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28. 신분과 성품
신명기 7:1–11
1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3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4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5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6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9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0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11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먼저,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의 사명에 대해 나옵니다.
그것은 가나안의 죄악을 진멸하고 그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명은 이미 오래전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5:13–16 (NKRV)
13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이스라엘의 사명, 가나안 진멸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에 이미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가나안땅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선택하신 곳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을 지목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왜 아메리카 땅이 아니고 아시아 땅이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도 하나님의 주권이었고 가나안땅을 지목하신 것도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부터 자신의 나라를 시작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운 후, 그를 통해 한 민족을 구성하십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의 사명은 가나안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때에 고작해야 작은 지파에 불과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강력한 죄악의 문화를 진멸하고 그곳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 들어가게 하신 후 그곳에서 400년 동안 지내게 하시며 강성한 민족으로 키우십니다. 애굽에 들어갈 때 70명이었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출애굽 때에는 6백만명으로 그 수를 늘리십니다.
애굽에서의 400년은 이스라엘이 강성해지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가나안 족속의 죄악을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심판하실 때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회개하여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을 주십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죄를 범하여 그 임계점에 닿으면 하나님은 여지없이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4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아모리족속은 가나안 7족속을 대표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보시며 참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가 점점 흉악하고 난폭해져 임계점에 다달았을 때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도구가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어 가나안의 일곱족속을 진멸하는 것과 그 곳에 하나님의 법이 다스리는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멸전쟁의 목적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나안을 진멸해야 합니다. 진멸이라는 것은 완전히 다 죽이는 것입니다.
신명기 7:2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진멸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렘”입니다. 이 단어는 진멸이라는 의미로도 쓰이지만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즉 “헤렘”전쟁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죄악을 진멸하는 일이 헤렘, 즉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긍휼하데 어떻게 가나안의 모든 사람을 진멸하게 하시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반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구약의 하나님을 잔인한 하나님으로 보고 구약을 믿지 않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헤렘전쟁은 가나안의 죄악을 심판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영토전쟁도 아니고, 자원약탈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더럽고 추한 가나안 죄악을 심판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심판에 있어서는 그 어떤 예외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암치료를 생각해 보십시오. 의사의 목적은 암세포를 진멸하는 것입니다. 암부위를 도려낼 수 있으면 절개수술을 진행합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항암치료를 합니다. 약물을 투여하여 암세포를 죽입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지요. 혹시라도 모를 암세포까지 죽이기 위해 방사선치료까지 합니다.
이렇게 해서 암을 진멸합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해야 그나마 암세포가 죽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렇게 하지 않고 조그만 암세포 하나라도 살아있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그것이 삽시간에 온몸에 퍼져 인간을 고통스럽게 할 것입니다.
죄는 암과 같은 것입니다. 진멸시키지 않으면 살아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멸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 만큼 우리 죄는 강하고 끈질깁니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이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한 사람을 살려준 사건이 나옵니다.
사사기 1:23–26
23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24정탐꾼들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 하매
25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리킨지라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내매
26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것의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 곳의 이름이 되니라
요셉 가문,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가나안의 벧엘지역을 정복할 때였습니다. 잠복하고 있을 때 그 성에서 나오는 한 사람을 붙잡습니다. 그를 비밀통로를 알게 되고 그 대가로 그 사람과 가족을 살려줍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헷 지방으로 가서 성읍을 건축하는데 그 곳의 이름이 루스입니다. 루스는 그가 살았던 벧엘의 원래 이름입니다. 즉 가나안의 죄악된 문화를 다시 건축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여리고의 기행 라합은 파견한 두 정탐꾼을 자기 집에 유숙케 여리고 왕이 사람을 보내어 수색할 때 보호합니다. 그녀는 비록 기생이었고 가나안 사람이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님을 알고 그분을 섬기려 했을 때 그와 그의 가족이 생존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무조건 진멸하는 잔인한 분이 아니라, 죄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을 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긍휼하셔서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자들을 언제든 받아주셨던 것입니다.
사사기 1장의 기록에 보면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을 진멸하지 않았다고 보고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노동력으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결과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오히려 가나안 문화에 흡수되어 이방인들과 같이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진멸하라 하신 것입니다.
2.우리가 진멸해야 할 가나안
그렇다면 우리가 진멸해야 할 가나안은 무엇입니까?
