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3-06-20 12:28

65. 도망친 종을 형제로 대하라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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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강해 65. 도망친 종을 형제로 대하라

 

신명기 23:15–16

15종이 그의 주인을 피하여 네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의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 

16그가 네 성읍 중에서 원하는 곳을 택하는 대로 너와 함께 네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지니라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가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에는 하나님의 뜻과 성품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시대나 처한 환경을 초월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되는 내용은 우리 시대와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법을 배우는 목적은 이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성품이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도망친 노예에 대한 처우는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법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발견한다면 오늘날 다양한 삶의 상황에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은 종이 주인을 피하여 도망친 경우입니다. 그를 주인에게 돌려보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가 원하는 성읍을 택하여 함께 거주하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당시의 노예제도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노예’ 하면 미국이나 영국의 흑인 노예를 떠올립니다. 전혀 자유가 없고 인권이 없고 착취와 비참한 삶 등이 우리가 가진 이미지입니다. 

고대 근동의 노예들은 조금 달랐습니다. 노예라도 해서 다 같은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노예도 계급이 있었습니다. 비교적 자유가 보장되고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노예가 있었고, 짐승처럼 부려 먹는 노예들도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노예들의 경우 비교적 안락하고 자유로워 보입니다. 

착취와 억압당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자녀가 없자 자신의 상속자를 다메섹 엘리에셀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창세기 15:2

2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다메섹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종, 즉 노예입니다. 자기 노예를 상속자로 세울 만큼 주인과 종의 관계가 친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후에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으러 보낼 때 엘리에셀을 보내며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24:2 

2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모든 소유를 맡아 주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노예 신분이었지만, 아브라함과 가족처럼 지냈던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 형들에게 팔려 애굽의 경호대장 보디발 집에 노예가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9:4 

4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신분은 노예였지만 가정의 총무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 볼 때 당시 주인과 노예는 우리가 생각하는 영화 “뿌리”의 흑인 노예와는 많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노예들도 계급이 있었고,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도 달랐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종이 도망친 경우입니다. 그 이유를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주인의 폭력이나 학대 때문일 것입니다. 이 경우 종을 돌려보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도망친 종은 그 이유를 불문하고 주인에게 돌려보냈고, 대부분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주전 1750년 고대 바벨론제국의 함무라비 왕 때의 성문법입니다. 이 법전에

따르면 도망친 종을 반드시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은신처를 제공하는 사람도 사형에 처했습니다. 또한 도망친 종을 발견하거나 고발하면 상급을 주도록 규정했습니다. 이것이 고대근동 사회에서 도망친 종에 관한 일반적인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를 보호해 주고, 그가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사회의 일반적 상식과 보편적 인식을 완전히 뒤집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이 말씀을 읽고 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도망친 종을 형제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첫 번째로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뜻은, 계급사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인과 종으로 나뉜 계급 사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계급이 없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00년 전만 해도 양반과 상놈이 존재했습니다. 기독교가 들어오고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졌습니다. 계급은 사라졌지만, 계급 인식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최근 사회학자들은 오늘의 한국 사회를 신계급사회로 규정합니다. 부모 재산에 따라 경제적 지위가 금·은·동. 흙수저로 결정된다는 수저계급론은 씁쓸하지만 현실입니다.

 

광주 과학기술원 김희삼 교수는 수저계급론의 사실 여부를 추적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1970-1980년에 태어난 자녀들 경우 계층의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다고 말합니다. 비록 가난하게 태어났어도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일하면 잘 잘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자녀들의 경우 계층의 대물림 현상이 확고해졌다는 것입니다. 부가 대물림 되고 가난도 대물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일해도 부모의 재력을 물려받지 않으면 잘살기 힘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 가운데는 여전히 사람을 계급으로 평가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계급적 인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을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학력, 직업, 직위, 사는 곳 등으로 평가하고 대합니다. 

계급 인식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타인과 비교하며 만족함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야 하니 삶이 분주합니다. 여유가 없어요. 쉬지 못합니다. 그래서 불행합니다. 

