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3-06-06 15:16

63.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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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강해 63.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 

 

신명기 23:1–8 

1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2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 대에 이르기까지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3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4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5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6네 평생에 그들의 평안함과 형통함을 영원히 구하지 말지니라 

7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8그들의 삼 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

 

본문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세 가지 경우입니다.

1)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입니다. 

2)사생자입니다. 

3)암몬과 모압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서 총회에 들어 올 수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에돔 사람과 애굽 사람입니다. 7절입니다. 

 

이렇듯 본문은 여호와의 총회에 배제되는 사람과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배제되는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가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입니다. 생식기관이 불완전한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총회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는 선천적일 수도 있고 후천적일 수도 있습니다. 후천적인 것은 우상 숭배적 예배, 아마도 이쉬타르 여신에 대한 우상 숭배적 예배의 목적으로 행해진 자해적 상해였을 것입니다. 

 

두 번째 경우는 사생자입니다. 이들은 금지된 결혼 관계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근친상간으로 인해 태어났거나 신천 매춘으로 인해 태어난 경우입니다. 십 대에 이르도록 총회에서 배제되었는데 이는 영원히 배제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경우는 암몬과 모압 사람들입니다. 이들도 여호와의 총회에서 배제되었는데 그 이유를 4,5절에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 이들 지역을 평화롭게 통과하려고 할 때 무력으로 침략해 왔습니다. 또한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을 때 모압왕 발락이 발람을 불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저주가 아닌 축복을 하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을 영접하지 않거나, 저주하려 했던 죄를 물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문이 듭니다. 

태생적으로 생식기관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가? 

또한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자녀들은 무슨 죄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영접하지 않은 것은 당시 암몬 왕을 비롯한 지도자들의 결정이었는데 그 백성 전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인가?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한 일은 모압왕 발락이 주도한 일인데 모압 사람 전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에 언급된 여호와의 총회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1)여호와의 총회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총회는 원어로 “카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아래에서 하나님의 법을 받을 때 그들을 여호와의 총회, “카할”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공동체를 “카할” 즉 여호와의 총회라고 불렀습니다. 

신약성경은 이 “카할”이라는 단어를 “에클레시아”로 번역했습니다. 에클레시야는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총회, “카할”은 구약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여호와의 총회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2)여호와의 총회는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장로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민수기 16:3

3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고핫의 자손과 연대한 무리들이 파당 지어 모세와 아론의 리더쉽에 문제를 제기했을 때, 모세는 너희가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 전에 있는 이런 말씀이 등장합니다. 

민수기 16:2 

2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총회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총회

여호와의 총회

민수기 16:2 

2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민수기 16:3

3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이스라엘 자손의 총회와 여호와의 총회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총회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의미하고 여호와의 총회는 모세와 아론을 비롯한 지도그룹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총회라고 할 때는 이스라엘의 총회를 이끄는 장로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명기 23장에서 나온 여호와의 총회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스라엘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 구약 교회를 의미할까요? 아니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장로그룹, 교회 지도자를 의미할까요? 

장로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일, 신명기 23장의 여호와의 총회를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 구약교회로 해석을 하면, 여러 가지 난제에 부딪힙니다. 선천적으로 생식기관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과연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가? 사생자로 태어난 자들은 무슨 죄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가? 모압과 암몬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 56:3–7

3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4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5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6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방인라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고자일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잡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하십니다. 

또한 여러분, 룻을 아실 것입니다. 룻은 어디 출신입니까? 모압입니다. 룻은 모압여인이예요. 

그녀가 남편이 죽고 후에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지 않습니까? 그가 오벳입니다. 오벳이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을 통해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육신의 혈통으로 하면 모압사람입니다. 

 

만일 여호와의 총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해석하면 이 모든 경우를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신명기 23장에 언급된 여호와의 총회는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장로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지도자를 세움에 있어 어떠한 원칙을 주시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투표를 통해 나라의 지도자를 세울 때, 또는 여러분이 속한 어떤 모임의 지도자를 세울 때,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를 세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23장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깨닫게 되는 지도자의 자격은, 

첫 번째는 가정이 건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식기관에 문제가 있는 경우는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결혼할 수 없고 또 자녀를 낳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하지 않고 자녀가 없는 경우, 공동체를 이끌어 갈 때 여러 가지 어려움과 한계가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생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사생자는 근친상간이나 신전 창기가 낳은 아이를 말합니다. 이럴 경우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한계가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신실한 믿음의 사람일지라도 그들의 가르침과 교훈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구약교회의 지도자의 자격을 언급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요건을 건강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신약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감독의 직분을 말하면서(오늘날의 목사입니다) 그 자격을 이렇게 언급합니다. 

