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3-03-21 09:49

54. 주님을 따르는 삶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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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강해 54. 주님을 따르는 길

 

신명기 19:14–21 

14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 

15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16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고 말하면 

17그 논쟁하는 쌍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당시의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18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19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20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21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위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법은 십계명의 8계명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과 10번째 계명인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와 연관되고, 위증하지 말라는 것은 9계명의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과 연관됩니다. 

차례대로 살피면서 이 말씀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

경계표는 땅의 경계를 정하기 위해 특정한 장소에 세우는 돌과 같은 일종의 표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땅을 정복한 후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민수기 34장에는 하나님께서 땅 분배를 어떻게 명하셨는지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땅에서 이스라엘이 살 수 있는 땅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동서남북의 경계를 명확하게 지정하십니다. 

땅을 나눌 사람을 지명하시는데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입니다. 

땅을 분배받을 각 지파의 대표를 지명하십니다.

이들은 제비를 뽑게 되는데 이것의 곧 그들의 땅이 됩니다. 

 

요단 동편에서 이미 두지파 반이 땅을 분배받았기 때문에, 요단 서편에서는 아홉지파 반이 분배받게 됩니다. 요단 동편의 땅을 탐지한 후 10개의 지역을 나누고 지파의 대표들이 나와 제비를 뽑게 된 것입니다. 이때 땅의 경계에 큰 돌로 경계표를 해 놓았습니다. 

이렇게 먼저 지파별로 땅을 분배했습니다. 

 

이후 각 지파는 자신들이 할당받은 땅에서 세대수에 따라 구역을 측량하고 분배했을 것입니다. 분배방식은 같았습니다. 세대주들이 모여 제비뽑기를 통해 땅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할당받은 땅이 자신들의 기업이 됩니다. 

이렇게 한번 정해진 땅은 매매할 수 없고 대대로 자기 가문의 땅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분배받은 기업의 땅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이런 명령을 하셨을까요?  

이런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땅은 비옥하여 농사나 가축을 키우기 쉬웠습니다. 과수를 심어도 해가 잘 들어와 많은 열매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땅은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돌이 많아 흙갈이하기도 어렵고, 비가 오면 물이 빠지지 않아 농사를 짓기고 어려운 땅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땅을 소유하게 되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이웃의 비옥한 땅이 탐나지 않겠습니까? 

 

내 이웃은 별로 애쓰고 노력하지 않는데 추수 때만 되면 풍성한 곡식을 거둡니다. 풍성한 과실을 수확합니다. 소나 양들이 좋은 풀을 먹어 영양상태가 좋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수확이 좋지 않습니다. 가축들의 영양상태는 형편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 이웃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러니 이웃의 땅이 너무 탐나는 것입니다. 저 땅을 한 200평만 끌어오면 좋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몰래 경계석을 옮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명령을 하지 않으셨다면 아마도 빈번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금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1)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만족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웃의 땅을 탐내지 말라는 것은 내게 주신 땅에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땅이 비옥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 만족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현재 누리는 것들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노력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 전체가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어리석음은 자신과 이웃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불행이 시작됩니다. 

 

전에 한번 말씀드린 예화입니다. 처음 집을 장만한 신혼부부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아껴가며 돈을 모아 집을 장만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의 집에 놀러 갔습니다. 깨끗하고 넓은 신축아파트였습니다. 무엇보다 부러운 것은 화장실이었습니다. 자신의 집 화장실은 바깥에 있는데 친구 집 화장실은 안에 있어 너무나 안락했습니다. 부러웠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그렇게 좋아했던 집이 초라해 보입니다. 꿈이 생겼습니다. “그래, 나도 화장실이 집 안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 가야지.” 또다시 먹을 것 입을 것 아껴가며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바라던 화장실이 집 안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러던 중 또 친구가 이사했다면 초대받아 갑니다. 자기 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평수의 아파트였습니다. 무엇보다 부러운 것은 화장실이 두 개였다는 것입니다. 자기 집은 아침마다 화장실 때문에 아이들과 전쟁을 치르는데 친구 집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집에 돌아오니 그렇게 좋아했던 집이 초라해 보입니다. 남편은 무능해 보입니다. 또 다시 먹지 않고 입지 않고 돈을 모아 화장실 두 개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갑니다. 그러던 중에 과로로 인해 몸은 망가졌고 화장실 두 개가 있는 집이 아니라 병실에서 생활하다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극단적인 이야기 같지만 우리 주변에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어진 것에 만족함이 없습니다. 감사함이 없습니다. 늘 주변을 바라보며 부러워합니다. 

