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48. 공의만을 따르라
신명기 16:18–17:13
18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19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20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21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제단 곁에 어떤 나무로든지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며
22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1흠이나 악질이 있는 소와 양은 아무것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어느 성중에서든지 너희 가운데에 어떤 남자나 여자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 언약을 어기고
3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게 절하며 내가 명령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한다 하자
4그것이 네게 알려지므로 네가 듣거든 자세히 조사해 볼지니 만일 그 일과 말이 확실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함이 있으면
5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그 남자나 여자를 돌로 쳐죽이되
6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7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8네 성중에서 서로 피를 흘렸거나 다투었거나 구타하였거나 서로 간에 고소하여 네가 판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너는 일어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으로 올라가서
9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에게 나아가서 물으라 그리하면 그들이 어떻게 판결할지를 네게 가르치리니
10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의 뜻대로 네가 행하되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대로 삼가 행할 것이니
11곧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율법의 뜻대로, 그들이 네게 말하는 판결대로 행할 것이요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을 어겨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 것이니라
12사람이 만일 무법하게 행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에게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
13그리하면 온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무법하게 행하지 아니하리라
오늘날 우리 시대의 화두는 공의입니다. 어떠한 일이 공정한가? 또는 정의로운가에 대해 사람들은 예민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공의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힘과 권력으로 공의에 대한 요구를 무시할 수 있었지만, 지금 사회는 그럴 수 없습니다. 시민 의식, 인권이 그만큼 성장한 것입니다.
이제는 설명하고 이해시켜야만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특히 청년들은 어떠한 일이 공의롭지 못하거나 정의롭지 못할 때 과감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될 기미가 없을 때는 직장이나 공동체를 옮기기도 합니다.
저는 이러한 변화를 긍정적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공정과 의로움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의에 대해 예민함에 비해 공의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은 불공정해”라고 문제를 제기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공정한가요?”라고 물으면 주저합니다. “이것은 정의롭지 않습니다”라고 문제를 제기했는데, “그러면 무엇이 정의로운가요?”라고 물으면 대답을 못 합니다.
나름대로 대답과 대안을 제시하지만 대부분 자기 경험에서 나온 생각이거나, 어디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공의에 대한 기준과 근거가 저마다 다릅니다. 나에는 공의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공의가 아닙니다. 우리 시대 문제는 공의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데, 공의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사회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곳에는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공의가 무시되는 곳에는 갈등과 고통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문제를 살피면서 내 자신과 가족 그리고 공동체 더 나아가 우리나라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가 임하기를 바라고 기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1. 공의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모세에게 공의로 재판하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16:18
18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또한 공의만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16:20
20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공의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성경에는 공의로 번역되었지만, 이것은 원래 두 단어입니다.
‘미쉬파트’와 ‘체다카’입니다. ‘미쉬파트’는 ‘정의’로 번역되고, ‘체다카’는 ‘공의’입니다.
‘미쉬파트’ 즉 ‘정의’는 하나님의 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 가운데 심어주신 하나님의 법입니다. ‘체타가(공의)’ 관계적 차원에서의 올바름입니다.
이 부분을 설명하겠습니다.
1)정의 “미쉬파트”
먼저 정의(미쉬파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무작정, 무작위로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계획을 세우고 세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질서와 원리를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 안에는 하나님의 질서와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의 성품도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구와 태양의 거리를 세밀하게 계산하여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꽃 한송이를 창조할 때도 그 피는 계절과 입의 색깔, 개수까지도 계산하셨습니다. 땅의 동물들 물속의 어류들까지도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과 섭리 가운데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에는 하나님의 법과 성품이 담겨 있습니다. 과학이 가능한 것은 피조세계 안에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물은 존재하는 방식과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는 것도 하나님의 법입니다. 자녀를 낳아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는 것도 하나님의 법입니다. 가족 모두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것도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것은 마치 지구와 태양의 거리가 완벽한 것처럼, 우리 또한 그 법 앞에 완전해야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법을 주셨습니다. 사물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리고 피조물은 그 법안에 있을 때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또한 그 존재의 의미를 가지며 따라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반면 그 법을 떠나게 되면 비참해집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존재할 수 없고 비참해지듯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떠나면 존재의 미를 상실하고 그 삶이 비참해집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피조물에 부여하신 법, 질서, 원리, 이치, 도리를 “미쉬파트” 즉 하나님의 정의라고 합니다.
이것은 불변합니다. 지구와 태양의 거리가 완벽하듯,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한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이고 미쉬파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순종하는 것도 하나님의 정의이기에 불변합니다.
2)공의 “체다크”
공의는 관계적 측면에서의 올바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하나님의 법안에서 올바로 서 있을 때 그것을 공의롭다고 합니다. 이 개념이 공의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지 않아서 쉽게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공의라고 하는구나” 이 정도만 알아도 좋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의 올바름이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으로 계시고 우리가 그의 백성답게 있을 때 그것을 공의라고 말합니다.
예를들어, 제가 아내의 남편으로 온전히 서 있고 아이들의 아빠로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할 때 그것은 저의 공의로움입니다. 또 아이들이 아빠를 사랑하고 제 말에 순종할 때 그것이 아이들의 공의입니다. 이렇듯 공의는 관계적인 측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우리가 공의롭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정의와 공의에서 벗어나게 어떻게 될까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비참한 지경으로 전락합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 품을 떠나 돼지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한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나감으로 아버지의 정의에서 벗어났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었기에 공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상태를 죄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죄를 어떤 행위로 생각합니다. 살인하고 도둑질하고 가짓말 하는 어떤 행위로 생각하지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행위가 아니라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마치 사과 나무이기에 사과 열매를 맺히는 것처럼, 우리가 죄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죄를 짖는 것과 같습니다.