디모데전서 3:2–5

2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4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5(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여기에 보면,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목사가 되려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교 목사가 되려면 결혼해야 합니다. 결혼하지 않으면 목사 안수를 주지 않습니다. 간혹 목사 안수를 주기는 하지만 결혼할 것을 약속받고 줍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해도 이 축복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의 경우, 사제들을 결혼하지 않습니다. 이는 AD386년 성 시치리오. 교황이 지시했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은 성경의 권위보다 교황의 권위가 위에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따르기보다 교황의 지시를 따라 결혼하지 않습니다. 독신을 명한 이유는 주의 일에 헌신하는 자들이 온몸과 마음을 바쳐 하나님을 섬기고 신자들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결혼생활과 자녀 양육에 매이게 되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지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감독 즉 목사는 반드시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3:5 (NKRV)

5(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가정을 돌볼 줄 아는 사람만이 교회를 돌볼 줄 안다는 것입니다. 

모든 지도력은 가정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제가 자주 강조하지만, 좋은 아빠가 좋은 목사가 되고, 좋은 장로가 되고 좋은 집사가 됩니다. 좋은 남편이 좋은 목사가 되고, 좋은 장로가 되고 좋은 집사가 됩니다. 좋은 엄마가 좋은 권사가 되고 좋은 집사가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가정에서부터 출발하고 가정에서 보여지는 모습이 진짜 내 신앙입니다. 

 

디모데전서 3:12 

12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초대교회에서 집사는 교회 사역을 위해 세운 리더들이었습니다. 

한 공동체를 책임지는 리더들은 반드시 가정이 있어야 하고, 또 가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전에 분당에서 부목사로 교구 사역을 할 때입니다. 여전도사님과 팀을 이뤄 교구 목회를 했습니다. 한번은 구역장님 한 분이 만나자고 해서 전도사님과 함께 갔습니다. 참 신실한 집사님이셨어요. 그런데 남편 때문에 속 썩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남편이 상속받은 재산이 많은데 다 까먹은 거예요. 그동안 부모 재산으로 살다 보니 돈이 없는데도 일을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집사님이 수학 과외를 해서 자녀들 대학 공부까지 시켰어요. 그런 속상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한참 이야기를 듣다가 옆에 있는 전도사님이 대뜸 그러시는 거예요. 

”이혼해“ 그 말에 제가 너무 당황했고, 그 집사님도 당황하셨습니다. 

집사님이 남편 때문에 이렇게 힘드니 기도해 달라는 이야기였거든요. 그런데 ”이혼해“라는 말이 사역자의 입에서 쉽게 나오니 당황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때 제가 30대 중반이었고, 그 전도사님은 50대 중반이었어요.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했어요.

그 여자 전도사님이 이혼하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이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건강하게 이끌어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희생해야 하고 포기해야 합니다. 

속 썩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래도 참고 살잖아요. 왜 그렇습니까? 가정을 깰 수 없으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상대방을 바꿔보려고 잔소리도 하고, 싸우기도 하지만 바뀌나요? 지긋지긋하게 안 바뀌어요. 어떻게 합니까? 참고 살아야 해요. 그러면서 성숙해져요. 성숙해지면, 허물을 이해하고 덮어주려고 합니다. 연약함이 있다면 기도해 줍니다.

 

이러한 원리가 교회 공동체에 똑같이 적용됩니다. 가정에서 희생과 포기를 배운 리더들은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고 포기할 줄 알아요. 어려움이 있어도 참아요. 책임의 자리에서 도망가지 않습니다. 다 가정에서 배우고 훈련한 것입니다. 

 

저희 가정이 교회를 개척할 때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어요. 당신과 내가 이렇게 행복한데, 우리 주변에 누군가 더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교회를 시작한 거예요. 

결혼한 지 20년 되었어요.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있었어요. 그러한 순간들을 극복해 가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우리 둘만 흔들리지 않으면 되는구나. 아무리 어려운 순간일지라도 부부가 한마음이 되면 못할 게 없구나를 깨달았어요. 

 

최근 들어 부쩍 제 아내가 성경을 많이 봅니다. 제가 힘들어 보이니까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고 저에게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소파에 누워 있으면 계속 말씀을 전해요. 차를 타고 가다가도 저에게 말씀을 전해요. 그러면서 저도 힘을 얻는 것 같아요. 

 

여러분, 먼저 자기 가정이 건강해야 합니다. 가정을 건강하게 이끌어 사람이 교회를 건강하게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예전에 부흥회 때 미국에서 오신 목사님께서 해주신 말씀인데 제가 몇 번 소개한 것 같아요. 친한 목사님이 목회를 참 잘하셨데요. 많은 분께 존경받던 분이셨답니다. 한참 교회가 부흥하고 예배당을 크게 짖고 헌당까지 하셨는데 사모님이 암에 걸리신 것입니다. 이제 한참 헌당한 예배당을 중심으로 사역을 펼쳐나가야 할 시점이었답니다. 목사님께서 당회를 소집하시고, 목회를 그만두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당연히 장로님들이 말렸습니다. “성도님들이 목사님을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하는데  목사님 그만 두시면 안됩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데요. 

