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35.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신명기 10:12–22
12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14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15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16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17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8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19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20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21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22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경외하고 사랑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명령과 복종의 관계는 인격성이 없습니다. 기계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나 요구와 순종은 인격적 관계에서 이뤄집니다,
예를 들어, 군에서 하급자는 상급자의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전쟁시 항명은 사형에 해당합니다. 컴퓨터는 명령어에 반드시 작동됩니다. 리모콘으로 텔레비전을 조종하는데 듣지 않는다면 고장난 것입니다. 인간은 기계에게 명령을 하고 기계는 명령에 복종합니다. 상명하복의 관계는 마음이 담기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자발성이 없습니다.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격적 관계는 어떠합니까? 요구와 순종의 관계입니다.
인격적 관계는 명령하지 않고 요구합니다. 설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대방의 인격성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인격성이란 것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선택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상대가 그럴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질서와 원리가 부여되어 복종합니다. 예를 들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 복종합니다. 꽃은 봄이 되면 핍니다. 이번 봄에는 피지 말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낙엽이 이번 가을에는 지지 말자라고 결정할 수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가 부여한 질서와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습니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하셨지만 먹었습니다.
창조주의 명령일지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거부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명령과 복종의 관계이지만 인간만큼은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 존재로 창조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리며 그 사랑에 감사와 기쁨으로 반응하는 존재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격에 맞는 존재여야 합니다. 그만큼 존귀하고 존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격이라는 특성이 부여되어만 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권리와 자유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그 은혜의 풍성함을 찬송하는 존재로 살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불순종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명령과 복종의 관계가 아닙니다.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압하지 않으십니다. 억지로 끌고 가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명령은 하시지만 결정은 우리의 몫입니다. 축복의 길 행복의 길을 제시하시지만, 그것을 선택할 권리와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동시에 책임도 따릅니다. 권리와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뜻이 있습니다. 자녀가 잘되길 바라지요. 그래서 이러저러한 지시와 명령을 합니다. 아이가 어릴 적에는 따릅니다. 그러다 머리가 좀 크면 부모의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부모의 뜻이라고 무조건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도 생각합니다. 계산도 합니다. 자기의 경험 세계 안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결정합니다. 그들이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뜻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망하는 길을 선택하고 간다고 할 때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요. 어릴 적에야 매를 든다고 하지만, 다 큰애를 때릴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설득하고 간청하기도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붙잡고 웁니다. 어떨 때는 밥도 안 먹고 시위하기도 합니다. 자신 때문이 아닙니다. 내 새끼 잘되라고 그렇게 합니다.
“제발 엄마 말 좀 들어, 그 길로 가면 너 망해”
이것이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왜 이렇게 힘든 것입니까? 인격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막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스스로 깨닫도록 두는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서 부모는 뒷감당할 준비를 합니다.
2.이러한 인격적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설득하시고 간청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 마치 잘못된 길을 가는 자녀들을 붙잡고 설득하는 부모의 모습과 같습니다.
신명기 10:12–13
12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이스라엘아’ 라고 하는 부분에 여러분의 이름을 넣고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조금 느껴지시나요?
우리가 자녀에게 이런 말 자주 하지 않나요.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 “엄마는 네가 행복하길 바래. 그래서 하는 말이야.”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하시는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안타까운 심정을 담아 설득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면 우리 삶이 행복해질 것입니다. 반드시 행복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설득 내용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12절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신명기 내내 반복되는 내용입니다. 반복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6:3-5
3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려고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의 권능 앞에 피조물이 가지는 경외심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선함과 의로움 그리고 진실함 앞에 죄인이 가지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공의와 정의로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있어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입니다. 의전의식, 코람데오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차로에 경찰차 한 대만 지나가도 질서가 잡힙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할 때 어떻겠습니까?
3.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경외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 곁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가장 가까이 계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축복된 삶인가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 때 바르게 섬길 수 있고 바르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호세아 6:1–3
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우리가 돌아갈 곳이 하나님 품이기에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는 분이기에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힘써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집 나간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듯이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패역했던 아들을 받아 주시고 잔치를 베푸신 아버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그런 분이셨습니다. 변한 것은 나였고 떠난 것도 나였습니다. 아버지는 패역한 아들이 집을 나갈 때 막지 않으셨고 기다리기로 하셨습니다.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라고 해서 떠난 아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길 바라며 날마다 동네 어귀에서 기다리셨습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자신을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종으로라도 써주시길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안았고 제일 좋은 옷을 입혔고 금가락지를 끼워주셨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처음부터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만일 탕자가 이러한 것을 알았다면 아버지를 경외했을 것입니다. 사랑했을 것입니다. 탕자가 자기 몫의 유산을 청구했을 때 아버지를 그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란다. 나의 모든 것이 너의 것이 아니냐.”
탕자는 아버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집을 떠났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길게 설명하십니다.
