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59. 나무에 달린 자
신명기 21:22–23
22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1. 사형제도에 대한 성경적 시각
여러분들은 사형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찬성하시는 분들도 있고, 반대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형제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경은 사형제도를 찬성합니다.
구약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상 숭배자(배교자, 신17:2-7), 무당이나 신접한 자를 찾는 자(출22:18; 레20:6,27), 거룩한 절기를 지키지 않는 자(출12:15; 민9:13), 안식일을 범하는 자(출31:14; 35:2),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레24:11-16), 부모를 저주하고 때리는 자(출21:15-17), 유괴자(출21:16), 계획적인 살인자(출21:12-14), 짐승과 음행하는 자(수간자, 출22:19), 간통을 비롯한 근친상간자(레18:6-29; 20:10; 신22:22-30), 남색자(동성애자, 레20:13) 등입니다.
사형방식은 돌을 던져 죽이는 투석형과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이는 교수형입니다. 일종의 공개처형방식이었습니다.
1_1사형의 목적
1)심판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 죄에 대한 심판하는 것입니다.
2)범죄 예방
죄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 주어 범죄를 예방하려는 차원
3)공동체의 안전을 보호
흉악범의 생명을 박탈시켜 공동체의 안전을 보호하려는 목적 또한 죄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사형을 찬성하는가? 의문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엄한 생명을 사람이 박탈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십계명에서 하나님은 살인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사형을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형집행권을 주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의 생명이 너무나 존엄하므로 이를 파괴하는 그 어떤 행위에 대해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나안땅을 진멸하라는 명령과 같은 이유입니다. 생명의 존엄성을 함부로 파괴했던 가나안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 진멸을 명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일 진멸하지 않고 가나안의 가증한 종교와 타락한 문화를 허용하게 되면 더럽고 추악한 죄가 이스라엘을 물들일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진멸 또는 사형이 시행되지 않는 사회
성경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결과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사기가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두 개의 사건을 소개할 텐데요, 이것을 살펴보는 이유는 사형을 명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지켜지지 않으면 같은 일들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입다
먼저, 입다의 경우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 즉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암몬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서원합니다. 만일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게 하시면 자신을 첫 번째로 맞이하는 사람을 번제로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쟁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가 했던 서원과 그 결과에 주목합니다. 입다는 승리하였고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기뻐 춤을 추며 첫 번째로 맞이한 사람은 그의 무남 독려 딸이었습니다.
과연 입다는 딸을 번제도 드렸을까요? 번제는 제물을 죽이고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신학자 중에는 입다가 딸을 번제로 드리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입다가 했던 서원은 사람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집에서 키우는 개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이며, 비록 딸이 첫 번째를 그를 맞이하여 번제로 드렸지만, 그 의미는 성전의 수종 드는 자로 드린 것이지 죽이고 태워 드리는 번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입다의 딸이 번제로 드려진 후, 해마다 이스라엘 여인들이 애곡하는 기간을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의 수종드는 여인으로 드렸다고 해마다 해마다 애곡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입다는 딸을 번제로 드린 것입니다.
입다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성령이 임재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입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사사기 10:6
6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입다 당시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거의 대부분의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진멸시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못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진멸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사사기 1:27–28
27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28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사사기 1장에서는 이스라엘 각 지파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 또는 “않았다”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쫓아내지 못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쫓아내지 않은 것”은 그들이 자발적 의지와 결정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노역을 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정착민으로 살아본 경험이 없습니다. 농사를 지어본 적도 없고 집을 지어본 적도 없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만나를 먹었고, 출애굽 때 입고 나온 옷과 신발을 신었고, 텐트를 치고 살았습니다. 서로를 비교할 것도 부러워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 보니까 그 화려한 문화에 눈이 휘둥그레진 것입니다. 그들의 옷은 화려했고, 먹는 음식은 다양했으며, 집은 크고 견고했습니다.
부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을 노예로 삼고 그들과 공존하는 길을 택합니다.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농사짓는 것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문화는 종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특히 농경문화와 우상숭배는 직접적으로 연관됩니다. 입다 이야기에서 등장한 바알, 아스다롯 등 여러 신들은 대부분 자연을 주관하는 신입니다. 그 신들을 기쁘게 해야만 한해의 소출이 풍성할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들은 신을 기쁘게 하려고 신전에서 음행했고, 이를 위해 많은 신 전 창기를 두었습니다.
