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72. 그 일이 네 하나님 앞에서 공의로움이 되리라
신명기 24:13 (NKRV)
13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신명기 24:18 (NKRV)
18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신명기 24:22 (NKRV)
22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한 가지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삼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모로부터 똑 같은 재산을 상속받았습니다. 첫째는 사업을 잘해서 부자가 됩니다. 둘째는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계속해서 실패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습니다. 셋째는 자기 가족을 건사할 만큼은 살지만 그렇다고 여유가 있지는 않습니다.
어느 날 둘째가 먹고사는 것이 어려워져 형을 찾아옵니다. 둘째는 성공한 형이 자신을 도와주길 바랐습니다. 막내는 둘째 형을 도와줄 만큼 여유가 있지 않습니다.
과연 형은 동생을 도와주는 것이 옳을까요? 아니면 도와주지 않는 것이 옳을까요?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아내가 찾아와 말합니다.
“뭘 고민해. 도와줄 생각하지마. 당신과 서방님 똑같이 재산 상속받지 않았어. 그런데 서방님 저렇게 어렵게 된 게 본인이 무능하고 게을러서 그런 거잖아. 우리가 도와준다고 될 일이 아니야. 도련님 저렇게 된 거 순전히 본인 탓이야.”
그 순간 전화벨이 울립니다. 받아보니 어머니입니다.
“애야, 둘째가 찾아와 도와달라고 했다는 것 안다. 내 생각에는 네게 도와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너는 장남이라는 이유로 아빠와 엄마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 속에 자랐어. 넌 남달리 총명하게 태어났단다. 엄마는 네가 초등학교때 부터 개인과외를 붙여주었고 넌 항상 1등을 했어. 넌 공부에 욕심도 많아서 명문대에 들어갔단다. 그런 네가 우리 가정의 자랑이었단다. 그런데 둘째는 그렇지 못했어. 어려서부터 병치레도 많았고, 여린 성격 탓에 자기 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지. 거절 못하는 성격 때문에 늘 손해보는 일들이 많았어. 둘째가 지금 어려운 것은 둘째의 노력이 부족하거나 게을러서가 아니야.
난 네가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동생을 도와주는 것이 어떻겠니.”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구의 생각이 옳은 것일까요?
아내의 생각이 옳은 것입니까? 아니면 어머니의 생각이 옳은 것입니까?
이러한 질문을 던져 놓고 오늘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그들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돌보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자선의 차원이 아닌 의무로 였겼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을 하는 시점이 언제입니까?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전입니다. 아직 기업을 분배받기 전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광야에 있습니다. 부한 자도 가난한 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미리 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너희가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게 되면 경제적 불평등이 생기고, 사회적 약자들이 생겨날 텐데 그때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1.아무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사는 이스라엘 사회라 할지리도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가 발생하며, 이는 개인의 무능이나 노력의 부족 또는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는 인간에게 있는 이기심과 탐심이라는 죄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능력이 있고 노력하여 부자가 된 것도 아니고, 무능하고 게을러 가난하게 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거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부자로 살아갑니다.
손흥민은 토트덤에서 매주 19만 파운드(3억원)의 돈을 받고 있습니다. 프로게이머 이상혁은 연봉이 50억입니다. 아이돌 그룹 블랙핑크는 지난 두달 동안 공연으로 1000억을 벌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경제구조를 공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자가 누리는 부도, 사회적 약자가 누리는 가난도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이고 더 깊이 들어가면 인간의 죄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인들이 모여 만든 사회 구조는 당연히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구조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미리 내다보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은 광야에서 서로가 평등하지만, 이제 세대별로 기업을 받게 되면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가 생기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이러한 죄인들이 만들어 놓은 부조리한 상태를 인정하시면서 그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면, 너희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돌봐야 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 그것이 공의롭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4:13 (NKRV)
13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공의라는 것은 반드시 해야하는 의무입니다. 우리는 흔히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을 자선을 베푸는 것은 선택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공의라는 것입니다. 공의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따라서 만일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시 죄가 됩니다.
둘째, 너희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4:18 (NKRV)
18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신명기 24:22 (NKRV)
22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너희가 애굽의 종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너희를 자유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해방시키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애씀과 노력의 결과로 해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너희가 사회적 약자를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일까요?
