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3-04-17 18:02

57. 여성포로를 아내로 삼는 규정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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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강해 57. 여성 포로를 아내로 삼는 규정

 

신명기 21:10–17 

10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울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손에 넘기시므로 네가 그들을 사로잡은 후에 

11네가 만일 그 포로 중의 아리따운 여자를 보고 그에게 연연하여 아내를 삼고자 하거든 

12그를 네 집으로 데려갈 것이요 그는 그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13또 포로의 의복을 벗고 네 집에 살며 그 부모를 위하여 한 달 동안 애곡한 후에 네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의 남편이 되고 그는 네 아내가 될 것이요 

14그 후에 네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마음대로 가게 하고 결코 돈을 받고 팔지 말지라 네가 그를 욕보였은즉 종으로 여기지 말지니라 

 

오늘 본문은 여성 전쟁포로를 아내로 삼는 규정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명하신 전쟁의 규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대상을 두 부류로 나뉘셨습니다. 가나안 민족과 그 외의 민족입니다. 가나안 민족과 싸울 때는 진멸을 명하셨고, 그 외의 민족일 경우 화평조약을 제안하고 이를 거절할 때는 전쟁이 불가피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언급된 여자 포로의 경우는 가나안 민족이 아닌 경우입니다. 

고대 전쟁에서 포로는 전리품과 함께 소유물로 간주하여 마음대로 취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성 포로에 관한 규정을 명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만일 포로 중에 아리따운 여성을 보고 사랑하여 아내로 삼고자 할 경우입니다.

먼저 그를 집으로 데려가야 합니다. 집으로 데려간다는 것은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강간하거나 첩이나 종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아내로서의 완전한 지위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벱니다. 이것은 이방인으로 살았던 과거를 청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포로의 의복을 벗습니다. 옷을 바꿔입는 것은 이방인의 삶의 방식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포로의 의복을 벗음으로 더 이상 포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아내가 됨을 의미합니다. 

그 부모를 위하여 한 달 동안 애곡하게 합니다. 아내가 될 여성이 마음으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또한 전쟁 때 죽은 부모를 애도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 후에 합방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 가운데 그를 기뻐하지 않을 경우가 생긴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한 달 동안의 애도 기간에 마음이 바뀌었을 수 있고요, 여성이 흠이 많을 수도 있고요, 결국 남성이 이 여성을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기로 하면 그 여성은 자기 마음대로 가게 해 주어야 합니다. 이때 돈을 받고 팔지 말라는 것은, 노예로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여성 전쟁포로에 관한 규정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규정을 명하셨을까요?

그것은 아무리 전쟁포로하고 해도 사람의 존엄성을 헤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특히 패전국의 여성은 여러 가지 비참한 일들을 겪을 수 있으므로 그들의 존엄성이 보호받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규정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도 포로들, 특히 여성들을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문화되었기 때문에 만일 여성 포로를 함부로 대했다가는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이것은 고대사회에서 매우 특별한 경우입니다. 

 

여러분, 포로에 대한 개념은 18세기에 나타났습니다. 계몽주의 등장으로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면서부터입니다. 그전까지는 없었습니다. 

나폴레옹(1769~1821) 시대에는 포로를 수용소에 가뒀다가 나중에 교환했다고 합니다. 

세계 최초로 포로를 함부로 학대하거나 죽이지 못하게 법제화한 나라는 1863년 남북전쟁(1861~65) 당시 미국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 포로에게 인도적 대우를 하도록 명문화한 것은 제네바협약(일명 적십자조약)입니다. 이 협약은 전쟁 희생자를 보호하기 위해 1864~1949년 제네바에서 잇따라 맺어졌습니다. 

협약에 따르면 포로는 항상 인도적으로 대해야 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해선 안 되었습니다. 음식과 구호품을 주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압박해서도 안 됩니다. 포로의 생명과 건강에 위협을 줄 수 있는 불법적 행동이나 방관, 보복 조치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포로를 대상으로 한 어떠한 의학·과학적 실험도 금지됩니다. 포로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전쟁이 끝난 뒤 곧 본국으로 보내야 합니다. 여성의 경우 성(性)을 감안해 최선으로 배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류가 치른 전쟁 가운데 이러한 원칙이 지켜진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가운데 무고하게 희생되고, 처참하게 죽어간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전쟁은 숨어있던 인간의 모든 악한 본성을 드러냅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비참한 일들이 버젓이 일어납니다. 대량 학살, 무자비한 고문, 성폭행 등.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인간의 존엄성은 사라져 버립니다. 

