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26.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신명기 6:1–9
1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2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3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1절 “이는”으로 시작합니다. ‘이는’은 무엇을 가르킵니까? 5장에 언급된 십계명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넘지 말아야 선입니다. 더 나아가 십계명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순종해야 할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나안땅에서 행해야 할 계명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지켜야 할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1.하나님 말씀은 명령입니다. 선택이 아닙니다.
신명기 6:1 (NKRV)
1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하나님 말씀은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고 말합니다. 명령은 반드시 지키는 것입니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살인하면 안 됩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했으니 도둑질하면 안 됩니다. 이 부분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 사이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살인이 얼마나 끔찍한 죄입니까?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죄를 혐오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명령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봅니다. 우상숭배를 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거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서 관대합니다.
하나님은 살인한 자를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위증한 죄입니다. 안식일은 어떨까요? 안식일을 범한 자도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살인한 죄나 안식일을 범한 나나 똑같이 위증한 죄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살인죄를 심각하게 여기면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그렇게 큰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우상숭배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왜 우리는 사람들에게 짓는 죄에 대해서는 민감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짓는 죄에 대해서는 관대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1)신학적 이유 – 하나님의 친밀함과 인격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
저는 이렇게 된 원인을 두 부분으로 봅니다.
첫 번째는 신학적인 이유로 교회에서 가르친 잘못된 가르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부터인가 강단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성과 친밀함을 지나치게 강조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그의 자녀들이 친밀하게 다가오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친밀하게 다가가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성과 초월성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감히 가까지 다가갈 수 없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는 두려움과 경외감을 갖게합니다. 동시에 그분이 우리 아버지라고 합니다. 인격적인 분이시며 우리에게 친밀하게 다가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능성과 인격성, 초월성과 내재성의 균형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의 전능성과 초월성은 약화되고 인격성과 내재성이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점점 약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적 사랑이 강조되는 것은 좋은데 하나님의 공의는 약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강조되는 것은 좋은데 공의로운 심판은 약화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이 제가 대학생이 된 때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때 청년들이 주로 불렀던 찬양이 주님은 나의 위로자, 주님은 나의 치료자, 주님은 나의 친구 이러한 가사들이었습니다. 특히 저희 세대는 이러한 하나님의 친밀함에 대한 메시지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지는 주로 선교단체에서 흘러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틀린 메시지는 아니었습니다. 그간 약화된 하나님의 인격성과 친밀함을 강조하는 것은 좋은 의도였고 또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신학적 균형이 깨어진데에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경외하는 마음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친밀하게 다가가는 것은 좋은데 두렵고 떨림으로 서는 모습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 살펴본 것처럼 시내산에 임재하신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셨습니다. 그 앞에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벌벌 떨어야 했습니다. 시내산을 뒤덮은 하나님의 불이 쓰나미처럼 모든 것을 사를 것 같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아버지라로 부르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너무나 두려운 분이셨기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조차 함부로 입에 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도나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성경을 필사할 때도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목욕을 하고 정성스럽게 썼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예수님은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고대로부터 해서 예수님 당시까지 모든 문서를 샅샅이 조사하여 과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례가 있는지를 살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곳도 그런 표현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또 우리에게 그렇게 부르라고 했을 때 당시 유대인들은 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신성모독적 표현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의 전능성과 초월성 앞에 두려워 떠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외심이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친밀성을 강조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만만하게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친구라고 서슴없이 부르며 대등한 존재로 대하게 됩니다.
