와의 성전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아세라 상, 즉 풍요와 다산의 신이 있었고, 남창의 집이 있었습니다.
고대 근동의 우상 숭배의 문화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들어왔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날도 여전히 기독교 신앙 안에 우상 숭배의 문화가 들어올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증히 여기십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기독교 안에 들어온 우상숭배의 문화 두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성전 중심의 신앙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전에 가두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형상으로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을 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어디나 계시면 두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언제든 찾아가 볼 수 있고, 또 그 앞에 소원을 올릴 수 있어야만 마음의 편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신전이 있고 신상이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가증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에서 자신을 형상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조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십니다. 감히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을 신전에 가두고 형상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성전이 처음 세워진 것은 솔로몬 때입니다. 그는 성전을 봉헌하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열왕기상 8:27
27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신전을 중요시합니다.
신전과 신상이 있는 모든 종교는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는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신도 사람이 만들고 신상도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들은 인간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신에 대한 지식, 교리들은 다 이해됩니다. 사람이 만들었으니 당연히 이해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신에 대한 지식과 교리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께서 알려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가 어떻게 이해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이다 라는 교리가 어떻게 이해되겠습니까?
우리는 믿고 받아들일 뿐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만든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해시키기 위해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고, 그 역사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게 하셨고, 다양한 문학의 장르에 담아 이렇게 성경으로 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부분은 여전히 신비롭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초월적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전에 모시고 신상으로 만들고, 보고, 만지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조정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왜 우리 교회는 그 흔한 십자가 하나 없을까요? 우리의 연약한 믿음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십자가 형상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백한 사도신경의 첫 번째 교리가 무엇입니까?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를 신전에 가두고, 형상으로 만들어 그 앞에 소원을 비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성전 중심의 신앙이 위험한 것은 성전과 세상을 구분하고 성전에서 이뤄지는 일들을 거룩하고 세상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은 세속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일들은 거룩한 방식으로 하고 세속의 일들은 세상의 방식으로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방식을 세상의 삶에 적용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와서는 기도도 하고 헌금도 드리고 봉사도 하지만, 세상속에서는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에 전혀 갈등도 없습니다. 두 개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가증히 여기십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돈 바꾸는 자들과 짐승을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내신 일입니다. 이것을 성전청결 사건이라고 하는데 사실 성전의 기능을 중단시킨 것입니다.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종교 시스템을 중단시킨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속죄 의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짐승은 흠없는 것을 드려야 하는데 가져오는 동안 상처가 나고 흠이 생기면 하나님께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 돈을 받고 짐승을 파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원래는 성전 바깥에 있었는데 이것이 성전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 돈을 받고 짐승을 팔게 되면 상당한 돈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또한 성전 안에는 헌금함이 있었는데 이곳에 드려지는 돈은 황제의 형상이 그려진 로마 화폐는 안되었습니다. 따라서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이 있었습니다. 환전상들은 폭리를 취하였고 여기서 얻는 수익 일부가 당시 권력자들에게 상납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종교 시스템을 중단시킨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성전을 나올 때 제자중 하나가 이렇게 말합니다.
마가복음 13:1–2 (새번역)
1예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2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30년 후에 로마의 티투스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됩니다.