14절부터입니다.
1)하나님은 창조주입니다.
신명기 10:14
14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그러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2)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사 자신의 자녀로 택하셨습니다.
신명기 10:15
15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에베소서 1:4–5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러기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주시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그 보배로운 피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자녀 삼은신 그 사랑을 안다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3)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십니다.
신명기 10:18
18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시는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4)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신명기 10:22
22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너의 씨를 통해 하나님의 별처럼 많은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잘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연약하고 부족했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명기 10:20–21
20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21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제발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주시니 경외하는 것이 마땅하며, 긍휼과 사랑으로 베푸시니 사랑해야 마땅한 분이시며, 우리를 신실함으로 인도하시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명령이 아니죠, 설득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자는 것입니다.
4.하나님은 우리가 '오늘'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늘의 행복입니다.
신명기 10:13
13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저는 “오늘”이라는 이 단어가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줍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행복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경외하고 사랑하며 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한 것이란다. 너의 행복을 위한 것이란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섬김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홀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완전하셨습니다. 사랑과 기쁨이 충만하셨습니다. 우리가 높여드리고 섬겨드려야만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영광으로 충만해 계십니다.
무언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도 오늘의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행복해야 내일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살 수 있는 날입니다. 아침에 반갑게 악수하며 인사했던 성도가 다음날 장례식을 치르기도 합니다. 그 누구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희생하고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4:13–14
13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여러분! 오늘 행복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커서 어느 대학에 가고, 성공하고, 하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오늘이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면 오늘이 행복해집니다.
최근에 목회의 보람의 느낀 일이 있었습니다. 삶공부가 이제 한주를 남기고 있는데요, 이런 말씀을 들었을 때 참 감사했어요. “목사님 저는 그동안 헌금이나 봉사를 많이 해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렇지 못한 자신을 보면서 눌리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말씀을 공부하면서 눌리는 마음이 사라졌어요. 지금은 행복해요.”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어요.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오늘 행복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말씀은 오늘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이런 찬양이 있지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 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손 잡아 주소서
내일 일은 난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한길 주옵소서.
내일 일은 주님 앞에 맡기시고 하루하루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 날마다 만나를 먹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한 달 치를 주시면 안 됩니까?
매일 매일 하나님을 기대하고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만나로 만족한 성도는 내일도 만족합니다. 오늘 주시는 은혜로 행복한 성도는 내일도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내일이 아닙니다. 오늘입니다. 오늘 나 자신이 행복한가? 여야 합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오늘의 만나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곡간에 만나가 풍족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 미래의 만나와 내 노후의 만나까지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늘의 만나에 대한 감사와 주신 은혜로 인한 행복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오늘 웃으셔야 합니다. 제발 좀 인상 좀 쓰지 마세요. 언제 웃으실 꺼예요? 로또 맞으면 웃으시겠습니까? 주식이 오르면 웃으시겠습니까? 아이들 성적이 쭉쭉 오르면 웃으시겠습니까?
우리가 기대하는 웃을 날은 오지 않을 수 있어요.
박위라는 형제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2014년 5월의 어느 봄날 그는 낙상 사고를 당했고, 목이 부러지며 척수가 손상됩니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28살이었습니다. 인턴으로 일하던 의류회사에서 정직원 합격 통보를 받았고 출근을 일주일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자신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모임에서 사고를 당합니다. 이후 전신마비로 살아갑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위라클’이라는 유투브 방송을 하면서 장애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또 한명, 한팔이 없는 보디빌딩 선수 김나윤입니다.
지난 9월 국내 최고 권위 대회 WBC피트니스 월드 바디 클레식에서 비장애인과 겨뤄 4관왕을 차지했습니다. 대회 사상 첫 장애인 참가자입니다. 윤석열대통령 취임식에도 국민희망대표 20명에 뽑혀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올해 서른인 그녀는 4년전 오토바이 사고로 왼팔을 잃었습니다.
위라클의 박위형제가 김나윤자매를 인터뷰하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런 말을 해요. ”그래도 감사하다고, 오른 팔이 있어서...“
전 이 젊은이들의 도전과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사고를 겪으면 평생 집에서 나오지 않고 우울한 인생을 살아가지만, 이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박위형제가 이런 말을 해요.
“많은 분들이 제게 질문해요. 진짜 많이 힘드실 때는 어떻게 이겨내세요?라고. 눈 앞에 닥친 고난과 아픔은 마치 우리의 인생을 삼킬 것만 같은 착각을 주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조차 빼앗긴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저는 고난을 극복하지 않았어요. 고난 속에서 기쁨을 찾아 느끼는 중이죠. 저는 힘든 순간들이 잘 기억나지 않아요. 제 인생에는 행복한 순간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에요. 오늘도 우리 같이 일어나요!”
오늘 나에게 주시는 행복을 찾아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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