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56. 무고한 생명의 죽음 앞에서
신명기 21:1–9
1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피살된 시체가 들에 엎드러진 것을 발견하고 그 쳐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거든
2너희의 장로들과 재판장들은 나가서 그 피살된 곳의 사방에 있는 성읍의 원근을 잴 것이요
3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그 성읍에서 아직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여
4그 성읍의 장로들이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린 일도 없는 골짜기로 그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 골짜기에서 그 송아지의 목을 꺾을 것이요
5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갈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
6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모든 장로들은 그 골짜기에서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7말하기를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8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하면 그 피 흘린 죄가 사함을 받으리니
9너는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여 무죄한 자의 피 흘린 죄를 너희 중에서 제할지니라
본문은 가나안땅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한 처리법을 담고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다루고 있는 살인사건은 세 가지 경우입니다.
첫째, 가해자가 명확한 경우, 둘째, 가해자가 고의성이 없이 사람을 죽인 경우, 셋째, 가해자를 알 수 없는 경우입니다.
가해자가 정확히 밝혀진 경우는 사형에 처했습니다. 가해자가 고의성이 없이 실수나 부주의로 사람을 죽인 경우는 도피성에서 보호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되는 것은 가해자를 알 수 없는 경우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런 경우 그의 백성들이 어떻게 처리하길 원하셨는지를 살펴보고, 이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가나안땅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언제, 누구에 의해 살해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심장마비 등의 돌연사로 죽은 경우가 아닙니다. 타살의 흔적은 있지만 증거도 증인도 없습니다.
신명기 21:1
1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피살된 시체가 들에 엎드러진 것을 발견하고 그 쳐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거든
“쳐죽인 자가 누구인지”라고 언급한 것을 보아 타살의 흔적이 있는 살인사건입니다. 이 경우 1)장로들과 재판장들이 소집됩니다.
2)이 중 선발된 장로와 재판장은 주검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성읍을 지정합니다.
이때 주검 주위에 있는 성읍의 거리를 측정하여 지정합니다.
3)지정된 성읍의 장로들은 흠없는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와서 물이 흐르는 골짜기, 사람 손이 닿지 않은 골짜기로 끌고 가서 목을 꺾어서 죽입니다. 이때 레위자손도 참여합니다.
4)장로들은 냇물로 손을 씻고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이 사람이 살해되는 현장을 목격하지도 못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속량하여 주신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무죄한 사람을 죽인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게 하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일까요?
1.하나님께서는 한 생명의 죽음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어떤 식으로든 해결되길 원하셨습니다.
살인사건은 비록 가해자가 밝혀지지 않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살인이 그 어떤 죄보다 위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0년 전까지는 사건의 진상이 공소시효안에 안에 밝혀지지 않으면 영구 미제사건이 되어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되었습니다. 그러다 2000년 이후에는 살인이나 강간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미제 사건의 경우 해결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살인사건이라 할지라도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으면 묻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깨닫는 것은, 살인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게 됩니다.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처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살인을 심각한 죄로 여기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는 인간의 생명이 그 어떤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존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얼마나 존엄하게 여기시며 생명을 상해하는 것을 위중하게 여기시는지 보게 됩니다.
창세기 9장은 노아 시대의 물 심판 이후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당시 죄악으로 가득한 인류를 물로 심판하시고, 노아와 그의 가족만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새로운 인류를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때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창세기 9:1–2
1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2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씀 아닙니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처음 주신 말씀과 거의 일치합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1:28
창세기 9:1–2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1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2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사람이 다스려야 하는 땅의 짐승, 하늘의 새, 바다의 물고기가 사람을 무서워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변화가 생겼을까요?
