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23. 거짓 증거하지 말라
신명기 5:20
20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십계명의 9번째 계명입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9계명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부분으로 살펴볼 텐데요. 첫번째는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부분이고 두 번째는 거짓증거에 대한 것입니다
십계명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1~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좀 더 명확하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넘지 말아야 할 선입니다. 5~10계명까지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입니다. 먼저 가정에서부터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심으로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은 부모공경으로부터 시작됨을 말씀하셨습니다. 6계명부터 이웃과의 관계로 확장됩니다.
이렇듯 십계명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 나와 가족의 관계, 그리고 나와 이웃의 관계라는 틀 속에서 주어졌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성을 바탕으로 이해해야 십계명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해라,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서 이해하기보다, 하나님과 내가 어떻게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가? 또한 내가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친밀감을 누리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누릴 것인가?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9계명에 접근해야 합니다. 단지 내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 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만으로 받아들이면 사실 잘 와닿지 않습니다. 9계명은 ‘거짓말’이기 보다 ‘거짓증거’를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증거는 법정에서 위증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법정에 서는 일이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법정에 섰다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가 이미 곪을 대로 곪아 법을 통해 최종적인 판단을 하게 되는 순간을 말합니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계속해서 갈등하게 되었고 합의는 실패하고 결국 법의 판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웃과의 최악의 상황인 것입니다.
9계명은 이러한 최악의 순간까지 가더라도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최악의 순간이 아닙니다. 이러한 순간은 우리 삶에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선은 최선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어서 거짓증거가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이웃과의 관계가 온전해 집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었던 관계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이웃과의 관계회복으로 이어집니다. 그동안 이웃은 경쟁과 착취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 이후에는 사랑과 섬김의 대상이 됩니다. 자기의 유익만을 추구했던 삶에서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의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기적었던 내가 이타적이 되고, 이기려고만 했던 내가 지는 법을 배웁니다. 이웃이 잘되는 것을 보며 기뻐하며 또 격려해주는 넉넉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구원이 우리에게 주는 실제적인 삶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이웃과 샬롬을 이루게 하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샬롬을 누리고 이웃과 샬롬을 누리는 성도들의 삶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리는 행복의 대부분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삶을 돌이켜 보면, 삶의 행복한 순간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족이 있었고 친구가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족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들을 통해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학창시절의 친구와 선후배들, 직장의 동료와 상사와 후배들, 교회 공동체의 성도들.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웃들, 그들과 누렸던 소소한 기쁨들이 우리 삶을 복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나게 한 우리의 이웃들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자산입니다.
하나님은 만남을 통해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만남의 축복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배우자와의 만남을 주관하시고 이를 통해 가정을 축복하시는 것처럼, 이웃과의 만남을 주관하시고 그 만남을 통해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목사의 축복은 신실한 성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성도의 축복 또한 신실한 목회자와 성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쁨은 단지 예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도들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기쁨을 누립니다. 지난 2년 동안 코로나로 인해 대면 모임이 중단되면서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귀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어려움이나 가정의 어려움이 있어도 성도들과 함께 모여 교제하고 기도하면서 극복해 나갔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주었고 또한 누군가는 나에게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성도 중 그 누구도 독불장군처럼 홀로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할 수는 있겠지만 관계를 통해 주시는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그들이 믿음의 사람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없이 소중합니다. 그런 분들과 친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사람, 감사의 사람, 섬김의 사람. 이보다 소중한 분들이 없습니다.
서울대 행복연구 센터장 최인철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3대 영양소가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이듯이 행복을 위한 3대 요소는 자유, 유능, 관계라고 말합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행복을 연구한 결과를 언급하면서 ‘3단계 영향규칙’을 소개하는데요, 내가 행복한 것이 주변 사람에게 얼마만큼 영향을 끼치는가에 관한 연구입니다.
1단계는 친구이고요, 2단계는 내 친구의 친구입니다. 3단계는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입니다.
내가 행복할 때 내 친구가 행복할 확률은 15% 증가합니다.
내가 행복할 때 내 친구의 친구가 행복해질 확률은 10% 증가합니다.