레위기 18:3 (NKRV)
3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여기보면, 가나안 뿐만 아니라 애굽의 풍속을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과 가나안의 풍속이 한 뿌리라는 것입니다. 레위기에서는 이 말씀을 하면서 성적인 죄악을 언급합니다. 이것을 보면 애굽과 가나안의 풍속은 인간의 왜곡된 욕망과 연관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2–3 (NKRV)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는 이 세상의 풍조를 육체의 욕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욕심이라는 것은 죄악된 인간의 욕망을 말합니다. 이렇게 죄악된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것이 바로 세상풍조이며 가나안문화입니다. 이것을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악된 욕망이 만들어낸 문화들을 진멸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 자신에게 있으며, 우리 가족 가운데 있고, 또한 직장문화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 욕망이 종교심으로 향하면 우상숭배가 됩니다. 하나님 조차도 내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가나안의 모든 우상들이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만든 신들입니다.
신명기 7:5 (NKRV)
5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이러한 것들을 너희의 삶에서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내 욕망이 만들어낸 것들이 있다면 버리고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김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내 욕망입니다. 우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욕망이 투사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9–12 (NKRV)
9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1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결국 내 욕심과의 싸움입니다. 부하려 하는 마음, 돈을 사랑하는 마음, 이것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계속 하라는 것입니다.
3. 진멸전쟁을 통해 성품을 빚어가심
가나안 진멸전쟁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 백성답게 만들기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신분의 변화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분이 변화되었다고 우리의 성품도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죄악의 성품은 성화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1:4 (NKRV)
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성품을 닮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품을 만드시는 과정을 성화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성화의 과정은 두 개의 방향에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 안에 죄악을 죽이는 것입니다.
암에 걸린 사람이 치료되려면 생활 습관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음식도 가려서 먹고 적절히 운동도 해야 합니다. 그것만 해서는 안 되지요. 약도 먹고, 항암치료도 받아야 합니다. 두 가지 방향에서 치료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한편은 몸을 좋게 하는 것과 또 한편에서는 암을 죽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죄악된 생활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내 안에 죄를 죽이는 일을 병행해야 합니다.
신분을 변화시키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의 일이라면, 성품을 만드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십시오.
신명기 7:2 (NKRV)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하나님의 일과 우리의 사명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힘이 센 일곱 족속을 넘겨 주시는 일은 누구의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넘겨받은 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하는 일은 누구의 일입니까? 이스라엘의 일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은혜로 행하신 일들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은 나에게 맡겨진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상 앞에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그것을 내가 떠먹어야 내 것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홍해길을 여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셨지만, 그 길을 지나가는 것은 이스라엘의 몫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사명, 하나님의 거룩함과 선함을 추구하면서 내 속에 죄악을 죽이는 일은 나에게 부여된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내 능력 이상의 어려움과 싸우게 하시면서 우리의 성품을 만들어 가십니다.
신명기 7:1 (NKRV)
1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이라고 말합니다. 그들과 싸우라는 것입니다.
보통 싸움은 힘이 센 쪽에서 약한쪽에 걸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전쟁은 그 반대입니다. 힘이 약한 쪽에서 힘이 센 쪽과 붙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을 거저 주시지 않고 꼭 전쟁이라는 방식을 통해 얻게 하시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할 필요가 있었고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체험할 무대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다 이뤄주시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기회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보다 많고 힘이 센 민족들을 상대하면서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야만 그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되고 또 바르게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보시면, 이스라엘의 싸움은 쉬운 싸움이 아닙니다. 자신보다 많고 강한 민족과의 싸움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보십시오. 상대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싸움을 싸우게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 전쟁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전쟁을 알지 못하는 다음세대에게 가나안 민족을 남겨두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사기 3:1–2 (NKRV)
1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들에게 가나안 민족들을 남겨두심으로 끊임없는 전쟁을 치루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가나안땅에 거하면서 계속되는 전쟁을 치루며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셨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으며, 마침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되도록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받게 빚어가신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삶에 어려움들을 겪게 하십니까?
왜 삶에 여러 가지 시험들이 있는 것입니까?
구원받고 천국으로 바로 데려가지지 않고, 주어진 삶을 살게 하시면서, 왜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겪게 하실까요?
그것은 우리를 그분의 자녀답게 만들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성품과 실력을 갖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힘과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들을 감당하면서 성장합니다.
내 실력보다 어려운 문제와 씨름하면서 실력이 자랍니다.
그래서 삶의 어려움들은 항상 더 크고 무겁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삶의 어려움을 겪으신 분들이 겸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만드신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당한 어려움들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빚어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기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능력으로는 내 실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어렵고 힘들지만 절망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승리하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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