내 삶을 초라하게 여깁니다.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입니다. 

 

아내와 결혼을 앞두고 차가 생겼습니다. 매형께서 폐차하려는 차를 저희가 가져가 쓰기로 한 것입니다. 기아에서 나온 베스타였습니다. 차를 받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아내와 함께 셀프세차장에 갔습니다. 아내는 고무장갑을 끼고 신나게 세차했습니다. 우리 생에 갖게 된 첫 차이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물론 폐차 직전이니 상태는 좋지 않았습니다. 이곳저곳 구겨지고, 녹슬었습니다. 그래도 저희는 기뻤습니다. 그렇게 신나게 세차하고 있는데, 저희 옆에 노란색 스포츠카가 섰습니다. 차에서 내린 청년이 세차 도구를 꺼내 세차를 시작합니다. 조수석에는 여자친구가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습니다. 세차하던 청년은 제 아내가 거품을 뒤집어쓰고 신나게 세차하는 모습을 보더니, 자기 여자친구에게로 갑니다. 차창 사이로 뭐라고 얘기하는 것 같은데 싸우더라고요. 아마 너도 나와서 좀 도우라 했겠죠. 여자친구는 싫었을 것이고요. 

그 청년들, 아무리 고급 스포츠카를 탔지만, 저희가 누리는 만족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행복한 성도입니다. 

남들과 비교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지금 사는 집에 만족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내 곁에 있는 배우자에 대해 만족하고 계십니까?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남편(아내)과 결혼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내 자녀들의 지금의 모습에 만족하십니까? 

여러분은 현재 내가 하고 일에 만족하십니까?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내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평이 많습니다. 불행하죠. 그러나 작은 것에도 감격하고 감사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은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삶에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불평하지 마세요. 감사하시고 만족해하세요.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경계표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16:6

6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평생 이런 고백하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디모데전서 6:6–8

6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성도들의 가장 기본적인 마음 상태는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서 감사가 나오고 기쁨이 나오고 찬양이 나오는 것입니다. 

 

2)다른 사람의 소유, 권리, 명예를 침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인의 소유를 침해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그것이 꼭 물질만은 아닙니다. 건강이 될 수도 있고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의 명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함부로 침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모함하는 경우입니다. 선거철이 되면 상대 진영에 대한 모함들이 난무합니다. 일단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분명한 증거와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러저러한 거짓말들을 꾸며내 퍼뜨립니다. 공적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평생을 노력하여 일구어 놓은 명예와 자리를 한순간에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아니면 말고” 식의 모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한 것도 경계표를 옮기는 것에 해당합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로 이웃의 경계표를 옮길 수 있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밖에도 학문적 업적, 문학, 예술에 관한 창작물을 모방 또는 도용하는 것도 경계석을 옮기는 행위입니다. 불법으로 영화나 음악 컴퓨터 프로그램을 내려받는 것 또한 경계석을 옮기는 것입니다. 

내 소유가 소중하듯이 상대방의 소유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2.증인과 위증에 대하여

신명기 19:15 

15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어떤 일의 사실 여부를 판단할 때 반드시 증인이 있어야 하며, 최소한의 두세 사람의 증거가 있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증인들이 거짓말을 하면 그 죄는 반드시 처벌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심판의 방식도 언급하고 있는데요, 

신명기 19:18–19 

18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19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이렇게 하는 목적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9:20

20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위증죄에 대하여 심판함으로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위증으로 인한 피해자가 없도록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 이웃이 내가 200평의 경계석을 옮겼다고 거짓 고소한 것입니다. 저는 그런 적이 없는데 무고하게 고소를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증인까지 세웠습니다. 원래 자신의 땅인데 제가 경계석을 몰래 옮겼다고 거짓 증인을 세운 것입니다. 

재판이 열리고 재판정에서는 모든 사실 여부를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제 이웃이 거짓말 한 것이 들통나고 증인들도 거짓말을 한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면 거짓 고소를 한 사람 뿐만 아니라 위증한 사람들까지도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 처벌은 그들이 뺏으려고 했고 200평을 저에게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짓 고소한 사람 뿐만 아니라 증인들까지도 말입니다. 