공의
성경에서 공의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관계적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쩨다카’ 영어는 ‘righteousness’로 번역합니다.
그 관계사이에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조건을 성취하게 될 때 그것을 ‘의롭다’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6:25
신명기 6:25 (NKRV)
25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또한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도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5:6 (NKRV)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왜 의로움일까요? 그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 즉 신뢰할 만한 분이기에 그분을 믿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올바른 관계이기 때문에 의롭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의롭다’라는 개념은 법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할 때 그것을 공의롭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웃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때 그것을 의롭다고 하십니다.
정의
다음으로 ‘의롭다’라는 개념중에 정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의’는 히브리어로 ‘미쉬파트’ 영어성경은 justice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공정한 판결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주로 사회적 약자들의 판결과 연관되어 등장합니다. 그들이 억울하지 않도록 판결할 때 그것을 정의라고 합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3:6 (NKRV)
6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며
뿐만 아니라 ‘정의’는 이러한 사회가 될 수 있는 다양한 실천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개념은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공의와 정의를 함께 사용하면서 하나의 의미를 말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관계의 올바름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다음으로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너희 만큼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이루어가라 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8:19 (NKRV)
19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기서 의와 공도가 바로 ‘미쉬파트’와 ‘쩨다크’ 즉 정의와 공의입니다. 그것을 위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이제 가나안땅에 들어가 하나님께서 이루고하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뤄지는 나라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적 약자를 도우라는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경제적 약자들, 신체적 약자들, 문화적 약자들 등. 그들의 존엄성이 지켜지고 기본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의이고 공의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명기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의와 공의를 실현했을까요?
우리가 알다 시피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각 세대별고 기업을 분배 받았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들에게 똑같이 유산을 배분한 것처럼 말입니다. 처음에는 사는 형편이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 불평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능력과 노력의 차이이기 보다 죄인들이 모여 이루는 사회는 부조리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빈부의 격차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돈을 빌리는 일들이 생기고, 빚을 갚지 못해 노예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질병이나 사고로 가장을 잃고 과부가 되기도 하고,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먹고 살기 어려워 난민 신세로 이스라엘로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세계 어디를 가든 다르지 않습니다. 어디를 가도 사회적 약자들은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신명기 말씀을 기억하고 정의와 공의를 실현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가난하게 태어나도 또는 가난해져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도 또는 장애자가 되어도,
부모가 없이 태어나도 또는 부모를 다 잃어도,
여성이 홀로 살아도, 또는 남편을 사고나 질병으로 잃어도
그들의 인간다운 삶이 훼손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다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얼굴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형제와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의무였습니다. 그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권리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그들이 경제적으로 잘 사는 시대에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오히려 더 피폐해졌습니다. 경제가 성장하고 나라가 부강해지면 약자들의 삶도 좋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생긴 것입니다.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은 남북왕국으로 분열됩니다. 북쪽을 북이스라엘이라고 불렀고, 남쪽을 남유다라고 불렀습니다. 주전 805년 앗수르가 수리아의 다메섹을 함락시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남유다는 수리아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앗수르는 앗수르 나름대로 북쪽 아라랏과의 전쟁에 휘말려 주변 국가를 넘볼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힘의 공백을 이용하여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와 남유다의 웃시야는 영토를 확장시켰습니다. 특히 북쪽 이스라엘은 활발한 무역으로 경제적 풍요로움을 누렸습니다.
이러한 풍요로움의 시기에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그들이 죄악을 지적하십니다.
아모스 2:6–8 (NKRV)
6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7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8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그들은 신명기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아모스 6:13 (NKRV)
13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도다
그들은 세상의 허무한 것들을 기뻐하였고,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로움을 자신의 힘으로 얻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모스 5:21–24 (NKRV)
21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내가 너희의 예배를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드리는 헌금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아름답고 웅장한 찬양도 듣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제 그만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웃과의 관계,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행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힘없고 약한 자들에게 갑질하면서 주일이면 예배당에 가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무시하고 갑질하는 자들은 내가 그 예배를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어리석도다. 네 물질도 네 생명도 네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에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한 부자가 있습니다. 그 해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이미 부자인데 소출도 풍성합니다.
