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3-07-25 13:58

70, 성경적 이혼관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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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강해 70. 성경적 이혼관

 

신명기 24:1–4 (NKRV)

1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오늘 본문은 신명기 강해 58번째 시간에 “가정의 질서를 무너뜨리지 말라” 편에서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 본문을 언급하면서 이혼에 대해 성경에서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넘기려고 하다가 좀 더 깊이 본문을 다루는 것이 좋겠다 생각되어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혼”이라는 주제는 교회에서 매우 예민한 문제입니다. 사회적으로 이혼율이 증가하고 있고 여기에는 성도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혼한 가정도 많고 이혼을 고민하는 가정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이 주제로 설교를 하게 되면 낙심하거나 상처를 입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혼에 대해 말하고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해 성경적으로 정립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이혼을 허용하십니다. 

신명기 24:1

1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이혼을 허용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 경우는 수치되는 일입니다. 여기서 수치되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간음의 경우는 아닙니다. 만일 간음하였을 경우 신명기 22:22 절에 언급된 것처럼 사형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아내에게 수치된 일이 있고 그를 기뻐하지 않으면 이혼이 허락되었습니다. 

비록 수치되는 일이 간음은 아니지만, 결혼생활을 지속하지 못할 만큼 심각한 문제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이혼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약성경 어떨까요?

하나님께서는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고린도전서 7:15

15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 쪽에서 헤어지려고 하면, 헤어져도 됩니다. 믿는 형제나 자매가 이런 일에 얽매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평화롭게 살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불신자와 결혼을 한 경우를 두고 한 말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 쪽에서 헤어지려고 하면 헤어져도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이혼이 허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혼하는 것이 무조건 죄고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러한 말씀이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혼이 쉽게 허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경우에는 이혼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인 신명기24장의 경우는 이혼사유가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불신자와 결혼한 경우입니다. 불신결혼이 이혼사유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에 지장을 주고 결국 신앙의 길에서 떠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인데 불신자와 결혼함으로 예배의 삶을 살지 못할 경우 이혼이 허용된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불신자와 결혼했어도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말씀 뒤에 따라온 것입니다. 비록 불신 남편, 아내라 할지라도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너와 함께 살고자 하면 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너의 아름다운 신앙의 삶을 보고 회심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의 신앙생활을 계속해서 방해하고 이를 싫어하여 이혼을 요구하면 헤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생활이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린도전서에서 이혼이 허용된 경우는 불신 배우자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반대하여 이혼을 요구한 경우입니다. 내가 먼저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불신 배우자가 먼저 요구한 경우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당신 하나님 계속 믿을 거야? 그럼 나 당신하고 같이 살 수 없어”라고 할 때 이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있어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신명기에서의 이혼사유가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내의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하고 있고 이것에 대해서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도 유대 학파 가운데 이것을 두고 논쟁이 있었습니다. 

샴마이 학파의 경우, 수치스러운 일을 간음과 같은 불륜관계로 이해했습니다. 

힐렐학파는 여성이 음식을 태우거나 싱겁게 하는 것, 접시를 깨는 것, 애정이 식음으로 매력이 떨어지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명기서를 통해 이미 살펴본 것처럼, 간음하였으면 간음한 남성과 여성 모두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따라서 간음한 경우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힐렐 학파처럼 사소한 것으로 인해 이혼할 수 있다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에 담긴 배경과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보시면 이 말씀은 남성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당시는 남성 중심의 사회였습니다. 여성들은 항상 약자였습니다.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였습니다. 남성들에게 의존되어 있었습니다. 결혼 또한 본인의 의사로 한 것이 아니라 부모의 결정이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할아버지 할머니 시대까지 그랬습니다. 

