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3-09-11 14:51

75. 성경적 노동관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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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강해 75. 성경적 노동 원리

 

신명기 25:4 (NKRV)

4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오늘 말씀은 한 절로 된 말씀입니다. 앞뒤 문맥상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앞 구절은 재판과 처벌에 대한 말씀이고 뒤 구절은 계대결혼법 즉 형제의 죽은 아내를 형제들이 책임지는 법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오늘 읽은 짧은 한 구절이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넘어 살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여러 번 등장할 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의미는 이렇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추수한 곡식을 타작할 때 마당에 널어놓고 그 위를 소들이 걸어 다니게 함으로써 탈곡했었습니다. 소들은 자연히 발아래의 곡식을 먹을 것이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인은 소의 입에 망을 씌우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수고한 소가 곡식을 먹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짐승이라 할지라도 주인의 유익을 위해 수고하는 짐승에게 정당한 대가를 주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뜬금없이 곡식 떠는 소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이 말씀은 신명기 24장14-15절과 연관됩니다. 

신명기 24:14–15

14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15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

 

경제적 약자들이 품꾼으로 일할 게 될 때 그들을 학대하거나 임금체불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대부분 일용직이었기 때문에 일당이 지급되었습니다. 경제적 약자들의 일당을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가난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근로기준법이고 임금체불금지법입니다. 임금체불은 당연히 안되는 것이지만 가난한 자들의 임금체불은 더 큰 죄로 여겼습니다. 오늘날에는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고대사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경제적 약자들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란 불가능했습니다. 임금을 받지 못하거나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해도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처럼 근로기준법이 있는 것도 노조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법과 제도는 권력자들과 상류층의 지배권을 강화하고 보호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경제적 약자들의 삶은 피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은 대물림됐고 가난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불공정하게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되면 경제적 약자들의 임금은 반드시 챙겨주라고 하십니다. 사용자가 어려워 하루 이틀 미룰 수 있겠지만 경제적 약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날 임금을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가족들이 굶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배려하는 원리는 신명기 24장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었던 ‘곡식 떠는 소의 입을 망으로 막지 말라’는 말씀은 경제적 약자들의 임금체불금지 명령과 직접적으로 연관됩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소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소가 아니라 사람을 보호하시는 법입니다. 아무리 소라고 할지라도 곡식을 떠는 수고에 대가를 당연히 받아야 하듯 사람은 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을 했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용자에게는 임금 지급 의무를 노동자에게는 임금을 받을 권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깨닫게 되는 노동에 대한 성경적 시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성경은 노동은 신성하며 그 자체로서 의미있고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노동을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창세기 3:17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범죄한 이후 사람은 먹고살기 위해서는 노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19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죽을 때까지 땀을 흘리며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노동이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일하는 것이 즐겁습니까? 아니면 고통스럽습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분들이야 즐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해야 하니까 합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합니다. 

 

우리 청년들은 어떤가요? 그동안 인생에 꿈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적성과 흥미에 맞는 일을 찾아 즐겁게 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현실에 떠밀려 갑니다. 

 

평생 품었던 꿈은 물거품이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면 좋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많은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이에요. 그래서 그 분야로 뛰어들려면 타고난 재능과 특출함이 있어야 합니다. 경쟁도 치열하고요. 그러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니 대부분 꿈, 재능, 적성과 상관없이 해야 할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이 힘들고 지겨운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처럼 지겨운 것이 없습니다. 

 

성도들은 노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노동의 부정의 인식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일을 대하게 됩니다. 

 

성경은 노동은 신성하고 그 자체로서 의미있고 가치있다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1:26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중의 하나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 인간에게 주어진 노동이었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의 첫 번째 일은 피조물의 이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2:19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피조물의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사물에 담긴 질서와 원리를 파악하여 그것에 합당한 명칭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과학자가 사물을 연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피조세계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문명을 이루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창의성과 공감능력, 언어 등 탁월함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지구라는 작은 땅덩어리에 살면서 우주를 향해 날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연구하고 모방한 결과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인간이 만들고자 하는 것이 인간과 가장 비슷한 존재 아닙니까?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모방하는 것이지 창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듯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노동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이었고 그것은 

기쁨이요 행복이었습니다. 노동하면서 하나님을 영광과 지혜의 충만함을 발견했고 그것 자체가 예배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죄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이러한 노동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동을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병든 사람을 어떻게 고치십니까? 의사를 통해 고칩니다. 의사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은을 어떻게 구원하십니까?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통해 구원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노동은 신성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것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 자체로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노동의 현장이 곧 예배의 현장인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왜 공부하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공부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공부는 지겹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또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공부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 되어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부의 목적은 공부 자체에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이 행복하고 즐거운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공부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알아가는 과정이거든요. 