내가 행복할 때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행복해질 확률은 6% 증가합니다.
결국 행복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사람과의 관계이고 그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행복하길 원하세요. 그 행복은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부터 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먼저는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복된 인생을 살기 시작하면 내 이웃이 그 복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가 등장합니다. 성경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누가복음 19:2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당시 세리들은 유대인들에게 부당하게 세금을 징수하고 로마에 상납하면서 자신들도 한몫씩 챙겼습니다. 세리장이었으니 매우 부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들로부터 소외되어 불행했습니다. 그가 예수를 찾은 것은 이러한 불행한 삶에서 혹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그를 보시고 내려오라 하셨고 오늘 네 집에 유머물러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날 삭개오의 집에서 그의 친구들-대부분 세리들이었을 것입니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죄인의 집에 갔다고 수군거렸지만,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파티가 어느정도 무르익었을 때 삭개오가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사람들을 조용히 시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19:8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그는 소유의 노예로 살던 삶에서 벗어나 이웃과의 샬롬을 이룬 것입니다. 비로서 그에게 구원의 삶 행복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9:9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렇듯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샬롬, 이웃과의 샬롬을 의미합니다. 그동안은 착취의 대상이었던 이웃이 나눔과 섬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때 그는 비로소 구원의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소유에 집착하며 살아가던 그가 복된 삶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삶의 행복은 이웃과의 샬롬을 통해 이뤄집니다.
2. 이웃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이며, 신뢰는 정직함에서 비롯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신뢰는 한순간에 생기질 않습니다. 그 사람과 오랫동안 교제하며 진실하고 정직하다고 판단되면 신뢰가 형성됩니다. 이러한 신뢰를 토대도 만남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신뢰 관계는 모든 사회활동의 기초가 됩니다.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를 신뢰하고 아내가 남편을 신뢰할 때 그 가정은 평안하고 축복을 누립니다.
직장에서 고용주가 직원을 신뢰하고 직원이 고용주를 신뢰할 때 그 직장은 생동감이 있고 성과도 좋습니다.
공동체의 리더와 회원 간에 신뢰가 있으면 기쁨이 있고 웃음이 있으며 평안함이 있습니다.
이러한 신뢰가 굳건할수록 어떠한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급작스러운 어려움이 닥쳐도 신뢰를 바탕으로 모인 사람들은 흔들림 없이 극복해 나갑니다.
신뢰는 한순간에 생기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지속해서 진실하고 정직할 때 생깁니다. 또한 내가 진실하고 정직할 때 상대방이 나를 신뢰합니다. 이러한 신뢰는 사람과의 관계를 단단하게 묶는 접착제와 같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도 신뢰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확실한 진리를 굳건하게 신뢰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확실한 진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굳건하게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를들어, 믿음의 사람하면 아브라함이 떠오릅니다. 그는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그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 때 두 가지 약속을 받습니다. 가나안땅을 주겠다는 것과 너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땅과 씨에 대해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을 때 자신의 아내를 누리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아내라고 하면 자신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 것이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아내 사라는 이것 때문에 바로의 궁으로 끌려들어 가고 아브라함은 그 대가로 큰 재물을 얻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간섭으로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창세기20장에는 그랄 땅에 들어갔을 때도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유는 같습니다. 그랄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왕궁으로 데려갑니다. 이때도 하나님이 개입하여 위기를 벗어나게 하십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던 아브라함은 20장까지 오는 동안 거짓말하는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너를 통해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겠다는 약속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갈이라는 첩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지 않습니까? 그가 믿음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를 변화시킨 사건이 있습니다. 창세기 21장에 가면 노년의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통해 드디어 이삭을 낳게 됩니다. 그는 그 순간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한 분이신가를 확실하게 믿게 됩니다. 그래서 22장에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시험에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한순간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거짓말하는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거짓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신실하게 성취하셨습니다. 단 한 순간도 그를 실망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삶의 경험이 반복되면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쌓이게 되었고, 마침내 아들을 낳게 되면서 굳건한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도 순종할 만큼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신뢰라는 것은 오랫동안 상대를 경험하면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 상대가 신실할 때 자연스럽게 신뢰하게 되고 그 신뢰의 관계가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합니다. 그런데 신뢰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브라함처럼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정직했습니다. 항상 신실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일으킨 것입니다.