우상숭배를 해도, 안식일을 범해도 좋으신 아버지는 이해하고 용서하실 것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2)세상풍조 - 인본주의
두 번째 하나님의 명령을 선택으로 만든 데는 인본주의라는 세상풍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권리와 선택을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권이라는 가치를 중요시합니다. 미국은 지난 50년간 낙태권을 인정했습니다. 산모가 뱃속에 생명을 낙태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얼마전 미연방대법원이 이것을 뒤집는 결정을 하자 미국 전역이 난리가 났습니다. 낙태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생명존중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부딪힌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풍조는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여깁니다. 내 몸에 있는 생명이니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문제가 되는 차별금지법도 같은 맥락입니다. 자신의 성별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차별금지법이 시행되고 있는 뉴질랜드의 경우를 보니까, 18세 이하 자녀가 동성애적 성향이 있어 부모가 치료를 받게끔 하면, 이것을 전환치료라고 하는데 이것을 시도하면 불법이 되어 최고 5년 형에 처하게 됩니다. 내 자녀가 자신의 성별에 대한 불쾌감을 느끼고 동성애의 길로 가는 것을 부모가 교정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권에 대한 강조가 마치 세련된 교양 여겨지고 있습니다. 만일 부모의 권위로 자녀의 선택을 막으면 교양도 없는 미개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러한 풍조가 교회에도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을 선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부모로서 강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두 가지 이유, 즉 신학적 이유에 세상풍조가 더해져 하나님의 명령을 선택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사단의 전략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단에게 속아 하나님께 불순종했을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에덴의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지만, 사단은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 처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이것을 먹으면 죽을까 하노라 라고 말합니다. 죽을까 하노라는 것은 죽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약화시켰습니다. 더 나아가 너희가 먹어도 정녕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판단하게 했고 너희가 선택할 수 있다고 유혹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불순종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말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처럼, 오늘날도 동일하게 너희가 십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약화시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열어둘 때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서구사회가 인권을 강조하며 자녀들의 신앙을 스스로의 권리와 선택으로 열어두었을 때 다음세대가 무너졌습니다. 교회에 젊은이들이 없습니다. 그 큰 예배당에 20명 내외의 찬양대가 서는데 대부분 어르신들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세상 앞에서 번번히 타협하고 무너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선택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부터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선택할 수 있다고 여기는 순간 이미 내가 하나님 자리에 선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2. 부모의 역할은 이 명령을 자녀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6:7 (NKRV)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자녀에게 십계명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어느정도까지 가르치라고 합니까? 자녀와 함께 집에 앉았을 때, 길을 갈 때, 누워 있을 때, 일어날 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회가 있는 대로 항상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르칠 뿐만 아니라 종이에 써서 붙이고 기억하게끔 하라는 하십니다.
신명기 6:8–9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자녀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항상 의식하며 살 수 있도록 이 말씀을 적어 손목에도 매고 미간에도 붙이고 집 안과 바깥에 기록하여 항상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녀들이 이 명령을 항상 기억하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교육하기 전에 먼저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6:5–6 (NKRV)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너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에 마음을 다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저의 경우 연애시절에 그래본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기쁘게 해 줄까 감동시킬까를 생각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 신앙은 자연스럽게 자녀들에게 전수됩니다.
부모가 세상의 성공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면 자녀는 자연스럽게 세상의 성공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신앙으로 세움에 있어 먼저, 내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십계명에 담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들의 신앙교육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 수련회를 하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첫날 첫 예배를 드리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스마트 폰만 보고 있더라구요. 찬양시간에도 따라 부르는 아이들이 없었어요. 그런 아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머리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찬양소리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날 예배를 드릴 때는 눈을 마주치며 말씀을 듣더라구요. 그 짧은 2박3일 동안 아이들의 마음이 열린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따라옵니다. 문제는 자녀들이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고,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져 있고, 우리의 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사용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신앙교육은 결국 부모의 마음의 문제입니다. 정말 자녀가 신앙으로 자라기를 바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있으면 자녀들을 따라옵니다.
3.신앙교육의 범위는 3대까지입니다.
신명기 6:2 (NKRV)
2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그 다음 세대 그리고 손자 세대까지 하나님을 경외하길 원하십니다. 왜 3대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계가 3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교육은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손자 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순종하는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사명중에 하나는 신앙을 전수한는 일입니다. 이는 마치 릴레이 경주와 같습니다. 내가 받은 바톤을 다음 주자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부모로 신앙을 전수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 바톤을 여러분의 자녀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러면 대대손손 복받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이곳에 계신 성도님들은 꼭 그렇게 하시길 부탁합니다.
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신앙의 유산인 것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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