 

여성들의 인권이 존중받지 못한 시대에서 여성이 먼저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혼 즉시 경제적 어려움에 부닥치게 됩니다. 지금처럼 스스로를 부양하여 살아갈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이혼 후에 부모님이 받아 준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여성은 노예로 팔려 가거나 남성들에 의해 성적착취를 당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지금처럼 치안이 좋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성들은 남편의 폭언과 폭력에 시달려도 참고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하나님께서는 남성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와 살다가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합니다.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판단을 누가 하고 있습니까? 남편이 합니다. 무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일 중요했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남편이 판단하기를 이것은 수치스럽다고 판단했고 이로 말미암아 아내가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은 뭐라고 표현합니까? 24절에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 또한 남편의 주관적 판단입니다. 

 

이럴 때 고대 남성들은 대부분 여성을 쫓아냈습니다. 아내를 버렸습니다. 그러면 아내들은 버림받지 않기 위해 온갖 시종을 다 들어야 했고, 노예처럼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부모에게 경제적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수치를 안겨주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버림받지 않기 위해 지옥 같은 삶을 참고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내를 내쫓는 이유가 되는 일곱가지 사항으로 조선시대 유교사상에서 나온 제도입니다. ①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는 것, ②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 ③ 부정한 행위, ④ 질투, ⑤ 나병·간질 등의 유전병, ⑥ 말이 많은 것, ⑦ 훔치는 것

아내가 이 중 하나에 해당하면 수치로 여겼습니다. 당시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가장 도움이 필요한 경우들 아닙니까? 아들을 낳지 못하고, 병에 걸렸으면 남편이 더 잘 잘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이것을 악으로 수치로 여겨 내쫓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하나님께서는 남성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수치스럽게 보이더냐? 그래서 사랑스럽지 않더냐? 그러면 이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이혼증서를 써서 아내 손에 쥐여주라고 하십니다. 수치스런 일에 대해서는 구체적이지 않은데 이혼 과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십니다. 꼭 이혼증서 쓰고 아내의 손에 쥐어주어 보내라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혼증서는 합의이혼했다는 증명서입니다. 

이것이 왜 필요한까요? 만일 이혼한 아내가 다른 남성과 만나 결혼하여 잘 살아 있는데, 전남편이 찾아와 내 아내라고 주장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혼증서가 없으면 이혼한 여성은 여전히 전 남편에게 매여있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일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 버려놓고 나중에 후회하고 버린 아내를 찾는 일들 말입니다. 여성에게 있어서 이것처럼 끔찍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혼 증서를 써주라는 것입니다. 그녀를 자유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전 남편에게 매여있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혼증서를 받은 여성은 남편의 구속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다른 남자를 만나 새 출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이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24:2 (NKRV)

2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무슨 말입니까? 새 출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제가 설교문을 쓰다가 여기서 “할렐루야”가 나왔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무 멋지신 것 같아요. 새 출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까?

 

첫 번째 결혼에서 실패했습니다. 그 실패는 순전히 남성의 주관적 판단으로 여성을 수치스럽게 여긴 것입니다. 정확히 여성에게 어떤 잘못이 있는지는 모릅니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도 못했고 학대와 폭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에게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혼증서를 받고 새 출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너를 사랑하고 아껴주고, 존중해 주는 좋은 남성을 만나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이혼해도 된다 안된다가 아닙니다. 성도가 이혼을 하면 죄가 된다 안된다 라는 것이 이 말씀의 초점이 아닙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은 결혼을 통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네가 남편에게 사랑도 받지 못하고 존중도 받지 못하고 학대와 폭력과 폭언에 시달리고 있고, 그 속에서 네가 지옥같은 삶을 살고 있다면 “거기서 나와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저는 딸이 없습니다. 우리 중 딸 가진 부모님들 계십니다. 만일 여러분의 자녀가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하고 폭력과 폭언에 시달리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불러서 타이르기도 하고 부탁하기도 하고, 다 해 보았지만 여전히 술만 마시면 개차반이 되는 그런 남편을 둔 여러분의 딸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참고 살아” 말씀하시겠습니까? 정말 그 딸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거기서 나와. 그래서 새 출발 해. 다시 시작할 수 있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사랑하는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3, 4절 말씀도 이해가 됩니다. 