곡식을 수확했는데 쌓을 곳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첫째, 신명기 말씀에 따라 자신의 소출을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둘째, 곡간을 크게 지어 쌓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결정합니다.
누가복음 12:17–19 (NKRV)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그는 기존의 곡간을 헐고 크게 짓기로 합니다. 그곳에 곡식과 물건을 쌓아두기로 합니다.
오늘날로 하면 사업이 대박이 난 것입니다. 그 돈을 통장에 넣고 빌딩도 몇 채 사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영혼에게 말합니다. “평생 먹고 쓸 만큼 모았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사업에 대박을 허락하신다면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부자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출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부자가 ‘어리석다’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2:20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그는 두 가지 이유로 어리석었습니다. 먼저는 자신의 소유가 자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비유를 보면 ‘나’(에고)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내 곡식’ 내곡간‘ ’내 물건‘ ’내 영혼‘ 그는 그 모든 것이 자기 것이며 자기 노력의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소출이 풍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적당할 때 적당한 비를 내려주셨고 또 적당한 햇볕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노력한 것이 있겠지만 그 정도는 누구나 다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허락한 소출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옳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가 어리석은 이유는 자신의 생명을 자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 밤에 하나님께서 자기 생명을 취하면 드려야 하는 존재임을 망각했습니다. 내 생명이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결국 그 모든 것은 자기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누가복음 12:21 (NKRV)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여러분 내 것은 없습니다. 내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내가 존재해야 하는데 내 존재는 유한합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내 생명으로부터 시작하여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입니다. 저는 세 아들을 키웁니다. 벌써 아이들의 미래가 보여요. 이 녀석은 자기 가족 건사 하고 잘 살겠다 싶은 녀석이 있고요, 걱정되는 아이도 있어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너희들을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약자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가정이 공동체가 그리고 국가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둔 부모의 소원은 자식보다 하루 더 사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러한 것이 소원이 되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사회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내가 없어도 이웃들이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중에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비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마태복음 20:1 (NKRV)
1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천국은 포도원 농장을 경영하는 주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주인에 초점이 있습니다.
이 농장주인이 아침 일찍 나갑니다. 일꾼을 모집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하루치 노동자 임금은 한 데나리온입니다. 이른 아침 몇 명의 노동자를 불러 포도원 가지치기, 거름주기, 포도 수확 등 일을 맡겼습니다. 잠시 후 주인은 오전 9시 또 다시 장터에 나갑니다. 그리고 놀고 있는 사람들을 모아 일을 시킵니다. 정오 시간에도 나가 일꾼을 모집합니다. 오후 3시에도 그리고 저녁 7시에도 나가 사람을 모읍니다. 그들은 인력시장에서 고용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20:6–7 (NKRV)
6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날이 저물어 일을 마치고 품삯을 지급할 때가 되었습니다. 주인은 이른 아침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그런데 오후 3시에 온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론을 줍니다. 저녁7시에 온 사람도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일찍부터 와서 종일 일한 사람과 늦은 시간 와서 한두 시간 일한 사람에게 같은 임금이 지급된 것입니다.
이른 시간부터 일한 사람들이 주인에게 몰려와 항의합니다. 이것은 불공정합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것이 공정합니까? 우리의 일반적 상식으로는 불공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0:13–15 (NKRV)
13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은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으니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동일한 임금을 준 것은 내 뜻이며 그것은 내가 선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주인은 왜 이처럼 했을까요? 그가 포도원을 경영하는 목적은 수익창출만이 아니었습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일이 없어 노는 사람들이 고용되어 일을 하고 임금을 받아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이 임금을 받아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살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사람들을 찾아다녔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공정에 눈을 뜨게 되면, 돈을 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가치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고용하여 그들에게 임금을 주는 것입니다. 주인은 일을 시키지 않고 한데나리온을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선이지 공의가 아닙니다. 공의는 상대방이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방식으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사업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기도를 드리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기업이 잘되어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하게 하옵소서.”
저는 여러분이 이렇게 기도하고 또 실천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기업을 축복할 것이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사회적 약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이 처한 자리에서 어떠한 순종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 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품고 이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고, 우리의 일터, 그리고 가정이 하나님의 공의를 세울수 있도록 기도하시고 순종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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