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22. 십계명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삶의 방식
신명기 5:7–21
7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8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9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10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11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
12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16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17살인하지 말지니라
18간음하지 말지니라
19도둑질 하지 말지니라
20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21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십계명을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9계명과 열 번째 계명을 남겨두고 십계명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삶의 방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저는 십계명을 공부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대해 새롭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전에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관심이 많았지만 십계명을 통해 잘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가진 가치관에 따라 살아갑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가치판단을 하고 그 판단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며 살아갑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주일 아침에 집에서 쉬는 것보다 예배당에 나와 예배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하여 이곳에 오셨습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우리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라고 말했습니다.” B는 Birth 태어남과 D는 Death 죽음입니다. C는 Choice입니다. 우리 인생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크고 작은 선택들의 연속이고 그 결과가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 선택을 결정하는 것이 내가 가진 가치관입니다. 우리는 선택의 순간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선택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것 중의 하나가,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녀도 가치관이 변화되지 않으면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신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삶의 모습은 세상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목사로서 이런 분들을 보면 참 많이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 나라로 옮기셨는데 여전히 세상적 가치과 삶의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기쁨과 안식이 있는데 그것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보다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애굽의 상징적인 건축물이 무엇입니까? 피라미드입니다. 피라미드는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피라미드는 계급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그 속에서 이웃을 착취하는 것이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입니다.
승자독식의 사회,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사회가 애굽입니다.
사람을 직급과 계급으로 나누고 차별하는 사회가 애굽입니다.
생명의 가치보다 물질의 가치가 더 중요시되는 사회가 애굽입니다. 낙태권을 주장하며 여성의 삶의 위해 뱃속 아기를 죽일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싸우는 미국인들을 보십시오. 애굽 사람들입니다.
노예처럼 일해야 하는 사회가 애굽입니다. 안식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가정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건강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족들과 따듯한 밥한끼 먹지 못하고 노예처럼 일하다 생산력을 잃게 되면 버리는 것이 애굽입니다.
애쓰고 노력하여 얻은 소유를 힘과 권력을 동원하여 빼앗아가는 사회가 애굽입니다
이러한 애굽사회는 모든 것이 계급화, 서열화됩니다. 학력, 외모, 출신지, 직업, 연봉, 인종에 따라 계급을 나누고 차별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애굽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고 공평과 정의의 사회. 기쁨과 안식의 나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노예처럼 일했던 그들이 처음으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너희 존재는 기계처럼 일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 안에서 안식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통해 우리 삶에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가 아니라 생명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을 통해, 가정의 중요성을 알려주시고 가정에서 누리는 축복과 행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을 통해, 그동안은 애굽왕을 위해 일했지만 이제는 너희가 땀흘려 일한 것에 대한 소득은 너희의 것으로 하라는 사유재산을 허락받은 것입니다. 이를 통해 가정을 세우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삶의 기반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들을 5계명부터 8계명입니다. 시간이 없기에 단지 4개만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것, 즉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대해 깨닫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안식, 생명, 가정, 사유재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통해 이러한 것에 가치와 중요성을 알게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가치의 중요성이 눈을 뜨고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게 여긴다면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한번 지나면 되돌아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이 삶의 기회 속에서 잘사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결국 내 삶이 얼마만큼 행복하고 만족했는가가 아닐까요? 그것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후회하지 않는 삶이 아닐까요?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는 것들 말입니다. 그때 그 길로 가지 말아야 했는데 하는 일들 말입니다.
한국사회는 애굽사회와 같습니다. 너무나 똑 같습니다.
아무리 소유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높이 올라가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회가 피라미드 사회입니다. 우리 사회가 그렇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 중인, 상인, 천민의 구조였다면, 오늘날의 계층은 다양하고 복잡해 졌습니다. 출신 대학에 따라 계층이 나뉩니다. 같은 대학 안에도 계층이 존재합니다. 학과에 따라 계층이 나뉩니다. 출신 지방에 따라 계층이 나뉩니다. 서울과 지방의 차별이 존재합니다. 서울 안에서도 강남이냐 강북이냐를 따집니다. 강남 안에서도 무슨 동네에 사느냐에 따라 계층이 나뉩니다. 같은 동네에서도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또 나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행보하지 못합니다. 어디를 가도 나보다 상위계층의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위축되고 열등감을 느낍니다.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가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 꼭대기에 올랐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역대 대통령들의 모습이 어떴습니까?
그 꼭대기에 올랐던 대기업 총수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 꼭대기에 올랐던 연예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이 과연 행복해 보이던가요? 어떤 이는 자살을 하고, 어떤 이는 감옥에 들어가고....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의 삶을 동경하며 그 길로 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그 길로 가니까 옳은 길인 줄알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갑니다.
카페에 엄마들이 모여 하는 이야기 대부분이 그런 이야입니다. 아파트 이야기 아니면 대학진학입니다. 우리 자녀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로 자랄 수 있을까? 이웃을 사랑하고 약자들을 배려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피라미드 꼭대기로 올릴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이러한 애굽의 삶의 방식으로는 절대 행복하지 않습니다. 어느 자리에 올라가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러한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가나안은 안식의 땅입니다. 샬롬의 땅, 평화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애굽에 있지 않습니다. 가나안땅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광야에서 받았습니다. 광야에서 받았다는 것은 비록 가나안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광야에서부터 이 삶을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광야같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삶의 방식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이제는 애굽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고 삶의 방식으로 살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 삶에 샬롬, 즉 평안이 임합니다.