창세기 1,2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보호와 다스림을 받던 생태계, 그중에서 동물계가 적대적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생태계는 인간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의 특징은 자기 중심성인데, 죄인은 자기를 위해서라면 자기를 제외한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명의 확장을 위해서 내 주변의 생명을 죽이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동물이 사람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죄인의 한계성을 인정하는 듯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창세기 9:3–4
3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4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동물을 잡아먹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원래 사람의 먹거리는 식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 이후 사람은 동물을 잡아먹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허용하신 것이지 권장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육고기를 즐기는 것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건강에도 좋지 않고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은 육고기를 허용은 하셨지만, 피째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피째 먹는 것은 그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레위기 17:11
11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죄로 인해 인류는 짐승을 먹을 수밖에 없지만, 생명이 존엄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9:5–6
5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6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이라는 것은 살인을 말합니다. 만일 살인하게 되면 죽게 됩니다. 왜 그렇다라고 하십니까?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그 생명은 존엄한 가치를 지닙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더 확장하셔서 짐승의 생명까지도 보호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짐승을 먹더라고 피채 먹지 않음으로 생명의 존엄한 가치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레위기 17:14
14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그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
하나님은 생명의 가치를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엄중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니 한 생명이 어떤 이유에서든 죽였다는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심각한 죄였습니다.
누가 죽였는지 알 수 없다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고 전두환 씨의 손자 정우원(27세)씨는 광주 5.18민주 묘지에서 자신의 겉옷으로 희생자 묘비를 닦았습니다. 전두환 일가 구성원 중에 5.18사죄와 묘역 참배를 한 것은 우원 씨가 처음입니다. 할아버지가 5.18학살의 주범이라고 밝힌 우원씨의 사죄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고등학생 시민군 故 문재학 열사의 어머니 김길자 여사는 아들의 묘역 앞에서 우원씨를 안내했습니다. 김여사는 “여기 있는 우리 아들을 너희 할아버지가 죽였다 이 어린 학생이 무슨 죄가 있어서”라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어 묘소를 향해 “재학아, 전두환 손자가 와서 사과한단다”라며 우원씨의 참배를 눈물로 지켜 보았습니다. 김 여사는 참배를 모두 마친 그에게 “여기까지 오는 데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냐”며 앞으로 계속 묘역에 와서 희생자들을 위로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조진태 5.18상임이사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그의 행보에 대해 ”가슴이 먹먹하다며“며
”역사적 죗값을 치르지 않은 범죄자가 어떻게 후손들에 의해 다뤄지고, 받아들여지는지 전우원씨가 적나라하게 반증하고 있다. 과거사를 풀어가는 계기나 동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故 전두환씨의 아들 전재용씨는 교도소에 있을 때 신앙을 가졌고 현재 백석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들이 우원씨입니다. 그도 크리스천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보면서 많은 갈등과 고민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우원씨는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고 합니다. 정상적으로 생활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비록 할아버지가 한 일이지만,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우원씨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가 했던 말 중 ”상처입은 분들의 억울한 마음을 풀어주고 싶다”는 말이 와닿았습니다.
죽음은 가족들에게 상처를 남깁니다. 특히 무고한 죽음은 그 상처와 억울함이 더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건의 진상을 알지 못한다고, 또는 가해자를 찾을 수 없다고 사건이 종결되거나 없던 일처럼 넘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피해자 가족의 상처와 억울함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을 죽인 죄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돼야 하는 것입니다.
2.그렇다면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 일을 해결할까요?
하나님은 미제살인사건에 대한 책임을 이스라엘 공동체가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특히 장로들과 레위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들이 감당하는 책임이란 제의적인 행위를 통해 속죄의식을 치르는 것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부리거나 멍에를 메지 않은 암송아지의 목을 꺾어 죽이는 의식은 속죄의식을 말합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원래는 살인자가 이렇게 죽어야 하는데, 살인자를 찾을 수 없으니 암송아지를 대신 죽이는 것입니다.
이일을 이스라엘 공동체의 권위자인 장로들과 제사장들이 감당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장로들이 이 일을 주관하고 제사장들은 보조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장로들이 이 일을 주관한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대표로서 이스라엘 전체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속죄의식을 치루면서 장로들이 올리는 기도입니다.
신명기 21:7–8
7말하기를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8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하면 그 피 흘린 죄가 사함을 받으리니
우리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않고 우리 눈이 보지 못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 일에 책임이 없다고 하나님께 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공동체가 책임이 없는데, 왜 이스라엘의 죄를 사해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 간접적인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흠없는 송아지를 대신하여 죗값을 치르니 우리의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그것은 모든 무고한 죽음에는 공동체가 간접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직접 죽이지 않았어도 연대적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회의 문화, 사회적 분위기, 구조와 시스템이 살인을 쉽게 용납하거나 부추길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당시 독일인으로 태어났다면 어떠했을까요? 유대인 수용소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히틀러의 명령에 저항할 수 있었을까요? 당시 독일교회가 히틀러를 옹호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당시 독일인들은 직접 유대인을 학살하지 않았어도 연대적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OECD국가중 청소년 자살률이 1위입니다.