 

만일 그것이 가축일 경우이면 가축으로 배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망사건일 경우는 어떨까요? 

거짓으로 밝혀지면 고소한 사람뿐만 아니라 증인들까지도 사형당하게 됩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거짓 증언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셨습니다. 

 

그에 대한 처벌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신명기 19:21 

21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이 법을 잔인한 법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고소로 인한 분쟁과 다툼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상대가 나의 눈을 상해했다면, 그 처벌로 상대의 눈 한 개를 상해하여 이 분쟁을 끝내라는 것입니다. 상태가 나의 이빨을 하나 부러뜨렸다면 상대의 이빨 하나를 부러뜨려 분쟁을 끝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악한 본성은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거든요. 상대가 눈 하나를 상해하면 죽도록 패고 싶은 것이 우리 본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식으로 분쟁을 끝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어떤 사실 여부를 판단하면서 증인의 중요성과 거짓 증언의 심각성 그리고 처벌방식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9번째 계명과 연관됩니다. 단순히 거짓말이 아니라 거짓 증언 즉 재판 과정에서 이뤄지는 거짓말을 다루고 있습니다. 

재판이라는 것은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참과 거짓을 다투는 자리입니다. 

성경에서 재판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공의를 세우는 자리였습니다. 따라서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무척 중요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도 고소와 고발 사건이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재판이 있었고, 이때 잘못한 자에게 처벌이 가해지고 있음을 봅니다. 이것을 무엇을 말합니까? 

이 땅의 어떠한 신앙공동체라 할지라도 분쟁과 갈등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서로가 이해하고 합의가 도출되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고 결국 재판으로 가게 되는 경우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가 법정 다툼을 하는 것을 봅니다. 참으로 안타깝지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교회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사실인지를 분명하게 밝히라는 것입니다. 만일 거짓으로 판명되면 처벌받게 됩니다. 이때는 긍휼이 베풀어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본문에서 제기한 문제는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경우입니다. 

신명기 19:18–19 

18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19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우리는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어떠한 일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여부가 드러날 때까지는 모든 판단을 유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쉽게 판단하여 그 모함에 동참하게 되면 그 처벌을 함께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제를 모함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처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죄를 심각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아니면 말고”가 아닙니다. 그 일로 인하여 당하는 상대방의 상처와 이를 둘러싼 공동체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강하게 처벌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신명기 19:20

20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여기까지가 구약교회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방식입니다. 

 

3.억울한 고소에 해한 성도의 자세(교회내 소송에 대하여) 

그런데 신약으로 넘어오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5:25 

25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이 고발 고소 사건으로 재판정에 가는 것을 좋지 않게 보셨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불행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속히 합의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성도들이 고발 고소 사건으로 세상 법정에서 판단 받는 것에 대하여 강하게 책망합니다. 

고린도전서 6:6

6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신약교회의 관점은 교회의 분쟁과 갈등의 상황이 심각할지라도 세상 법정으로는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세상을 심판하는 자리에 있는데 오히려 교회가 세상의 심판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6:1–2 

1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세상 법정으로 갈 바에야 차라리 손해를 보라고 하십니다.

비록 억울할지라도 손해를 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6–8 

6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과 엮인 고발 고소 사건이 아닙니다. 한때 함께 사랑하고 섬겼던 교회 안에 형제, 자매들과 연관된 고소 사건입니다. 

세상 법정으로 갈 바에야 차라리 불의를 당하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속임을 당하라는 것입니다. 

쉽지 않죠. 정작 이러한 일에 생기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38–40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너희가 정당하게 누릴 수 있는 권리까지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 모함을 받아내야 합니다. 내가 마땅히 취할 수 있는 권리와 이익을 포기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쉽지 않은 길에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손해보는 삶에 뛰어든 사람들입니다.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길에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이 길을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이 길을 걸어갈 때 주님과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주님이 얻으신 그 영광에도 동참하게 됩니다. 

우리의 억울함은 하나님의 갚아 주십니다. 내가 포기한 것들은 하나님의 몇 배로 갚아 주십니다. 이 말씀에 아멘 할 수 있는 우리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신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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