특히 여성의 경우, 전쟁포로가 되면 그 비참함은 더할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위안부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인간이 저지른 전쟁의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지난 2월 베트남전 당시 민간인 학살 피해자 응우엔 티탄(63세)씨는 대한민국을 상대로 소송에서 승소했습니다. 그는 청룡부대 군인들이 1968년 자신의 마을에서 민간인 70명을 학살한 사건에서 가족 모두를 잃고 자신도 총격으로 부상을 입어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전쟁은 인간 이성을 붙들고 있던 모든 제어장치를 해체합니다. 분별력을 잃게 하고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그 속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입니다. 남성들은 대부분 처형을 당합니다. 그러나 여성은 살아서 고통을 당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치른 전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의 비참함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나마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법이나 조약을 통해 인간 행동의 범위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법으로 통제되어야만 그나마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전쟁 희생자의 보호에 대한 최초의 조약은 1864년에 제정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까지 얼마만큼 잔혹하게 포로를 대했겠습니까? 물론 제네바 조약이 제정되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법이 있기에 죄를 물을 수 있었고, 심판의 근거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주전 1400년 전에 여성 전쟁포로에 대한 규정을 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인간의 존엄성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전쟁이라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헤치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전쟁 시 여성 포로는 그 사회에서 가장 약자입니다. 누군가의 보호와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의 존엄성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의 상황에 놓여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쟁 같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입시전쟁을 준비합니다. 

초,중,고등학교를 지나 입시전쟁에 승리한 아이들은 다시 취업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취업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또다시 전쟁터 같은 직장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왜 우리 사회가 입시전쟁, 취업전쟁이라는 말을 할까요? 그것은 인생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승리한 사람들은 인생의 승리자가 되고, 패배한 사람들은 인생의 패배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자살률이 높고 특히 청소년 자살률이 높은 이유도 전쟁터 같은 우리 사회의 모습과 연관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전쟁에서 패배하여 약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쟁사회의 빠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도태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획일적인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해 약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사회는 총칼로 싸우는 전쟁이 아닙니다. 

자본력으로 싸우는 전쟁이고, 타고난 배경과 능력으로 싸우는 전쟁입니다. 또한 이 싸움터는 승자독식 구조로 되어 있고, 그 속에서 빈익빈 부익부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부가 대물림되고 가난이 대물림 되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승자들은 점점 더 오만해지고 패자들은 삶은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삶의 질이 떨어지니 우울감은 높아져만 갑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두려우니 죽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패자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점점 이러한 모습으로 가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사람의 존엄성을 우리 스스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학력, 직장, 직위, 재산, 장애, 인종 등으로 점수를 매기고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온 이주 노동자들, 장애인, 성소수자, 보육원 아이들, 경제적 약자들. 노인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인생의 패배자들처럼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아무리 전쟁이라는 상황일지라도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인간의 존엄성은 지켜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의 모습 속에서 인간을 존엄하게 대하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아무리 죄로 인해 부끄러운 삶을 살았더라도 그 존엄성이 훼손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질질 끌고 예수님께로 옵니다.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옵니다, 그들은 손에 돌을 들고 흥분한 채 서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간음죄는 사형에 해당하니 그들이 돌을 든 것입니다.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이여,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땅에 쓰십니다. 순간 그곳에 침묵이 흐릅니다. 잠시 정적을 깨고 예수님께서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러고는 다시 몸을 굽혀 땅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어떤 학자는 돌을 든 자들의 죄목을 쓰셨다고 말합니다.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지만, 예수님의 그러한 행동과 말씀은 사람들을 움직였습니다. 한 사람씩 손에 든 돌을 내려놓았습니다. 어른으로부터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벗어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여인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다가가십니다. 마치 전쟁 포로처럼 같이 끌려온 여성입니다.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두려움에 떨던 여인이 대답합니다.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봅니까? 아무리 간음죄를 범하여 붙잡혀 온 여성이지만 그의 존엄성을 지켜주시는 긍휼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공관복음(마태,마가,누가)은 예수님께서 군대 귀신에 들린 자를 온전케 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그를 쇠사슬로 묶어 놓았지만, 번번이 끊고 고랑을 깨뜨렸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덤에 버린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추방되어 완전히 고립된 채 귀신에 매여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를 폭우를 뚫고 만나러 가십니다. 

군대 귀신을 내어 쫓으셨고 그 사람은 온전케 됩니다. 