또한 비가 오지 않으면 자기의 자녀들까지도 몰렉 신에게 던져 넣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가나안의 종교와 문화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가나안의 우상을 섬긴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문화를 부러워하고 배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녀들은 화려한 가나안의 여인들에게 매혹되었고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부모들이 이것을 막지 못합니다. 사사 삼손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선택된 나실인으로 태어났지만, 블레셋 여인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부러워하다가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점차 그들의 신까지 섬기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도 동시에 섬겼습니다. 사사기에는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를 버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표현이지 실제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우상도 섬겼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입다가 사사로 등극했을 때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여러 신들을 동시에 섬겼습니다. 물론 하나님도 섬겼습니다. 그 결과 신앙이 혼탁해지기 시작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지, 무엇이 우상을 섬기는 것인지 분별력이 흐려졌습니다.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서원합니다. 그리고 그 서원을 지킵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서원의 대상은 하나님이지만 그의 서원 내용이나 서원을 지키는 모습은 가증한 우상숭배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인신 제사를 받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인신 제사를 서원합니다. 그리고 서원을 지키기 위해 자기 딸을 번제로 드립니다. 마치 가나안 사람들이 몰렉에게 자식을 바치듯이 말입니다. 왜 이러한 일이 생긴 것입니까? 그것도 이스라엘의 지도자에게 말입니다.
그것은 가나안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첩을 얻은 레위인
두 번째 소개할 사건은 사사시대 일어난 엽기적인 사건입니다.
어느 날 이스라엘의 각 대표 앞으로 소포가 하나씩 배달됩니다. 소포를 열어본 대표들은 기겁합니다. 그 속에는 여성의 토막 난 시신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공동체 이스라엘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사건의 경위는 이렇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거류하는 레위인이 첩을 맞이합니다. 레위인이 첩을 맞이했다는 것부터 불길합니다. 어느 날 첩은 남편을 떠나 아버지 집으로 도망칩니다. 우리 성경은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났다”로 번역했지만,
사사기 19:2
2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
원문을 보면 “첩이 혐오감을 느끼고 남편을 떠난다”입니다. 정확히 이 레위인이 어떠했기에 첩이 혐오감을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이후 진행되는 이야기를 통해 그의 추악한 행동이 드러납니다.
그는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장인의 집에 찾아갑니다. 장인은 삼일을 머물고 떠나려 하는 사위를 계속해서 붙잡습니다. 하루 더 있다 가라는 것입니다. 그다음 날에도 또 붙잡습니다. 이 밤을 즐겁게 보내고 다음 날 가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날도 또 붙잡습니다. 왜 장인은 그토록 사위를 붙들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딸을 통해 그 레위인의 학대와 폭력 그리고 추악한 행위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위에게 딸을 맡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장인은 사위 편에 딸을 보내게 됩니다. 아버지는 끝까지 딸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늦은 시각 출발했던 레위인과 첩 그리고 하인은 예루살렘까지 오게 됩니다.
종은 “이곳에서 머물자” 제안하지만 레위인은 “기브아로 가자”고 합니다. 기브아는 베냐민 지파가 거주하는 곳이기에 안전하게 머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기브아에 당도한 그들은 큰 성읍거리에 서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들을 맞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사람들은 거리에 없고 점점 어두워집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레위인 일행은 노숙하기로 결정합니다.
한 노인이 이들을 발견합니다. 노인도 이곳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제안합니다. 절대로 이곳에서 노숙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발을 씻고 편안히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동네의 불량배들인 이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드립니다. 고함을 치며 노인에게 말합니다.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사사기 19:22
22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그와 관계하리라”는 것은 성폭행을 말합니다.
레위인을 대상으로 집단 성폭행, 그것도 동성을 대상으로 집단 성폭행을 자행하려고 동네의 불량배들이 몰려온 것입니다.
노인은 그들에게 자신의 딸과 레위인의 첩이 있으니 그들을 끌어내어 너희 마음대로 하라고 합니다. 노인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레위인을 지키고자 딸과 첩을 내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불량배들이 듣지 않자, 레위인은 자기 첩을 붙잡아 끌어내어 그들에게 줍니다.
