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60. 너는 반드시 그 형제를 도우라
신명기 22:1–4
1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2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 줄지니
3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4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
신명기 강해 60번째 시간입니다.
신명기서를 살펴보면서 저 개인적으로는 도움이 되는 중에 하나가 기독교 윤리에 대해 공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과실치사, 이혼, 가정의 질서, 사형제도와 같은 민감한 문제들을 신명기를 통해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도 최근 대두되고 있는 사회문제와 연관됩니다.
작년 핼러윈 축제할 때 있었던 이태원 참사를 기억할 것입니다. 토요일 저녁 설교를 마무리하던 중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영상을 접하고 그날 잠을 설쳤습니다. 제가 충격을 받은 것은 참사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현장에서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반응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옆에서 사람이 죽어감에도 불구하고 술집 2층 3층에서 술을 마시며 영상으로 담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춤을 추고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청년은 처절하게 외치면서 심폐 소생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지만, 나서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지 않는 것은 과연 죄가 될까요?
2016년 두 명의 승객을 태운 택시 기사가 차를 몰고 가다 심장마비로 증세로 쓰려졌습니다. 그런데 뒷자리 승객은 119에 신고조차 안 하고 운전석에 꽂혀 있던 열쇠를 꺼내서 트렁크 문을 열고 짐을 꺼낸 다음 다른 택시를 타고 떠나버렸습니다. 택시 기사는 다른 시민의 신고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안타깝게도 숨지고 말았습니다.
만일 빨리 손을 썼더라면 생명을 살릴 수도 있었습니다.
과연 두 명의 승객은 죄가 없을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구조하지 않은 사람을 처벌해야 할까요? 아니면 처벌할 수 없을까요? 이것은 사형제도와 함께 법률적 토론이 벌어지는 선한 사마리아 법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납니다. 제사장, 레위인은 이 다친 사람을 보고 지나가게 되지만 유대인에게 멸시당하며 사는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구제해주지 않습니까? 이 비유에서 따온 개념입니다.
유럽 대다수의 국가들과 미국의 대다수의 주 그리고 일본 등에서 이 법은 시행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구조불이행을 하게 되면 최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75,000유로의 벌금형을 받게 됩니다.
이를 찬성하는 근거는 인간으로서 공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한다면 인간적 도리를 저버리는 반인륜적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도덕적인 죄를 범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양심을 외면하는 도덕적인 죄도 범죄라고 보는 것입니다.
반면 반대의 근거는 인간으로서 판단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 보장받을 수 있는 도덕적 문제까지 법으로 강제 적용해서 개인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람을 도와주는 데 있어서 법적인 제약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입니까?
성경은 이미 오래전에 이러한 법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대상은 신앙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에게 직접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섬기는 사람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비록 우리 사회가 선한 사마리아 법을 통해 우리의 양심과 도덕을 통제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법은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인의 윤리적인 삶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이웃의 어려움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여기를 예를 든 상황은 이렇습니다.
1)형제의 소나 양이 길을 잃은 것을 보았을 때,
2)형제가 의복이나 어떤 것을 잃어버렸을 때,
3)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서 넘어진 것을 보았을 때입니다.
이것은 예를 든 것이지 꼭 이러한 경우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닙니다. 이것에 따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 말씀을 원리 원칙으로 삼아 적용해야 합니다.
이 말씀의 취지는 네 형제가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이 처한 어려움을 너희가 알고 있고 도울 수 있는 상황이라면 반드시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았다면 그것을 붙잡아 이웃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만일 누구의 소유인지 알지 못하면 집에 끌고 가서 두었다가 소유주가 나타나면 돌려주어야 합니다.
신명기 22:1–2
1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2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 줄지니
짐승뿐만이 아닙니다. 형제의 잃어버린 물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발견했다면 네 소유로 하지 말고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보관하다가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22:3 (NKRV)
3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짐승이나 물건뿐만 아니라, 이웃이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도 도와야 합니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어 넘어져 있을 때 함께 도와 일으켜야 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람들의 양심과 도덕에 맡기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굳이 신명기에 기록하여 성문화시킬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지 않습니까? 꼭 이런 것을 법으로 강제할 필요가 있을까요? 더군다나 이 경우는 선한 사마리아 법처럼, 생명이 위급할 만큼의 상황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짐승이나 물건을 잃어버린 경우 아닙니까? 선한 사마리아 비유처럼,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경우가 아닙니다. 어찌 보면 사소한 경우인데 이것을 법으로 명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1.양심에 따른 도덕적 선택을 법으로 정하신 이유는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양심과 도덕은 이미 타락하여 부패했기에 법으로 강제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소한 차원을 법으로 규정함으로 위중한 상황은 당연히 도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영혼과 몸의 모든 기능이 전적으로 더러워졌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을 싫어하고 악에 이끌리는 종이 되었습니다. 모든 악으로 완전히 그리고 계속해서 기울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양심이나 도덕이라는 것도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간혹, 왜 교회만 가면 사람을 죄인이라고 하나요? 범죄를 저지른 적도 없는데 죄인으로 취급하는 게 불쾌하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 중에는 사람의 본성을 선하다고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이들이 백지상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좋은 환경과 교육을 받게 한다면 선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철학자 니체나 쇼펜하우어는 사람을 죄인으로 간주하는 기독교 교리가 사람들을 신의 노예로 만든다고 봅니다. 즉 기독교가 사람의 의식과 감정, 자유와 행동을 죄의 범주에 넣어 사람들을 죄책감을 가진 노예로 길들인다고 비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인류 역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발생한 전쟁범죄는 인간 본성 안에 있는 사악함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았습니까?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와 세르비아 인종청소 같은 전쟁범죄는 우리가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그의 책<리바이어던>에서 사람은 자연상태 즉 국가나 정부도 없고 법과 제도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연적 평등은 도처에서 폭력과 전쟁을 일으킨다고 말합니다. 만인이 만인에게 대항하는 투쟁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약자들의 삶은 비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개인적 자유와 양심에 맡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웃의 어려움을 돕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과연 사람의 양심과 도덕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 지나간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인 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배의 직무와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지나간 것입니까? 