아무리 군대 귀신에게 붙잡혀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일지라도 예수님은 존엄하게 여기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나병은 피부에 감각이 없고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피부가 썩어 결국 죽는 병이었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는 저주받은 것으로 간주하여 공동체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들은 행여 누군가 자신의 주변에 지나가면 입술 위를 손으로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외쳐 스스로 격리해야 했습니다. 

나병 자체도 괴로웠지만, 사회적으로 완전히 고립되는 고통이 더 괴로웠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은 만나셨고 손을 내밀어 어루만지셨습니다. 그리고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치유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풍랑이는 바다를 ”잠잠하라“ 말씀만으로도 제어하실 수 있으십니다.

백부장의 종을 고치실때는 만나지도 않으시고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말씀만으로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굳이 손을 대신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를 존귀히 여기신 것입니다. 네가 비록 나병에 걸려 저주받은 인생처럼 살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 또한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아픔을 어루만진 적이 없는데 예수님은 그를 만지시고 치료하신 것입니다. 그의 상처 난 마음까지도 치유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시는 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가 더러운 죄인일지라도, 귀신에 들린 사람일지라도, 저주받은 나병환자일지라도, 세상은 그들을 조롱하고 무시하고 고립시키지만, 하나님은 존귀하게 대하시며 그들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예화) 미국 심리학자 ‘앤 그루델’의 어린 시절 이야기입니다. 

나는 나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성장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나는 언청이로 태어났습니다. 

학교에 가게 되었을 때 학교 친구들은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나는 입이 삐뚤어지고, 코가 삐뚤어졌으며, 치열도 고르지 못하고 발음도 정확하지 못한 어린 소녀였습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도록 배웠습니다. 

친구들이 “입술이 왜 그렇게 된 거야?”라고 물으면, 

나는 넘어져 유리 조각에 다쳤다고 대답했습니다.

남과 다르게 태어났다는 것보다 사고가 났다고 하는 편이 견디기가 쉬웠습니다.

 

나는 가족들 외에는 누구도 나를 사랑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내가 2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은 레너드 여사였는데 다들 그녀를 좋아했습니다.

그녀는 키가 작고, 통통하며, 행복하고 활기가 넘치는 부인이었습니다.

 

해마다 우리는 속삭임 검사(The Whisper Test)를 받았습니다.

레너드 여사는 학급의 모든 학생을 하나씩 불러 ‘속삭임 평가’를 했고, 결국 내 차례가 되었습니다.

학생들이 문을 등지고 서서 한쪽 귀를 막고 서 있으면 선생님이 자기 자리에 앉은 채 어떤 문장을 작은 소리로 속삭여 주었고 우리는 그것을 따라 해야만 했습니다.

 

이를테면 “하늘은 파랗다.” 혹은 “넌 새 신을 갖고 있니?”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나도 역시 그곳에 서서 선생님의 속삭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짧은 문장은 하나님께서 그 선생님의 입에 넣어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 전체를 변화시켰습니다.

레너드 여사는 부드럽게 속삭였습니다.

“네가 내 귀여운 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여러분, 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언청이 소녀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사람은 존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렇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신명기 말씀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적군의 여성 포로들이 보입니다. 그 중에 마음에 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여성을 전리품처럼 대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귀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합니다. 

머리를 깍고, 손톱을 깍고, 의복을 갈아입혀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를 위해 애도할 시간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로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내가 전쟁의 여성 포로와 같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아! 내가 전쟁의 포로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악한 세상을 벗하며 살았던 이방인들입니다. 우리를 주관했던 자는 이 세상 공중권세를 잡은 사단입니다. 우리는 사단의 종이었습니다. 우리의 아비가 사단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2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요한복음 8:44 

44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단의 권세를 결박시키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아내로 맞이하셨습니다. 세상의 삶의 방식으로 살았던 우리의 모든 의복을 벗기시기고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의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로마서 13:14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갈라디아서 3:27 

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래서 이제 우리는 마귀의 종이 아닙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죄악 가운데 헤매었던 우리, 삶의 허무 속에서 방황하던 우리, 경쟁사회 속에서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살던 우리, 내가 얼마나 존귀한지 모르며 살던 우리,

주님은 그러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모두가 정죄하는 부끄러운 죄를 지었지만, 너를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하시며 우리를 받아 주셨습니다. 

나병환자처럼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위로하시며 치유하십니다. 

귀신에 얽매여 두려움 가운데 살던 우리에게 자유와 평강을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시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시기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존귀하여 여기시기에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렇게 여러분은 존재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그들을 존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가 어떤 사람일지라도 어떤 상황 속에 있을지라도 존귀한 사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대하고 이웃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신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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