시편 84:10 (NKRV)
10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 시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애굽과 같은 세상 속에서 천날 즉 오래 사는 것 보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하나님의 임재안에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리 악인의 삶의 방식으로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만족이 없고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살아가는 삶은 비록 단 하루라 할지라도 만족과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17 (NKRV)
17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 나라는 의롭습니다. 평강이 있고 희락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누리길 원하십니다. 그 시작은 바로 십계명에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세월호 사건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픈 사건입니다. 귀한 자녀를 꽃다운 나이에 보낸 부모들에게는 잊지 못할 아픈 상처일 것입니다.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아픔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 속에서도 누군가는 이런 위로를 받지 않을까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자녀와 함께 했던 순간들은 정말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자녀들과 아름다운 추억이 많은 분은 그나마 위로를 받을 것 같아요.
그러나 가장 힘들 것 같은 부모는, 자녀들과 추억이 없는 분들일 것입니다.
그게 뭐라고,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그랬을까?
우리는 진정 가치있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이라면 과연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삶에 왜 가치관이 중요합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기회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진정한 가치에 투자할 때 의미 있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무엇을 해라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껏 살펴본 것처럼 이 계명 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 때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인지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애굽의 삶의 가치와 방식으로 살고 있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최근 새벽예배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도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무었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삶의 가치와 방식을 거부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광야에 있을 때에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그들은 작은 어려움만 닥쳐도 모세를 원망합니다.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고기를 먹지 못한다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즉시 채워주셨습니다. 물이 없다고 원망하자 물을 주셨고, 고기가 없다고 원망하자 메추라기를 내려 주십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원망합니다. 저는 처음에 이스라엘의 원망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상을 보면서 그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에 들어갑니다. 약속의 땅 안식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를 세우길 원하셨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며 하나님의 법을 삶의 근간으로 삼고 살아가는 법치주의 삶의 시작된 것입니다. 법치주의와 평등은 오늘날 민주사회가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 아닙니까? 이미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그 사회를 만들기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안정되었을 때, 그들은 왕을 요구합니다. 왕을 요구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고 이방의 나라처럼 되길 원했다는 것입니다. 즉 애굽의 삶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8:10–19 (NKRV)
10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
11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12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13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14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15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16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17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18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19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사무엘은 왕을 원하는 것은 너희가 계급사회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애굽사회의 시스템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심한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상 8:7
7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애굽의 삶을 동경했습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법치주의, 평등 세상이 싫은 것입니다.
미국의 공공정책 전문가 헤더 맥기는 그의 강연에서 '수영장 물빼기 정치‘라는 개념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공공 수영장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1930-1950년대에는 미국 동네마다 공공 수영장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백인 공동체의 구심체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공공 수영장에서도 인종차별 규제가 철폐되기 시작했습니다. 흑백통합 정책으로 수영장이 모두에게 개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수영장을 이용하는 대신 흑인이 수영하는 수영장에 염산을 붓거나 수영장의 물을 빼고 시멘트를 채우기로 결정합니다.
’수영장 물빼기 정치‘는 수영장을 공유하기 싫어서 수영장 물을 빼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즉 사람들은 다른 무리의 사람들에게 혜택이 가는 것이 싫어 차라리 자신도 혜택을 받지 않는 쪽을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코 평등을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남보다 우월한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부유세 즉 부자들의 세금을 더 걷어서 사회 취약층을 돕자는 정책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평등이 가중되고 사회적 약자의 고통이 가중되더라도 또한 이것 때문에 자신들이 피해를 보게 되더라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고자 하는 나라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나라입니다. 능력 있는 자는 능력 없는 자를 섬기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섬기고, 건강한 자는 장애인을 섬기는 나라입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으로 부족함이 없게 하셨습니다. 승자독식, 약육강식, 적자생존과는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삶을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비록 안식의 땅에 들어갔지만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행여 우리가 그런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셨지만 안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가정을 통해 주시는 축복이 있지만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에게 주신 재산을 통해 삶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주셨는데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전번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아파트 하나만 포기해도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 형편에 은행대출하고 영혼까지 끌어 모아서 아파트를 사고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현재 제가 누리는 것들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파트 하나 있어야 삶의 기반이 마련된다는 생각은 세상의 삶의 가치와 방식입니다.
제 삶의 기반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위에 제 삶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요동치는 세상과 함께 다 흔들리고 무너지지 않습니까? 그런 것에 여러분의 미래와 꿈을 걸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온전히 사셨습니다. 비록 성경의 기록은 많지 않지만 예수님의 삶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마태복음 6:33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적 약자들과만 어울린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부자들, 권력자들과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를 만나든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적 계급, 종교적 계급시스템에서 자유하셨습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유한 삶을 사셨습니다.
좋은 집도, 변변한 직업도 없으셨지만 부요한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은 늘 기뻐하셨고, 평안하셨습니다. 그 기쁨과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를 기쁨과 평안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27
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은 근심하지 않으셨고 두려움도 없으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앞에 두고도 평안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가 평안이었습니다.
우리를 가장 두렵게 하고 근심하게 하는 것은 죽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초월하셨습니다. 그것은 죽음 뒤에 부활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를 주길 원하십니다.
죽음까지도 초월할 수 있는 믿음. 극한의 두려움 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는 믿음. 주길 원하십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통장에 쌓아두어도 삶의 근심과 두려움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상황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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