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58. 가정의 질서를 무너뜨리지 말라
신명기 21:15–21
15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16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17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18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오늘 본문은 가정의 질서에 대한 말씀입니다.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15~17절까지 장자의 상속권 문제를 다루고 있고, 두 번째는 18~21절까지 패역한 아들에게 내리는 벌에 대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사랑받고 한 사람은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둘 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미움을 받는 아내가 먼저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어서 사랑하는 아내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런 경우 사랑하는 아내의 아들에게 장자권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먼저 태어난 아들에게 장자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1.일부다처, 중혼의 문제
먼저 우리가 살펴볼 문제는 일부다처 또는 일부이처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언뜻 보면 하나님께서 일부이처를 용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두 아내를 두지 말라’고 하시지 않고 두 아내가 있는 경우를 전제하고 이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일부다처 또는 일부이처제를 용인하신 것일까요?
아브라함의 경우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야곱의 경우 네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이런 부분을 대하면 오늘날 성도들이 당황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먼저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장에서 가정의 질서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한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일부일처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타락합니다. 이후 이 질서는 파괴되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4장에 가면 가인의 자손 라멕이 두명의 아내를 얻습니다.
창세기 4:19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인간이 타락한 이후 일부일처라는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가정의 질서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질서도 파괴됩니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남는 자들은 언제나 강한 자들이었습니다. 힘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강자가 되어 많은 자본을 소유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약자로서 강자들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양심이나 윤리의식 도덕관념도 파괴되어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되었고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만큼 참혹했습니다.
창세기 6장에 가면,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인류가 너무나 타락하여 심판은 불가피했습니다. 그리고 노아와 그의 가족 8명만을 남겨두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인류 역사를 다시 시작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시대에 물로 심판하시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6:5–7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후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창세기 8:21
21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의 마음으로 계획하는 것이 항상 악할뿐이기에 심판하셨는데, 이제는 사람의 마음으로 계획하는 것이 항상 악하기 때문에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이 심판하셔도 그 타락한 본성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노아의 가족이 배에서 나온 후에 농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어 수확한 후 포도주를 만들어 먹고 취합니다. 이때 그의 둘 째 아들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갑니다.
창세기 9:22 (NKRV)
22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이로 인해 함은 아버지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간 것이 뭐 그리 잘못되었기에 저주를 받은 것일까요? 그러나 성경에서 “하체를 보다”라는 말은 “하체를 범하다”는 말입니다. 심각한 성적인 범죄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즉 노아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상대로 심각한 성적 범죄를 행한 것입니다. 비록 노아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물 심판을 면할 수는 있었지만 그들 또한 심각한 죄인들이었음을 성경은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은 그 부패한 본성이 그 어떤 심판이나 그 어떤 인간적인 노력으로도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 본성의 부패를 인정하십니다. 그러면서 허용하시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전에 살펴본 것처럼 육식을 허용하셨습니다. 인간이 무분별하게 짐승을 잡아먹음으로 자연 질서가 심각하게 훼손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짐승을 먹는 것을 허용하셨지만 피채 먹지 말게 하심으로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잘 보시면 하나님이 어떤 것을 허용하실 때는 그 사회가 너무나 부패한 나머지 생명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부이처 또는 일부다처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여성들은 약자였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 스스로를 부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여성들은 아버지, 남자 형제, 남편에게 의존하여 생계와 보호를 받았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은 창녀나 노예가 되곤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남편이 없는 여성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일부다처제를 허용했을 수 있습니다. 확실히 이상적이지는 않지만, 일부다처제의 가정에서 생활하는 것이 매춘, 노예, 또는 굶어 죽는 것보다 나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근거를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한 가지 질문을 고안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간교한 것은, 만일 예수님이 “옳다”라고 하면 예수님의 윤리 인식에 타격을 입히게 됩니다.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면, “그러면 왜 구약성경에 모세는 이혼을 허락했습니까?”라고 하면서 예수를 구약의 율법을 무시하는 자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신명기 2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혼을 허락하십니다.
신명기 24:1–2
1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하나님은 이혼을 허락하시면서 이혼증거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혼하면 안 된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이혼할 수도 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경우 여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어 도저히 결혼생활이 불가능한 경우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이 이혼을 허락하셨으니 마음대로 이혼해도 되는 것입니까?
어렵지요. 바로 이 어려운 질문을 예수님께 한 것입니다. 당시 성경에 능했던 바리새인들조차도 이 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마가복음 10:5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뭐라고 하십니까? 우리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혼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흠을 잡고 계속해서 폭행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혼이 허용되지 않으면 이 여인의 인생은 비참해질 것입니다. 오늘날도 가정폭력으로 고통당하는 여성들이 많지 않습니까? 고대사회는 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왜 허락했다구요? 우리가 너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혼을 허락하시면서 이혼증서를 주게 하셨습니다. 이혼증거가 뭘까요? 합의이혼에 대한 증명서입니다.