사사기 19:25
25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그날 밤 레위인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태연하게 잠자리에 듭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나가보니, 자신의 아내가 문 앞에 엎드려 있고 두 손이 문 지방에 있는 것을 봅니다. “일어나라”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사사기 19:28
28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우리 성경에는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실었다고 번역했는데 원문에 ‘시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녀가 아직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를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것이 우선인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나귀에 싣고 자기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칼을 가지고 와서 시신을 12토막을 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들에게 보냅니다.
이러한 엽기적 사건이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사사기 마지막은 이렇게 마쳐지고 있습니다.
사사기 21:25
25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가나안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이런 끔찍한 사회가 된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고 그분의 말씀 권위를 무시하게 될 때 이러한 비참한 사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형제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우리 사회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생명의 존엄성을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짓밟은 자들을 어떻게 해야 옳은 것입니까?
그들의 생명도 존엄하니 지켜줘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사형을 명하셨습니다. 가증한 죄를 범한 자, 흉악범들을 돌을 던져 사형시키고, 나무에 달려 사형시킴으로 죄짓는 것이 두려워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형제도를 명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사람이 생명이 너무나 존엄하기에 이것을 해치는 것에 대해 엄중하게 다루십니다. 또한 심판을 두려워하게 하심으로 죄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이 가나안의 모든 사람을 진멸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생명이 존엄하지 않아서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만족과 유익을 위해 타인의 존엄성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온갖 가증하고 추악한 일들을 서슴없이 행하기 때문입니다.
입다 이야기와 레위인의 이야기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3. 오늘날 사형제도의 필요성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사형제도가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죄는 무겁습니다.
기독교 내에도 사형제도에 대해 찬반이 나뉩니다.
폐지를 주장하는 분들은
“사형제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고귀한 사람의 생명을 영원히 돌이킬 수 없도록 파멸시키는 하나님의 주권영역을 침범하는 제도일 뿐 아니라,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도 살인자라는 낙인을 찍어 그의 삶은 물론이고 영혼까지도 피폐하게 만드는 가장 저주스러운 제도"이다.”라고 주장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사형이 선고되긴 하지만 집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1997년 12월 30일 사형수 23명에 대한 형을 집행한 후 지금까지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형제도가 폐지되었다고 알고 있는 분이 많습니다. 사형제도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사형폐지 국가로 분류됩니다. 그래서 흉악범들이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아도 비웃습니다.
저는 이러한 흉악범들이 과연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됩니까?
심판받을 때입니다.
죄에 상응하는 심판이 가해졌을 때 자기가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아도 비웃는 것은 실제로 사형집행이 되지 않아서입니다.
사형이 선고되면 6개월 이내 집행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이것이 지켜졌다면 과연 사형이 선고되었을 때 비웃을 수 있을까요?
4. 사형수 가족에 대한 배려
그런데 여러분, 사형제도를 살피면서 우리가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족에 대한 것입니다.
사형수의 가족과 피해자의 가족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언급된 레위인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자기 첩을 열두 토막 내는 아들을 둔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요? 또한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도망갔지만, 결국은 강간을 당하여 죽고 그 시신이 훼손된 딸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요?
우리가 인권, 생명의 존엄성을 말할 때 반드시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가해자 가족과 피해자 가족에 대한 배려입니다.
만일 나의 딸이 그렇게 되었다면 어떻겠습니까?
만일 나의 아들이 레위인이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자식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일단 하나님은 가증한 죄에 대해서는 사형을 명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나무에 달려 죽이는 사형입니다. 목을 매달아 죽이는 사형입니다. 이렇게 사형을 한 후 그 시체를 밤새도록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시체를 가져가 장사하라고 하십니다. 장사하라는 것은 장례를 치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먼저는 오늘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저주 즉 심판받은 자가 계속 나무에 달린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땅을 더럽히는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는 이 번역이 빠졌는데,
22절은 “그리고”로 시작합니다. 즉 앞에 있는 패역한 아들을 돌로 쳐 죽이라는 말씀과 연관하여 이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 경우는 돌에 맞아 죽은 후 나무에 달린 경우이며, 패역한 아들을 사형시킨 경우로 해석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이 경우 처형이 끝났으면 시신을 되도록 빨리 장례 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끝났으니 장례 절차를 진행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사형당한 자녀의 가족을 배려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패역하여 사형당하긴 했지만, 이후 가족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도록 시체를 나무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패역하여 사형에 처한 사람일지라도 그 가족들은 보호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무고하게 죽은 자의 가족을 배려하라는 말씀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어디에서 보았습니까? 사사기 21장 1절부터 9절까지입니다.