 

하나님은 피조세계를 정교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꽃 한 송이 안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눈 한 송이의 정교함만 보아도 놀랍습니다. 현미경으로 보면 그 대칭과 조화는 실로 경이롭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똑같은 눈송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꽃 한 송이 안에, 눈 한 송이 안에 완벽한 수학적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수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문제 하나 더 풀어 대학에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국어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아름다움을 글과 언어로 표현하고 그것을 누리기 위해 언어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언어가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과 예배하고 교제하며 함께 하기 위해 언어를 배우는 것입니다. 시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벽에 거리를 치우는 청소부들은 하나님이 창조한 아름다운 창조세계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가족을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노동관이 구원받은 자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억지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그의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모든 직업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고, 그 직업을 통한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유럽을 예로 들면서, 유럽이 잘살게 된 이유는 이러한 성경적 노동관을 일찍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동양이 잘 살지 못하게 되었던 것은 사람의 신분과 직업에 차별을 두어 돈 버는 직업이나 노동을 천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이런식으로 반박할지 몰라요. 

칼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사회 노동가인 폴 라파르그(1842∼1912)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는 저서를 통해서 "노동은 신성하다"라는 자본주의 실천 윤리는 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기 위하여 미화된 것으로 허구이며, 인간은 애초부터 노동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므로 '게으를 수 있는 권리'(곧, 쉴 수 있는 권리)를 보다 많이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개인의 행복을 담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자본가들이 "노동은 신성하다"라는 기독교적 실천 교리를 금과옥조로 여기고 한편으로 그것을 교묘히 이용하여 노동자들을 착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성경이 맞습니까? 아니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말이 맞습니까?

 

2010년, 아버지께서 암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뉴질랜드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그해 5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이후 1년 반을 쉬었습니다. 당시 아내가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학교를 마치고 저녁까지 일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그동안 고생했으니 쉬면서 공부하라며 배려해 주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쉬어보았습니다. 혼자 산에도 가고, 가까운 주변도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재밌지도 좋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간혹 아시는 분이 설교 부탁을 하면 멀어도 갔습니다. 40분 설교를 위해 4시간이 걸려 가기도 했고, 4명이 모인 시골교회에서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살 것 같았습니다. 기뻤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쉬는 것 보다 사역을 하는 것이 더 기쁘고 좋았습니다. 

 

2015년 부교역자 생활을 마치고 3개월 아내와 뉴질랜드 여행을 갔습니다. 캠핑카로 남섬과 북섬을 돌아다녔습니다. 좋았을까요? 딱 2주까지는 좋았습니다. 그 뒤부터는 재밌지 않았습니다. 일을 하다 쉬는 것은 좋지요. 그러나 마냥 쉬는 유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계속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노동을 해야 해요.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줍니다. 살아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노동을 쉬면 사람이 늙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노동하고 공부를 하는 사람은 청년처럼 삽니다. 

 

꼭 무엇을 위해서 일을 하고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가사노동하고 자녀를 키우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 아이들 잘 키워서 덕 보려는 것 아니잖아요? 그 순간이 행복한 것입니다. 

 

곡식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은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소가 곡식을 밟는 일일지라도 귀하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이 노동하는 것을 얼마나 귀한 것입니다. 