‘통곡의 벽’이라고 하는 곳만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때문에 성전모독죄로 고소당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신성히 여기는 이 성전을 중심으로 한 모든 것들은 이제 끝났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인데 살아계신 하나님은 건물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다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삼일 만에 세우겠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갈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성전 건물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모든 신앙행위를 가증히 여기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신앙 행위가 외식 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의 형식과 종교적 행위들은 열심인데 반해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7:6 (NKRV)
6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모든 일은 거룩한 것이고 생각한다면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의 삶 속에 함께 하십니다. 주일에 예배하는 곳에 임하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직장에도 임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임하실 뿐만 아니라 밥을 차리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곳에도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기에 언제 어디서든 예배할 수 있습니다. 어디서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그곳이 거룩한 기도의 처소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일상의 삶에서 예배하는 자들이 주일에 예배당에 모여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1:11–13 (NKRV)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 경건한 형식과 내용을 담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여도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다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지 않습니다. 수 만명이 대형 경기장에 모여 찬양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수십억의 물질을 바친다고 해도, 그들이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기쁘게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하십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그의 일상의 삶이 예배하는 삶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51:16–17
16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설 때 우리를 받으십니다. 그때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때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성전 중심의 신앙을 가증히 여기시는 것은 삶이 없는 형식의 예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배의 형식이 어떻든 우리가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으로 주 앞에서 설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2)사제 중심의 신앙을 가증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창기의 소득을 하나님의 전에 가져오는 것을 가증히 여기신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전 창기의 소득을 말합니다. 그들이 왜 돈을 받은 것입니까? 신전을 찾은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서원을 신게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에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원”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네덜”인데 “맹세” 또는 “서원”으로 번역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떨대 맹세나 서원을 합니까?
전에 이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부목사로 사역할 때, 건축업을 하시는 여성 CEO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심방을 요청하여 사무실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기도제목을 말씀하시는데 올해 하나님께서 100억의 수익을 내게 해 주시면, 아시아에 100개의 교회를 세우겠다는고 하셨습니다. 이 분이 말한 것이 무엇입니까? 맹세, 서원입니다. 즉 서원은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하는 약속입니다. 옆에 계신 전도사님께서 40일 새벽기도를 해보라 하셨고 40일이 되는 날 아침, 만나자 하셔서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여전히 사업에 어려움이 있다면서 우울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까 불교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때 이분이 헌금을 드렸는데 그 헌금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서원을 이뤄달라고 하나님께 드린 물질입니다. 이것을 제가 대신 전달받아 교회에 드렸습니다.
그분은 서원과 함께 물질을 드렸고, 그것은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한 물질이었습니다.
고대의 신전에서의 매춘은 신성한 의무와 봉사로 여겼습니다. 창기들은 사제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서원을 받아 신께 전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가증하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해 사제를 매개로 삼는 신앙의 방식이 가증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들이 목사를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의 중간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잇는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런데 사제 중심의 잘못된 신앙 형태가 기독교 안에도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목사에게 헌금을 내고 소원성취를 기원합니다. 지나칠 정도로 목사를 의지하고 의존합니다. 세상에 완벽한 목사는 없습니다. 그들도 사람이고 성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외에 우리가 의지하고 의존해야 할 분은 없습니다.
저는 목사가 타락했다고 자신의 신앙이 흔들리고 무너진 분들을 봅니다.
안타깝습니다.
내 신앙은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그 사이에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주의 일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부족하지만 저는 여러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일이 힘들거나 사람이 힘들거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 신앙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무엇이 여러분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빼앗을 수 있습니까?
그 무엇이 그리스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빼앗을 수 있습니까?
로마서 8:35–39 (NKRV)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신앙의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삶에 아무리 큰 상처와 아픔이 있고, 여전히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사방에서 공격해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은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깁니다.
사제 중심의 신앙이 잘못된 것은, 목회자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기대하고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사도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그 어떤 탁월한 영적 리더라고 할지라도 흔들리고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붙들고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 부인하고 저주했던 베드로를 찾아 오십니다.
그와 함께 갈리리 호수에서 아침식사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생선을 굽고 또 빵도 구워 제자들과 함께 먹었습니다. 식사가 마치자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가 이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렇게 세 번을 물으십니다.
그리고 “나의 양을 치라”고 사명을 주십니다.
이후 베드로는 순교하기까지 사명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흔들리는 순간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여러분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 신앙이 있을 때 흔들리지 않습니다. 무너지지 않습니다.
성전중심의 신앙, 사제중심의 신앙을 버리시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만을 붙드시고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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