몇 가지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 직분을 감당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각지에 흩어져 있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중앙성전인 예루살렘에 올라와 제자직무를 감당했습니다. 주로 여리고에 주거지를 정해 놓고 출퇴근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50m 됩니다. 여리고에서 27킬로 하루거리입니다. 이 길은 매우 험했고 귀중품을 들고 지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도적이 자주 출몰했습니다. 누군가 강도를 만났다면 그 근처에 강도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행여 그를 도왔다가 자신도 강도에게 습격당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종교적 이유입니다. 이들은 제사 직무를 감당해야 하므로 불결한 것을 만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강도 만난 자는 온몸에 피투성이가 되어 거의 죽을 지경에 있었습니다. 그를 만지면 부정하게 되어 제사 직무에 차질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나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할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자를 지나쳤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어떤 이유에서든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율법학자에게 말했습니다. 율법학자는 구약율법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영생에 관한 질문입니다. 율법학자는 당연히 구약의 율법을 잘 지키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율법을 잘 지켰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답을 피하시고 되묻습니다. “율법에 무어라고 기록되었느냐”
그는 율법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여기서 대화가 끝나야 옳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도전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무슨 말입니까? 나는 하나님을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데, 내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주면 그도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피해 갑니다. 그들이 율법을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죠.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웃의 고통을 외면했습니다. 이것을 무엇을 말합니까? 아무리 율법을 알고 철저히 지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일지라도, 정작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고통당하는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그것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입니다. 즉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을 사랑한 자가 아니며 그들은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영생을 얻었을까요? 이 비유는 선행을 통해 영생을 얻는다는 것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율법준수와 제사행위를 철저히 감당했던 제사장과 레위인일지라도 본성적으로 타락했기에 영생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이웃의 고통을 외면했고 이는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임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율법을 잘 알고 지킨다고 하지만 너 또한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알고 그것을 가르치고 예배의 직무를 감당한다고 해도 본성적인 타락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뢰하는 그 어떤 영적 지도자들도 본성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녀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까? 그러면 그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아무리 자녀라고 해도 우리 사랑은 이기적일 때가 많습니다. 온전히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카페 옆자리에 엄마와 딸이 대화합니다.
엄마가 딸에게 “하나 더 낳아, 하나는 외롭잖아.
딸이 말합니다. “엄마 애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들 줄 알아? 이 애 빨리 키우고 내 인생 살 거야.“
그 말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은 엄마 인생이 아니구나!
아이 키우는 것은 해야 할 도리이고, 자신이 원하는 인생은 따로 있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 하나님 경외하고 섬기는 자녀들로 키우는 일이 우리 일이에요.
우리는요, 이기적이예요.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베푸는 사랑도 자기만족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 우리가 누군가의 어려움을 돌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법과 규정으로 양심과 도덕에 기준을 정해주지 않으면 이기적 행동은 통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기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있으므로 이웃이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도울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돕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갖기도 하고, 자책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차츰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웃의 어려움을 돕는 문화가 형성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너희가 비록 이기적 존재이고 자기중심적이지만, 이웃의 어려움을 돕는 신앙의 공동체로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움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웃이 잃어버린 가축을 보았거나, 잃어버린 물건을 주었거나, 넘어진 짐승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부터 말입니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부터 이웃을 향한 도움의 마음이 있다면 이보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결코 외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2.하나님은 이웃을 향한 도움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당한 이웃의 어려움을 돕지 않음으로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님을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1서 4:20 (NKRV)
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에서 종말에 일어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마지막 심판 때가 되었습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십니다. 그때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구분합니다. 양은 오른쪽에, 염소는 왼편으로 나뉩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오른쪽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34–36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성경은 이들을 의인들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마태복음 25:37–39 (NKRV)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왕이신 주님께서 대답합니다.
마태복음 25:40 (NKRV)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어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41–43 (NKRV)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묻습니다.
마태복음 25:44 (NKRV)
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왕되신 주님이 대답합니다.
마태복음 25:45–46 (NKRV)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여러분, 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40 (NKRV)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 곁에 있는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을 말합니다. 먼저는 가족 공동체이고요, 확장되어 교회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을 돌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아플 때 밤잠을 설치며 돌보는 것이 주님을 향한 희생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 외롭지 않게 자주 찾아가는 것,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남편 또는 아내가 힘들 때 따듯하게 손잡아 주는 것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 중에 누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물질로 도와주는 것,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함께 마음을 나누고 기도해 주는 것,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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