 

성경은 일하기를 싫어하거나 게으른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0–12

10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노동은 죄의 형벌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노동을 통해 삶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살아갑니다. 그 일이 사람들 보기에 하찮아 보이더라도 하나님 보실 때는 모두 귀합니다. 노동은 신성합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이러한 성경적 노동관이 있을 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해도 당당하고 보람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업의 귀천을 정해 놓고 거기 매몰되어 살아가면 인생을 허비하게 됩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노동과 예배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동이 곧 우리의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이잖아요. 빵 하나 만들어도 주님께 드리듯 최고의 빵을 만들 때 그것이 예배입니다. 한 분의 손님을 대할 때도 주님을 대하듯 성심을 다해 대할 때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렇게 예배하듯 6일을 살고 주일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모임이 없어요. 성경공부 모임을 하긴 했습니다. 주일 오후에 모였는데 조시더라고요. 한 주 동안 일하시면서 얼마나 피곤하시겠어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대부분 직장인입니다. 따로 시간을 빼기가 어려우세요. 저는 직장인들을 자꾸 교회로 모이게 하는 것도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곡식을 잘 떨 수 있게 해야죠.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서 직장인으로 노동자로 성실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배잖아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여기에 동의가 안 되면 우리 교회 나오는 게 힘드실 수 있어요. 그래서 떠나시더라고요. 

 

여러분, 성경은 노동이 신성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예배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주어진 일이 무엇이든간데, 그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노동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 현장이 예배의 자리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성경적 노동관의 두 번째는 노동에는 정당한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은 소가 곡식을 먹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용자 편에서는 노동자에게 정당한 급여를 지급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노동자 편에서는 노동에 대한 임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노동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지만, 또한 경제적 이유로 노동해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제외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목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일하지만 또한 먹고 살기 위해 일합니다. 목사가 먹고살기 위해 일한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목사이기 전에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70명의 제자들을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0:7

7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복음을 전한 집에서 생계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거든 거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17–18 

17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18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여기서 일꾼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 즉 목사를 말합니다. 그들이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곡식 떠는 소에 대해 언급합니다. 목사도 곡식 떠는 소에 해당합니다. 즉 목사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에 비용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목회가 돈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가 받는 급여를 사례비라고 합니다. 목사는 돈을 위해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사명이고 소명이기 때문에 합니다. 그래서 급여에 상관없이 주의 일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고 이 일이 영광스럽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목회를 하는 분들의 생활을 책임져 주기 위해 물질을 드리는데 이것을 사례비라고 합니다. 급여는 노동의 대가이지만 사례라고 하는 것은 감사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목사가 사례비를 받는 것은 마땅하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9:7–10

7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7절은 일한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니다. 군인도 급여를 받고, 포도농부도 열매를 팔아 돈을 받고, 목장주인도 양의 젖을 팔아 생활을 하지 않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고 있다고 하면서 오늘 말씀인 곡식 밞아 떠는 소를 인용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 글을 쓸 때 상당히 감정적인 듯 해 보입니다.  

고린도전서 9:3–4

3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고린도교회 가운데 바울을 비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돈을 위해 일한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당시 헬라 지역의 떠돌이 철학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사람들에게 철학을 가르치고 대가로 돈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방 신전에 사제들은 제물을 팔아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잘 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도 돈 때문에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냐? 이방 사제들처럼 호화스럽게 생활하는 것 아니냐? 이런 비판에 직면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결정한 것이 자비량이었습니다. 자비량은 스스로 돈을 벌면서 사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경 기록을 보면 빌립보 성도들의 헌금 받았고 또 마게도냐 지역 교회의 헌금을 받아 감사했다는 표현을 합니다. 바울은 일시적으로 자비량하긴 했지만 대부분 성도들의 헌금으로 생활을 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고린도교회에는 자비량 한 것입니다. 자비량이란 사례비를 받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벌어 생활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9:12 

12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바울은 자신이 사례비를 받을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굳이 그러한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전하는 복음 사역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그는 사례비 받을 권한을 포기합니다. 

저도 이런 바울의 담대함을 본받고 싶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노동을 신성시하고 그 대가를 정당하게 지급하고 받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노동의 원리입니다. 주어진 일에 열심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정당한 급여를 주시고 또 받으시기 바랍니다. 은퇴하고 노후에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시고, 또 공부도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경적 노동관이고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 삶이 행복하고 풍성할 것입니다. 

신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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