대부분이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우울한 것입니까?
어릴 적부터 무한경쟁 속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 속에서 자신의 개성과 자율성을 펼치지 못하고 눌린 채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우울한 것입니다.
자살은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문제이기도 합니다.
모든 죽음의 문제 뒤에는 그 사람을 둘러싼 공동체의 죄가 있는 것입니다. 따돌림당한 아이가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었습니다. 그 반 학생 중에 나는 죄가 없다고 할 수 있는 아이는 없습니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살인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인 연대적 책임에서 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우리가 했던 말이 무엇입니까?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입니다.
내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의 무고한 죽음 앞에서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의 죽음 앞에서 공동체 대표들의 역할과 처신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참회하는 것입니다. 개인적 참회가 아닙니다. 공동체를 대신하여 대표로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모든 장로들이 이 의식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신명기 21:6 (NKRV)
6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모든 장로들은 그 골짜기에서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장로들 전체가 이스라엘의 대신하여 속죄의식을 거행하라는 것입니다.
3.무고한 생명의 죽음 앞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피해자 가족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명령을 하신 이유 중에 하나는, 무고하게 죽은 피해자 가족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해자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다고 미제 사건으로 돌려 묻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피해자 가족이 받을 상처와 아픔은 절대로 치유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분노와 억울함은 또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공동체의 대표들이 모두 모여 이러한 의식을 치르게 되면, 유가족들은 그나마 위로받지 않겠습니까?
목사로서 장례를 집례할 때가 많습니다.
간혹 자살한 분의 장례를 집례할 때가 있었습니다. 두 번 있었습니다. 이 경우 장례식을 인도하는 것이 참 힘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장례식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장례식은 죽은 자를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사람의 영혼은 천국 아니면 지옥에 있습니다. 그러니 죽은 자를 위해 어떠한 의식을 행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향을 피우거나, 제사상을 차리거나, 염불을 읊거나,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래서 비록 자살로 인해 생을 마쳤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일지라도, 집례자는 유가족들이 위로받을 수 있도록 말씀을 준비해 전합니다. 말씀을 통해 유가족들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치유될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깨닫는 것은 한 생명의 죽음 앞에, 책임을 묻고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유가족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공동체의 대표들이 이러한 의식을 행하여 유가족을 위로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무고하게 죽어가는 생명들이 있습니다.
이 일에 가장 아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생명이 죽는 것을 하나님은 슬퍼하시며 또한 아파하십니다.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무고하게 죽는 것을 바라만 보시는지 의문을 품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 죽음을 안타까워하시고 아파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이러한 하나님이 모습을, 나사로의 죽음 앞에 서셨던 예수님의 모습에서 발견합니다.
요한복음 11:33
33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요한복음 11:38
38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여기서 ‘비통히 여기셨다’는 것을 많은 분이 슬퍼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슬퍼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제 몇 분 후면 나사로가 살리실 것인데 예수님께서 슬퍼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비통해 하셨다’는 의미는 격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아무 많이 분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 앞에 분노하셨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도 슬퍼한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격분이라는 단어로 번역해야 옳습니다. 독일어 성경은 잘 번역했습니다. 무엇에 대한 분노였을까요? 누구를 향한 분노였을까요?
그것은 죄로 인한 죽음의 현실, 죄의 권능에 대한 분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생명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입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이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만일 여러분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응급실에 있다는 것입니다. 달려가 보니 아이가 피투성이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떨 것 같습니까? 만일 아이가 죽었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교통사고일 수 있고, 폭행을 당한 것일 수 있습니다.
분노가 치밀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격분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나 사랑했던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죽음 앞에서도 동일한 마음을 가지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의 죽음을 애통해하지 않으실 리 없습니다. 재난과 전쟁으로 인한 무고한 생명이 죽는 것을 애통해하지 않으실 리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죄악 가운데 죽어 심판받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에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 격분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나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를 구원할 수 있기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없습니다. 성경은 잠들었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순간 잠들었다 깨면 주님 계신 곳에 서실 것입니다. 고난 주간이 시작됩니다. 이 예수님을 한주동안 묵상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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