 

이러한 계급 사회 그리고 계급 인식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합니다. 비록 사회가 그렇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믿습니다.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은 계급 사회였습니다. 이 질서를 흔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계급 질서와 체계를 조금이라도 흔들면 죽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이 도망가면 죽인 것입니다. 당시 종은 주인의 재산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을 할 줄 아는 짐승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소나 나귀가 도망치면 잡아다가 가둘 것입니다. 죽이지는 않습니다. 자기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종들은 죽였을까요? 

일종의 본보기로 죽인 것입니다. 

“종들아, 봐라. 만일 너희가 도망가면 이렇게 붙잡혀 죽게 될 것이라” 비록 재산에 손해가 되겠지만, 이렇게 함으로 계급 질서와 체계를 확고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금하셨습니다. 

도망친 종을 주인에게 돌려보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를 보호하고 그가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있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노예로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가 담겼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계급 질서를 허용하시지만, 계급 인식은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기에 이 사회가 계급구조가 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십니다. 불평등과 차별은 예수님이 재림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불평등한 사회는 지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시고 또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은 계급 사회를 타파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혁명을 통해, 계급투쟁을 통해 이러한 사회를 뒤집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해서 권력은 잡은들 그들 또한 부패할 것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역사 가운데 투쟁을 통해 사회 개혁을 시도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죽었습니다. 

 

저는 대학에 올라가서 선배들로부터 사회를 계급구조로 보는 것에 대해 배웠습니다. 사회를 자본가와 노동자로 구분하고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착취하여 부를 축복하는 자들이고, 이에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자유와 평등을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주입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대학가에서 불렀던 노래들이 이런 것입니다. 

“어떤 놈은 1억짜리 자가용 타고 한강다리 차가 막혀 쩔쩔맬 때에

우리는야 5억짜리 지하철 타고 손 흔들며 건너간단다

가진 것 없고 못 배웠어도 노동 속에 사랑을 찾아

지난날의 모든 사슬 끊고 나서는 노동자다 내가 왕이다”

 

친구가 압구정동에 살았는데 지하철 타고 한강 다리를 건널 때마다 이 노래가 생각났어요.

그때 제 마음에는 분노가 있었습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노동자를 착취하여 부를 누리고 있구나.’ 

대학에서도 교수들은 자기 밥그릇을 위해 학생들을 이용하는 자들로 보였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들은 종교 권력을 가지고 성도들의 헌금을 강요하고 자기 사욕을 챙기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계급투쟁 교육이 이렇게 무섭게 제 머리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선하고 착한 분들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이러한 계급 인식은 사단으로부터 나온 생각입니다. 사단은 사람을 계급으로 보게끔 합니다. 모든 관계는 갑과 을의 관계입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만 존재합니다.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눕니다.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도 그렇게 보게 만듭니다. 더 나아가 가정까지도 계급적 인식으로 보게 만듭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만듭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게 합니다. 분연히 일어나 투쟁하여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까운 분 가운데 연락이 없어 전화했더니 그동안 너무나 힘든 일이 있었다며 이야기를 꺼냅니다. 세 아이를 키우는데 그중에 둘이 ADHD입니다. ADHD는 충동성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과잉행동을 합니다. 그러니 부모가 얼마나 키우기 힘들었을까요?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고 화를 참지 못해 때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루는 경찰이 들이닥친 것입니다. 가정폭력으로 아이가 신고한 것입니다. 경찰 조사를 받았고 처벌로 상담소에서 100시간 강의를 들어야 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부모는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앞으로 아이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 망막해 했습니다. 그 가정은 여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서운 사회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부모가 때리면 신고하라고 가르칩니다. 자녀가 부모를 신고하면 처벌받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 양육을 포기하는 지경이 된 것입니다. 사랑과 기쁨과 안식이 있어야 할 가정이 투쟁의 장이 된 것입니다. 

 

사단은 더욱 교묘하게 계급 인식을 우리 생각에 집어넣습니다. 각종 매스컴과 언론 문화의 영역을 장악하여 계급 인식을 심어주고 투쟁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부모와 자녀 그리고 부부 사이까지도 말입니다. 대부분 분별력이 없어 흔들리고 넘어집니다. 