이를 통해 남편의 구속으로부터 법적으로 해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남편이 아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이혼증거를 보여 주면서 자신은 더 이상 이 사람의 아내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만나 새출발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혼을 허락하셨으니 마음대로 이혼해도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마10:6-9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사람이 나눌 수도 없고 나눠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혼은 하나님 뜻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완악하기 때문에 여성을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이혼이 허용된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지금도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혼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도움이 됩니다.
가정폭력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이니 계속 살라는 것은 그 인생을 너무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법은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인데, 그 법에 묶여 한 사람의 인생이 비참해진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또 오늘날 ‘성격차이다’ 하면서 이혼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이혼을 허락하셨으니 이혼해도 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의 신성함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부부는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새겨 들어야 합니다.
첫 번째 명제는, 부부는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이기에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명제는, 인간이 너무 완악하기에 부부생활로 그 인생이 비참해질 수 있다면 합의하여 이혼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개의 명제 사이에서 지혜롭게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일부이처, 일부다처제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하나님이 이 제도를 허용하신 것은 고대사회의 사람들이 너무나 악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통해 보호받지 못한 여성들의 삶이 너무나 비참했기 때문에, 능력 있는 남성들로 하여금 여성들이 보호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일부일처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당시의 이러한 문화에서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남편이 없는 여성들의 삶은 가혹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과부들의 삶을 돌봐야 한다고 자주 명하신 것입니다. 룻기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죽고 삶이 망막했던 룻을 위해 시어머니 나오미가 열정을 다해 새남편을 만나게 하지 않습니까?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일부일처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완악함 때문에 여러명의 아내를 두는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허락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고대라는 특수한 상황, 즉 법과 제도로 생명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는 시대에 한정하여 용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가 되어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일부일처제가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가 인류에게 공헌한 것 중의 하나가 일부일처제인 것입니다.
2.가정의 질서를 지켜라
이제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아내가 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사랑을 받고 한 사람은 미움을 받습니다.
미움받는 아내가 먼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랑받은 아내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장자는 첫 번째 태어난 아들 입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 사랑받는 아내의 아들에게로 향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속권도 사랑받는 아내의 아들에게 주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미움받는 아내의 아들일지라도 먼저 낳은 아들이니 상속권이 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가정에 부여한 질서를 개인적 감정으로 인해 무너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부모의 유산이 상속될 때 장자에게 두 배의 몫이 할당되었습니다. 아무리 미움받는 아내의 아들이라고 해도 장자의 권리가 있으니 네 맘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21:17
17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기력의 시작이라는 것은 첫 번째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에 질서를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질서를 부여하셨습니다. 우주에 있는 해달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질서 가운데 운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가정을 창설하실 때도 질서를 부여하셨습니다. 남편이 가정의 머리가 되고, 아내는 돕는 배필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것은 남성이 우월하고 여성이 열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역할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정에 부여하신 질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가 만든 질서도 있습니다. 결혼하여 자녀를 낳게 되면, 첫째 아들이 장자가 됩니다. 우리 사회도 장자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장남에게 소임이 있고 책임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질서이든, 인간이 만든 질서이든 중요한 것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질서는 사람의 상황이나 감정에 의해 변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하나님이 부여하신 질서는 절대로 바뀌거나 타협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만든 질서도 하나님의 부여하신 질서 안에서 제정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악한 본성입니다.
어떠한 일을 내 맘대로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동하고 싶어 합니다. 아무리 법과 질서가 있어도 그 틀을 파괴해서라도 내 마음과 뜻대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항상 파괴적입니다.
자기도 파괴되고 가정도 파괴되고 사회도 파괴됩니다. 왜냐하면 그 결정과 행동이 부패한 자기 마음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파괴적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둘을 한 몸으로 엮으셨습니다. 이것이 가정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을 자기 마음대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게이, 레즈비언, 트렌스젠더 등 다양한 성별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결혼도 동성끼리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가정에 부여한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하고 파괴하려는 시도입니다.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인권이라고 주장합니다.
해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퀴어 축제가 벌어집니다. 서울뿐만 아니라 대구, 부산 등 각 도시에서 퀴어 축제를 합니다. 동성애 축체를 말합니다. 혐오스러운 퍼포먼스와 퍼레이드를 하면서 이것이 인간의 자유이고 인권이라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솔직히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다운가요?
여러분들의 자녀를 데리고 가 이것이 자유이고 인권이라고 교육하실 수 있겠습니까?