신명기 24:3 (NKRV)

3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두 번째 남편도 그를 어떻게 했다고요? “미워하여” 그냥 미움이 아닙니다. 히브리 원문(싸네)의 뜻은 원수에게 가지는 증오심 원한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폭력과 학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도 이혼증서를 받아 남편의 구속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어 다시 새 출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남편에게는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24:4 (NKRV)

4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비록 두 번째 남편이 죽었을지라도 첫 번째 남편에게는 돌아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물론 성경은 남성들에게 이 말씀을 주시기 때문에 한번 이혼증서를 써 준 아내와 다시 합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가증하다고 하시거든요. 

 

왜 그럴까요? 성경은 이미 몸을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단지 정조를 잃어서가 아닙니다. 지긋지긋한 비참한 생활이 다시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잘 대해주고 대접해 주는 것 같지만 다시금 학대와 폭력 그리고 폭언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술만 먹으면 때리는 남편이었다면 다시 때릴 것입니다. 도박에 빠졌던 남편이었다면 다시 도박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면 사림이 바뀌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가증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을 그렇게 더럽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비참한 결혼생활로 인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기업에서 범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들은 먼저 결혼을 신중하게 그리고 잘해야 합니다. 잘한다는 것은 배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시각으로 성숙한 영성과 인격을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나조차 그렇게 성숙하지 못합니다. 상대의 연약함을 채워주어야 하는 데 오히려 비난합니다. 상대의 허물을 덮어 줘야 하는데 들추어냅니다. 서로의 연약함과 허물로 인해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희생하고 참고 인내하며 결혼생활을 지속해 가야 합니다. 서로의 연약함이나 허물 때문에 쉽게 갈라서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결혼할 때, 서약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약할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할 것을 서약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을 증인 삼아 서약했습니다. 그 서약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서약을 한쪽에서 깨게 되면 결혼생활을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간음을 한 배우자와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서약을 깼기 때문입니다.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 배우자와 사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도박이나 술 중독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는 배우자와 사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서약을 깨는 행위입니다. 결혼이라는 서약의 특징은 한쪽에서 이 서약을 깨면 혼인이 깨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이라는 명목으로 또는 기독교적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인내와 참음을 강요하게 되면 이것은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고 우리의 자녀들 또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가정을 깨지 않기 위해 또는 자식들을 위해 남편의 폭력과 학대를 참고 살아가는 것만이 해답은 아닙니다. 그곳에서 나왔다고 해서 하나님을 그것을 잘못했다고 하실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아버지는 인격적이고 친밀하시며 사랑이 많으십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을 잘 모르겠다면 자녀를 향한 여러분의 마음을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법은 사람을 위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안식일 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법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복과 안위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속하고 불편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고, 행복하게 하며, 평안을 줍니다. 

 

이혼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길일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결정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이거든요. 그가 결정하도록 하나님이 두십니다. 누구도 대신 결정해 줄 수 없습니다. 이혼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러한 자유에는 또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혼을 결정했다면 그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책임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잘 사는 것입니다. 제발 잘 사셔야 합니다. 아프지 말고, 죄책감에 시달리지 말고, 후회하지 말고, 우울증에 빠지지 말고, 사람들 피해 다니지 말고, 잘 사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이혼하는 것이 죄일까? 아닐까? 이런 질문은 수준이 낮은 거예요. 

엄마 거짓말하는 게 죄예요? 아니예요? 아이들이 묻는 것입니다. 

술·담배 하는 것이 죄에요 아니예요? 수준이 낮은 거예요. 

 

하나님은 무엇을 안했다고 잘했다 하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짓말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말로 사람을 살려야지요. 사람을 위로하고 세워주어야지요, 적극적으로 무엇을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지 무엇을 안했다고 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이해하셨으면 좋겠어요.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살인하지 않았다고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은 가장 존엄한 가치가 있으니 적극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혼도 마찬가지예요. 이혼을 안했다고 잘한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결혼했다면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지요. 결혼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배워야지요. 자녀들을 믿음으로 양육해야지요. 