무고하게 살해당한 자를 위해 시신과 가장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과 레위인들이 모여 속죄의식을 치루게 하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신 것입니까? 피해자의 가족을 위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이런 과정이 없이 넘어가게 되면 그 가족들이 받을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피해자 가족의 고통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사형에 처한 사람은 가해자입니다. 그 죄는 심각하여서 심판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심판받았다면 끝난 것입니다.
심판으로 끝난 것입니다.
가해자의 가족에게 더 이상의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형은 죄의 심판을 종결시킵니다.
4. 사형에 대한 구원사적 의미
신약성경에서 두 사도는 본문 말씀을 인용하여 구원의 중요한 진리를 설명합니다.
먼저 바울입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성도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면서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갈라디아서 3:13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여기서 속량이라는 단어는 시장용어입니다. 노예 시장에서 돈을 주고 노예를 사서 자유인으로 해방할 때 치루는 값을 속량 또는 속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죄의 노예, 사단의 노예였던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 값을 치르셨다는 것입니다.
그 값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저주는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결국 받을 형벌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인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대신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받으셨습니까? 십자가 처형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가 치를 심판은 없습니다.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께서 나무에 달려 저주받는 심판으로 우리 죄에 심판은 끝났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베드로전서 2:24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바울이나 베드로나 십자가라고 말하지 않고 나무라고 말한 것은 신명기 말씀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저주이고 심판입니다. 그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되면 더 이상 죄에 관해 물을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은 끝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심판받으셨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 죄에 대하여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또 앞으로 지을 죗값까지도 단번에 치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이것은 “완전히 만족되었다 또는 완전히 지불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죗값을 치름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킨 것입니다.
우리의 죗값을 십자가 심판으로 완전히 지불한 것입니다.
로마서 8:1–2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무리 혐오스럽고 비참한 죄인도 나무에 달려 심판을 받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더 이상 죄에 관하여 물을 수 없습니다. “테텔로스타이”,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더 이상 무엇을 보탤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죗값을 완전히 지불하셨습니다.
예화)설교를 준비하면서 자료를 찾던 중 박효진 장로님이 사형제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있어 보았습니다.
박효진 장로님은 서울구치소 경비교도 대대장, 청송교도소를 거쳐 현재는 소망교도소 부소장으로 재임 중이며, 청송감호소와 서울구치소 수인들의 놀라운 회심과 변화를 담아낸 간증집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 <하나님은 아무도 포기하지 않는다> 등을 펴낸 바 있습니다.
일단 사형제도를 찬성하신다고 하시면서, 한 편지를 소개하셨습니다.
사형수가 보내온 편지입니다.
“장로님 내가 꿈을 꾸었습니다.
작년 봄 독방에 있을 때에 예수님이 제 손을 붙드시고 사형장으로 데리고 가시더니 제 목에 밧줄을 거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밧줄에 걸리시고 제 대신 교수형에 처하시는 생생한 꿈을 꾸고 제가 너무나 놀라와 충격을 먹고 긴시간 동안 기도하다가 깨달아지는 것이
얼마 전, 제가 신장과 눈을 기증하겠다고 했는데 이제는 신장과 눈뿐이 아니고 제 몸도 다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그렇게 신청을 해놓았습니다. 어둠에 있는 형제들에게 빛과 고통에 있는 형제들에게 생명을 그리고 의학의 발전에 적은 보탬이 될까 하고 제 모든 것들을 다 바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 장기와 몸과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오니 기쁘게 받으시고 주님의 도구로 마지막 이 땅을 떠날 때까지 귀하게 사용하여 주시고 주님의 영광 가운데 저를 불러 주십시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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