성소수자들의 인권이 지켜져야 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엄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오염되고 왜곡된 성을 정상으로 인정하는 것을 잘못된 것입니다.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것도 하나님이 가정에 부여한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이 사회는 가정을 기반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가정이 병들고 해체되면 이 사회의 죄악은 급속도로 확산할 것입니다.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은 작년 10월 6일 마리화나 소지로 유죄판결 받은 사람들에 대해 전면 사면을 단행했습니다. 바이든은 성명서를 통해 “그 어떤 사람도 마리화나를 사용하거나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보내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따라 6,500명이 사면되었습니다. 뉴욕주는 2년 전인 2021년 3월 마리화나를 합법화했습니다. 21세 이상 성인이면 신분증을 가지고 마리화나를 살 수 있습니다.
현재 미국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펜타닐’이라고 하는 마약입니다. 한 알에 6,500원 하는 이 알약에 많은 청소년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최근 6년 동안 21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자살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지난 18일 조선일보는 이 같은 현상을 마리화나 합법화로 인해 마약 둑이 터진 것으로 진단했습니다.
마리화나는 비교적 약한 마약이지만 이를 합법화할 시 마약으로 인한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 사회가 차별금지법이라는 이름으로 동성혼, 동성애를 인정하게 되면 가장 먼저 파괴되는 곳이 가정입니다. 그동안 가정을 지켰던 창조의 질서를 무너뜨림으로 가정이 파괴됩니다.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면 사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나라는 혼란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너희 마음대로 가정의 질서를 파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미움받는 아내의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원칙과 질서대로 상속권이 먼저 태어난 아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뭐 그리 중요해’가 아닙니다. 가정을 떠받치고 있는 한 두 개의 질서의 기둥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가정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두 번째 부분도 동일하게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는 경우입니다. 첫 번째 경우는 남편의 감정 때문에 질서가 무너지는 경우라면, 두 번째 경우는 패역한 자녀 때문에 가정 질서가 무너지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통해 이 땅에 생명을 보내주십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자녀로서 마땅한 것이며 하나님이 부여한 질서입니다. 만일 이러한 부모의 권위와 가정의 질서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모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나 불순종을 엄중한 죄로 여기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경우입니다.
신명기 21:18
18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라고 하는데, 20절에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신명기 21:20
20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우리 말을 듣지 않고 방탕하여 술에 잠긴 자‘
자녀의 패역함을 요약한 단어일 것입니다. 부모가 그를 징계하였지만 이미 부모의 통제를 벗어난 것입니다. 그 분노와 폭력을 부모가 제어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만일 이 아이를 방치하게 되면 가정이 파괴될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피해를 줄 것이 뻔합니다.
이 경우 부모는 패역한 자녀를 끌고 성문으로 가게 됩니다. 성문은 당시 재판을 하는 장소였습니다. 장로들은 성문에게 부모 말의 사실 여부를 판가름합니다. 이때 사실로 밝혀지면 성읍 사람들이 함께 돌로 쳐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위중하게 다뤘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실제로 이러한 심판이 실행된 예는 없습니다. 아무리 자녀가 패역해도 돌에 맞아 죽는 것을 원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실행 불가능한 법처럼 보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것을 명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부모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자녀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패역한 자녀들로 하여금, ”아! 내가 돌에 맞아 죽을 만큼 큰 죄를 지었구나“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부모의 권위를 세워주셨고, 자녀들로 인해 가정의 질서가 파괴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은 어떤가요?
하나님의 질서가 우리 가정 가운데 온전히 흘러가고 있습니다.
행여 내 마음과 뜻대로 가정을 이끌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떠한 원칙과 질서로 가정의 대소사를 결정하고 있습니까?
첫 번째 말씀은 남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시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편의 역할이 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남편뿐만 아니라 아내의 권위나 역할도 크기 때문에 이 말씀을 남편에게만 한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남편으로서 또는 아내로서 우리 가정을 하나님의 질서대로 이끌어 가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과 뜻대로 가정을 이끌고 자녀를 대하지 않았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 말씀은 자녀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나는 자녀로서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행여 과거에 부모의 마음에 못을 박는 일들이 있었다면 돌아 맞아 죽을 만큼 잘못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면서 기도했던 것 중의 하나가 성도들의 가정이 행복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선교하는 교회, 구제하는 교회, 교육하는 교회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가정이 행복해지길 바랐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저는 좋은 아버지가 좋은 성도라고 믿습니다. 좋은 남편이 좋은 성도라고 믿습니다. 좋은 어머니, 좋은 아내가 좋은 성도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가 신앙이 좋아졌다고 했을 때 제 기준은 이것입니다. 아빠로서 이전보다 더욱 좋은 아빠가 되었는가? 남편으로서 이전보다 더욱 좋은 남편이 되었는가? 엄마로서 그리고 아내로서 이전보다 더욱 성숙했는가? 입니다. 여기서 ”좋다“ ”성숙했다“는 기준은 성경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좋은 부모, 성숙한 부부 되었는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교회의 활동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드러나는 우리 모습이 진짜 내 신앙인입니다. 가정이라는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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