죄는 히브리어로 ‘핫타트’ 헬라어로 ‘하마르티아’입니다. 둘 다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과녁입니까?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안에서 살며 이것을 추구하고 실현하며 살아야 하는데, 이것에서 벗어난 것이 죄입니다.
법 없이도 평생을 착하고 선하게 산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지옥에 가는가? 라는 질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죄란 단지 행위가 아니라 상태, 즉 하나님의 공의를 벗어난 상태이기에 그 또한 심판받게 됩니다.
그러기에 구원이라고 할 때도 그것은 단지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분의 법과 뜻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2. 공의로 재판하라. 공의만을 따르라
자 이렇게 하나님의 공의를 알았으니 공의로 재판하라, 공의만을 따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과 질서 안에서 올바른 관계 안에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벗어난 자들을 공의로 바로 잡으라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이 일을 모세와 재판장 그리고 지도자를 세워 시행하셨습니다.
신명기 16:18
18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공의를 실행해야 하는 사역에 이들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역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배우고 실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공의로 모든 사건을 분별하고 판단해야 하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바르게 알아야 했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하나님의 공의를 배우고 익히는 일에 소홀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책망받을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일로 저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저와 아내는 병원 예약을 할 때, 예약이 가장 없는 의사 선생님께로 갑니다. 대부분 무뚝뚝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싹싹하고 친절한 의사선생님을 좋아합니다. 특히 소화과의 경우 는 더합니다. 엄마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렇지 않아요. 좀 무뚝뚝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실력은 있어야 합니다. 참 재밌는 것은, 실력있는 의사들은 무뚝뚝해요.
의사에게 중요한 요소는 의술이지 친절함이 아닙니다.
제가 싹싹하지 못해 서운해하신 분들이 계시는 것 같아요. 저희 어머니도 저를 불편해하실 정도니 제가 문제가 있는 것이겠죠. 노력해서 이 정도이니까 예쁘게 봐주십시오.
그러나 여러분, 제가 싹싹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게 배우고 익히는데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익히고 가르치는 것이지 싹싹함이 아닙니다.
저는 매주 2편씩 논문을 쓰는 기분이에요. 한편은 수요일에 제출하고 한편은 주일에 제출합니다. 또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새벽예배 드리잖아요. 쉽지 않아요. 그것만 해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냥 은혜받은 대로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저는 욕심이 있습니다. 잘하고 싶은 욕심, 잘 가르치고 싶은 욕심, 우리 성도들에게 양질의 설교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다른 목사님들보다 더 잘하고 싶은 욕심. 이 본문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가르치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지금은 모르겠는데, 전에 JTBC 뉴스를 보면 손석희 아나운서가 자주 이런 멘트를 하더라구요. “한 걸음 더 들어가겠습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한 걸음 더 들어가고 싶어요. 우리 성도들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배우셨겠지만, 저는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말씀의 은혜를 누리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바르게 배워 올바르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매주 여러분을 찾아가 만나는 것보다, 여러분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아셨으면 좋겠어요.
성경은 말합니다.
신명기 17:10–11
10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의 뜻대로 네가 행하되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대로 삼가 행할 것이니
11곧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율법의 뜻대로, 그들이 네게 말하는 판결대로 행할 것이요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을 어겨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 것이니라
“그늘에 네게 가르치는 율법의 뜻대로 판결하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를 때 제사장과 재판장에게 가서 물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알려 줄 것인데 그것을 근거로 판결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판단과 분별의 순간에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리고 그 공의는 목사로부터 배운 공의입니다. 여러분의 목사가 그 공의를 바르게 가르쳤다면 그 공의로 판단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잘못 분별하게 되면 우리의 삶은 “하마르티아” 과녁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를 굽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신명기 16:19
19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외모와 뇌물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외모는 눈에 보여지는 외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친분, 학력, 직업, 재산 정도, 사회적 영향력 등을 말합니다. 뇌물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이 외모와 뇌물로 인해 굽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유롭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습니다. 나와 친한 사람 편을 들게 됩니다. 한 끼라도 밥 사준 쪽의 편을 들기 쉽습니다. 가족이라면 더 어렵겠죠. 내 남편이 또는 아내가 분명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편들어줍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공의만을 따르라”
신명기 16:20
20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우리의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공의이지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무시하거나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신명기 17:12–13
12사람이 만일 무법하게 행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에게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
13그리하면 온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무법하게 행하지 아니하리라
“무법”이라고 번역한 “자돈”은 교만입니다. 교만하게 되면 제사장이나 재판장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만이 가장 심각한 죄입니다. 교만하면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공의의 판단이 아니라, 외모로 뇌물로 판단합니다.
성경은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한 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그러기에 그를 죽여 온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그 대표적인 예로 여호와의 제단에서 우상을 섬기는 것을 듭니다.
신명기 16:21
21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제단 곁에 어떤 나무로든지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며
또한 흠있는 제물을 드리는 경우를 듭니다.
신명기 17:1
1흠이나 악질이 있는 소와 양은 아무것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
또 우상숭배를 언급합니다.
신명기 17:3
3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게 절하며 내가 명령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한다 하자
이 세 가지 모두 예배와 연관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소홀히 하거나 그 중요성을 간과하게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것은 우상숭배의 장소가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라는데 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신명기 16:22 (NKRV)
22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위한 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공의에서 멀어졌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공의는 종의 자리, 순종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니 흠 있는 제물을 드리고 일월성신에서 절하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것은 이들이 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우상숭배가 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공의로 분별하셔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목사의 사명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공의를 세울 수 있도록 열심히 부지런히 배우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땅은 아직 하나님의 공의가 임하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공의가 임하는 날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그날까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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