3. 거짓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심각한 죄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거짓말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니까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 얄팍한 지혜와 계산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고 어려움을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정직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22–25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거짓은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구습이라고 합니다. 거짓은 애굽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심령이 새롭게 되었다면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9
9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좀 더 엄격한 말씀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8
8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거짓말하는 자들이 살인자, 음행, 우상숭배자와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심각한 죄입니다.
요한계시록 21:27
27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요한계시록 22:15
15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거짓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자들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여전히 애굽의 삶의 방식인 거짓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정직할 수 있습니다.
저희 가정은 7년 전부터 LH제공한 전세 임대로 살고 있습니다. 처음 살았던 집은 교회가 개척된 덕명동 집입니다. 이곳에서 2년을 살고 학하동으로 이사하였습니다. 당시 전망이 좋았기에 건축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건물주의 허락으로 먼저 이사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이사를 하게 되면 LH에서 직원이 나와 이사할 집의 여러 가지 조건들을 점검하고 계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후 들어가 살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집에 마음에 들어 계약전에 건물주과 합의하고 먼저 이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몇일 후면 LH직원이 나와 계약을 해야 하는데 집이 등기가 안된 것입니다. 건물주는 곧 된다고 약속만 해놓고는 돈이 들어가니 다른 사람에게 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건물은 팔리지 않고 등기는 되지 않은 상태로 미리 이사부터 한 것입니다. 건물주는 일단 자기가 살고 있는 집으로 계약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리고 등기가 완료되면 그때 다시 계약을 하라는 것입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박수를 쳤습니다. “아 그래 그러면 되겠구나”하고 안심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저녁을 먹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왜냐하면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내일 LH에 가서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하여 정직하게 말하겠다고 말입니다.
이것으로 임대 혜택에서 제외되더라고 정면돌파를 택한 것입니다.
다음날 아내와 희수를 데리고 둔산동 본사를 찾아갔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담당 직원에게 이런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하필 그때 희수가 똥을 쌌고 아내는 기저귀를 가느라 분주해졌고 냄새는 사방으로 퍼지고 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안타까웠던지 직원은 이전 집의 계약기간을 2개월 연장해 줄 터이니, 그 전에 등기 완료하고 그때 다시 계약을 체결하자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걱정했던 것이 한순간에 해결된 것입니다.
아내와 희수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구나. 내가 정직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구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비록 손해를 보더라고 정직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정직함이라는 무대에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거짓으로 어떤 것을 하려고 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제 삶에 이러한 경험들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나의 믿음을 달아 보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과연 정직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한국 사회는 거짓에 대해 관대합니다. 그러나 선진국들을 보면 거짓에 대해서는 관용이 없습니다.
2017년 기준으로
한국의 위증 사건이 1,930건, 일본은 8건으로 240배입니다.
무고죄는 한국이 3,690건, 일본 37건으로 100배입니다.
사기죄는 한국이 231,489건, 일본이 42,571건으로 5배입니다.
하지만 이를 인구 숫자를 비례해 본다면,
위증 건수는 일본의 585배, 무조 건수는 일본의 244배, 사기 건수는 일본의 12배 수준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타락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사기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닙니까?
거짓이 만연한 사회, 거짓이 습관이 된 사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구습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거짓은 이웃과의 샬롬을 깨뜨립니다. 이웃과 누리는 풍성한 기쁨과 안식을 깨뜨립니다. 그 동안 누렸던 기쁨의 교제를 한순간에 망가뜨립니다. 신뢰를 쌓기는 쉽지만 깨지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짓입니다. 결국, 우리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떠한 순간에도 진실하시고 정직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손해를 보더라고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실과 정직으로 무장하면 당당하고 자신있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고 좋은 사람들과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삶은 풍요로워지고 행복할 것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