”장로님, 세상에 훌륭한 목사님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제 아내에게 남편은 저 하나입니다. 제가 아내를 돌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당시 제가 부목사로 사역했던 교회는 가정을 내려놓아야 할 정도로 사역이 고되고 바빴습니다. 그 교회는 사역자가 가정을 돌보는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겼어요. 동료 목사님이 아기가 태어났는데 심방 때문에 병원에 가지도 못했어요. 그리고 그런 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분위기 였어요. 제 아내가 우울증에 공황장애까지 왔어요. 그런 중에 그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그해 교회를 그만두었습니다,

 

목사는 카톨릭의 사제와 다릅니다. 가정이 있어요. 가정을 책임지는 남편이고 아빠입니다. 그 가정을 잘 다스릴 때 교회의 사역도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전도사님이 저에게 사역 때문에 혼난 적은 거의 없어요. 사역은 경험이 없었으니까 배워나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주로 혼났던 게 남편 역할 제대로 하라는 것이었어요. 아빠 노릇은 잘하는데 남편 노릇은 잘하지 못해요. 지금은 잔소리 잘 안 합니다만 전에는 자주 했어요. 

 

전에 어떤 분이 사역자의 길을 가고 싶다고 상담하러 온 일이 있었어요.

제가 물어보았어요. 남편과의 관계가 어떠세요. 좋지 않데요. 그래서 그런 말씀 드렸어요.

남편과 한 마음이 되어야만 사역의 길을 갈 수 있어요. 먼저 그 일에 힘쓰셨으면 좋겠어요. 

성경은 지도자의 조건을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 원칙은 교회 공동체에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 ] 유교 경전인 <대학>에 나오는 말이잖아요.

수신/몸이 닦여진 후에 

제가/집안이 가지런해지고 

치국/그 후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평천하/그 다음에 천하가 화평해진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가족을 돌보지 않는 것을 악한 것으로 봅니다. 

디모데전서 5:8 (NKRV)

8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우리교회 성도들은 가족이 먼저여야 합니다. 아무리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가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하지 마세요. 결국 여러분 곁에 남을 사람은 가족밖에 없어요. 그러니 여러분! 가족을 위해 사십시오. 그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그 일을 잘 감당할 때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는 자는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영접하지 않고 저주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의 자리에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 자녀를 잘 대해주면 그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우리 자녀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잘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예요. 

하나님의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그의 백성을 축복하는 자들이 지도자가 되길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저주하는 자들은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실 때 이렇게 말씀하세요.

창세기 12:3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세기 15장에 가면 아브라함이 북방에서 쳐들어온 연합군으로 인해 사로잡혀간 롯을 구출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해서 쳐들어가 승리하고 돌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소돔왕과 살렘왕이 맞이하는데 상반된 반응입니다. 

소돔 왕은 전리품은 당신이 갖고 사람들은 나에게 주시오 라고 말합니다. 

반면 살렘 왕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천지의 주재, 가장 높으신 하나님,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아브라함은 죽음을 무릅쓰고 소돔 왕이 빼앗긴 전리품과 사람들을 구출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축복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적인 태도로 전리품은 네가 갖고 사람은 네게 돌려 보내라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화가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14:22–23

22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가장 높으신 주 하나님께, 나의 손을 들어서 맹세합니다. 

23그대의 것은 실오라기 하나나 신발 끈 하나라도 가지지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 덕분에 아브람이 부자가 되었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후 소돔 성은 멸망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축복한 살렘 왕 멜기세댁은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의 예표로 소개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그의 백성을 축복하는 자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지려고 할 때 중요한 자격은 주의 백성을 축복하는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비난과 비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 목사와 성도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비난하는 사람이 아니라 축복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을 축복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6:28 (NKRV)

28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에게는 저주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저주하는 자를 오히려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로마서 12:14 

14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저주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34 

34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그러니 여러분,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도리어 축복을 빌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이 성숙해지고 인격이 깊어지면 할 수 있습니다. 

싸우는 이유는 수준에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많은 쪽에서 인격이 성숙한 쪽에서 항상 집니다.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깁니다. 

 

성숙한 사람은 비난하지 않아요. 비판하지 않아요. 오히려 복을 빌어주고 기도해 줍니다. 

저는 우리가 그런 자리까지 나갔으면 좋겠어요.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말씀처럼, 가정을 잘 돌보시고, 또 사람을 축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지금은 비록 미숙하고 어리석지만 그런 사람으로 세워지도록 기도하고 성장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신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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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81.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영상보기 새창 joywoori 신명기 26:16-19 202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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