최근 TV를 보면 이혼한 연예인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마치 이혼을 자유를 향한 투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남편의 구속과 자녀 양육의 책임으로부터 해방된 것으로 그립니다. 졸혼이라는 말이 마치 자유와 행복을 향한 용기로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여러분들이 속아서는 안 됩니다. 

 

사단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하나 됨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사랑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직장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가정에 대하여 분노하고, 험담하고, 싸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계급 인식을 버리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사람을 계급으로 구분하고 판단하는 것을 버리셔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일관성이 없다면 계급 인식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학벌이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을 대할 때 일관성이 없다면 계급 인식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할 때 일관성이 없다면 계급 인식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서양사람과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자세가 일관성이 없다면 계급 인식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이 많은 사람과 어린 사람을 대할 때 일관성이 없다면 계급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동안 사단에게 속았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창조한 존귀한 인격으로 바라보는 시야를 키우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도망친 종을 보호하라고 하십니다. 그를 종으로 보지 말고 형제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계급 질서는 어쩔 수 없지만, 계급 인식을 버리고 형제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주종관계의 사회 구조가 어쩔 수는 없지만, 너희는 그를 형제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신명기의 다른 곳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종, 노예를 7년째에 해방하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15:12–14

12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13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14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주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내 소유의 종을 7년째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노예처럼 대할 수 있겠습니까? 7년 후면 종이 아니라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빈손으로 가게 해서는 안되고 후히 주어 보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6년 동안 그가 독립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급 질서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속에 사랑이 있고 섬김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볼까요?

신명기 15:16–18

16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17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구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그같이 할지니라 

 

종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7년째는 자유하게 되는데 주인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한 가족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떠나기 싫은 것입니다. 주인은 종이 독립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주었는데 종은 주인 곁에 있고 싶은 것입니다. 이럴 경우, 송곳으로 종의 귀를 뚫으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주변에서 사람들이 왜 당신은 종을 해방시키지 않습니까?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인을 사랑하여 주인과 함께 사는 종입니다 라는 표시를 몸에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닙니다. 

계급 질서는 있지만 계급 의식이 없습니다. 서로의 관계는 사랑과 섬김의 관계인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주인이든 종이든 그 신분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분을 초월하여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주인이 너무 좋아서 평생을 종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종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그가 잘되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계급 투쟁을 말하는 사단의 속삭임과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고린도전서 7:20–24 

20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주인이든 종이든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신분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8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종이나 자유인이나, 사장이나 종업원이나, 자본가나 노동자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입니다. 형제와 자매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인은 종을 자기 소유로 여겨 마음대로 하면 안됩니다. 종은 주인을 형제로 잘 섬겨야 섬겨야 합니다. 

골로새서 4:1 (NKRV)

1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에베소서 6:5–9

5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종들아 상전들을 기쁘게 섬기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다구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상전들아 종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11 

11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차별이 없다고 하십니다. 

 

오네시모는 신약성경 빌레몬서의 수신자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그가 주인 빌레몬의 물건을 훔쳐 로마로 도주했다가 당시 옥중에 있던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회심한 후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어떻게 주인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인이나 종이나 한 형제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빌레몬서 10–18 

10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5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비록 빌레몬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친 종이었지만 바울은 그를 형제로 대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존귀한 형제로 대했습니다. 오네시모는 복음을 듣고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깨닫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종의 신분이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존귀한 자녀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다시 빌레몬의 집에 종으로 돌아가지만 신분이 더 이상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 중요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바울에게 이 말씀도 들었을 것입니다.

 

골로새서 3:22–24 (NKRV)

22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내가 흙수저로 태어났든, 금수저로 태어났든, 상관없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주어진 각자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섬깁니다. 비록 신분과 직급이 다르지만, 그것이 우리를 주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한때 고지론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서 높은 고지를 점령하여 선한 영향력을 끼치자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자리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처한 곳이 어디든 그곳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리로 평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충성으로 평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자리가 어디이든 간에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충성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신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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