나는 이혼안했으니 잘 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결혼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때로는 이혼이 필요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새롭게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 신앙의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할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혼한 만큼 더 행복해야 합니다. 엄마가 행복하면 아이들은 회복이 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하였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 말씀에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돌을 내려놓고 떠납니다. 

다음 장면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녀 앞으로 가십니다. 옷은 다 찢겨 있고,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고, 두려움에 벌벌 떠는 여인에게 다가가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제야 그녀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돌아봅니다. 

“주여 없나이다”

그녀가 간음했다고 정죄할 수 있는 의인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오직 의로우신 한 분, 예수님조차도 그녀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돌아가 새로운 출발을 하라고 하십니다. 

 

이 설교를 들으시는 분 가운데 이혼으로 인해 죄책감에 빠져있는 분 계십니까? 자식에게 미안하고 못 할 짓 한 것 같아 늘 위축된채 살아가시는 분 계십니까? 

주님께서는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다시 일어서길 원하십니다. 행복하게 살길 원하십니다. 따듯한 남편의 사랑과 격려 속에서 존중받으며 살길 원하십니다. 그렇게 사시면 됩니다. 

 

2. 결혼은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묻습니다. 시험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논리적 오류에 빠지게 하거나 대답을 못 하게끔 만들어 그 권위를 실추시키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어려운 문제입니다. 또한 당시 헤롯왕은 아내를 버리고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는데 세례요한은 이를 비판하지 결국 사형에 처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리새인들은 이혼에 대해 질문을 함으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질문이 이것입니다. 

마가복음 10:2 (NKRV)

2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질문을 좀 더 구체화 시킵니다.

 

마태복음 19:3 (NKRV)

3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만일 예수님이 “이혼은 옳지 않다”라고 하면 “왜 하나님께서 신명기 말씀에 이혼을 허락하셨습니까?”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구약의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것을 정치적 발언으로 몰고 가 헤롯에게 대항하는 자로 고소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이혼해도 된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당시에 이혼을 허용한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많은 남성들이 여성을 함부로 대하고 이혼했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해 당시 바리새인들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아니다.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까 언급된 힐렐학파처럼 음식을 태우거나, 접시를 깨거나, 매력이 떨어지면 수치스런 일로 여겨 함부로 아내를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혼해도 된다고 하면 이들의 죄를 합리화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즉 예수님은 “이혼하면 안 된다” 또는 “해도 된다”의 어떤 대답을 해도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이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시고 결혼의 신성함에 대해 먼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9:4–6 (NKRV)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결혼한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배우자가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넓은 세상 위에 그 길고 긴 시간 속에 그 수많은 사람 중에 내 아내, 내 남편을 만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이고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나눌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대답하니까 바리새인들이 되묻습니다. 오늘 본문을 인용합니다. 

마태복음 19:7 (NKRV)

7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마태복음 19:8

8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본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원래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은 우리의 완악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된 성품으로 인해 결혼으로 인한 피해가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가정폭력과 같은 경우입니다.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면 그의 사랑받는 백성들이 너무나 큰 피해를 입고 인생을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두 개의 논리를 함께 받아 들여야 합니다.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완악함 때문에 이혼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상반된 논리 사이에서 우리는 지혜롭게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부목사로 사역할 때 일입니다. 화요일에 있는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하던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결혼했고 딸아이가 초등학생이었습니다. 12주 성경 공부를 다 마치고 자매님이 시간이 좀 되시냐고 물어 교회 근처 카페에서 심방을 했습니다. 

사실, 성경 공부를 시작할 때 이혼을 결정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이혼서류를 다 써놓고 이제 도장만 찍으면 합의이혼을 하는 것입니다. 참고 참았지만 더 이상 남편과 함께 살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혼을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공부하면서, 자신이 한 번도 남편의 상처와 아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본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항상 문제는 남편에게 있었지 내가 문제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공부하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존재인지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처음으로 남편 앞에서 내가 잘못했다고,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한 내가 잘못했다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이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답니다. 

 

여러분, 복음은 우리를 하나되게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사람도 복음의 능력이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이혼은 신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온전한 가정을 세워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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