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78. 샬롬과 공의의 저울추를 두라
신명기 25:13–16
13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14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15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16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오늘 본문의 내용은 상거래에 있어 정직하고 공정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곡물이나 기름 등의 물건을 팔고 살 때 두 개의 저울추나 되를 가지고 속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어렵지 않은 말씀입니다. 15절에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가 등장합니다. 공정한 저울추의 의미는 어느 정도 알겠는데 온전한 저울추는 무엇일까요?
영어성경를 참고해 보니까 먼저 ESV성경은 ‘A full and fair weight’ 완전하고 공정한 저울로 번역했습니다. NIV성경은 ‘accurate and henest weight’ 정확하고 정직한 저울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나라 새번역 성경은 ‘바르고 확실한 저울추’로 번역했고요, 공동번역은 “모자라지 않고 틀림없는”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저울추’라고 했을 때 ‘정확한, 확실한, 바른, 틀림없는’ 의 의미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원문을 보면 이러한 번역과는 좀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온전한’이라는 단어가 ‘샬렘’입니다. 의미는 온전한, 평안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물건을 잴 때 사용하는 계량 단위가 아닙니다. 사람 사이의 온전한 관계, 갈등이 없는 평화로운 관계를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사할 때 ‘샬롬’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의 수도 예수살렘도 ‘예루’ 터라는 의미이고 ‘살렘’은 평안, 평강의 합성어입니다.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공정한’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단어 또한 상거래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영어 번역들은 대부분 ‘정직하다’ ‘정확하다’로 번역했고, 우리 성경에는 ‘공정’ ‘확실함’ ‘틀림없는’으로 번역했지만, 원문을 보면 ‘체다크’입니다. ‘체다크’ 많이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공의로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라고 할 때, ‘미쉬파트’와 ‘체다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체다카’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라’는 것은 단순히 상거래에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 즉, ‘샬롬’과 ‘미쉬파트’의 저울추와 되를 두라는 것은, 평화와 공의의 저울추를 두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말씀일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샬롬’과 ‘미쉬파트’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샬롬’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한 관계,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평한 관계를 ‘샬롬’입니다. 공정으로 번역된 ‘체다카’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조건이 성립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6:25
25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여기서 ‘우리의 의로움’이라고 할 때 ‘의로움’이 ‘체다카’입니다. 어떨 때 의롭다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한 것들을 지키면’입니다.
‘샬롬’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화평을 의미하고, ‘체다카’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법이 실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단순히 상거래에서 정직하라는 말씀이기보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유지할 때 화평을 추구해야 하고, 또한 하나님의 뜻과 법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깨닫게 되는 두 가지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내가 만든 저울추를 버려야 합니다.
신명기 25:13–14
13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14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를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한 네 집에 두 종류의 되를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라고 하십니다.
두 종료의 저울추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내가 만든 저울추입니다.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정하신 저울추입니다. 샬롬과 미쉬파트의 저울추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만든 저울추를 버리라는 하십니다. 주머니의 저울추이든, 집안의 저울추이든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울추는 무엇일까요? ‘에벤‘이라는 단어인데 돌이라는 뜻입니다. ‘에벤에셀’하면 도움의 돌이라는 뜻이거든요. 이것을 성경은 저울추로 번역했습니다. 무게를 재는 단위로 썼던 돌입니다. ‘되’라는 것은 원어로 ‘에바’인데 이것은 곡물을 측량하는 도구였습니다.
이것은 기름이나 곡물을 재는 단위, 즉 기준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단순히 상거래 때 사용하는 저울추와 되를 넘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내가 만든 기준을 버리라는 의미입니다. 내 주머니 속의 기준, 우리 집안의 기준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이 만든 기준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내가 만든 저울추를 기준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저울추가 있습니다.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습니다. 자기 주머니에도 있고 집에도 있습니다. 직장에 가서 사용하는 저울추가 있고, 가정에서 사용하는 저울추가 있습니다. 또 교회에서 사용하는 저울추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평가 기준, 판단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에 따라 모든 것을 재고 판단합니다.
예를 들어, 정치는 이러해야 하고 정치인은 이러해야 한다는 기준이 있습니다. 학교는 이러해야 하고 교사는 이러해야 한다는 기준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해야 하며 목사는 이러해야 한다는 기준이 있습니다. 가정은 이러해야 하고 부모는, 또는 자녀는 이러해야 한다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 저울추로 부족하다. 적정하다, 넘친다를 판단합니다. 내가 가진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 그 저울추는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까? 아니면 나에게서 온 기준입니까?
내 주머니에서 나온 저울추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저울추입니까?
우리 집에서 사용하는 되입니까? 아니면 성경으로부터 나온 되입니까?
내가 가진 기준들은 대부분 살아온 경험과 지식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과 지식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살아온 경험과 가진 지식이 달라서 기준도 다릅니다. 한국 전쟁을 경험한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의 기준이 다릅니다. 전쟁을 경험한 어르신들 세대들은 국가의 안보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 기준으로 정부나 정책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경험이 다르면 기준도 달라집니다.
지금 우리 시대를 다원주의 시대라고 합니다. 하나의 기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가진 기준이 옳다고 인정하는 시대입니다. 너에게는 틀릴 수 있으나 나에게는 맞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해 주자는 것이 다원주의입니다. 만일 ‘네가 가진 기준이 틀렸어’라고 말하면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나라마다 기준이 다르고, 종족마다 기준이 다릅니다. 보수와 진보의 기준이 다르고, 사업자와 노동자의 기준이 다릅니다. 남자와 여자의 기준이 다르고 교사와 학생의 기준이 다릅니다. 세대마다 기준이 다르고 가정마다 기준이 다릅니다. 모두가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상황과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너의 기준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네 주머니에서 나온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상황과 사람을 재거나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뜻입니다.
내가 가진 기준은 나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타인에게는 지나치게 비판적입니다.
예를 들어 운전 중에 갑자기 앞 자가 급정거를 하거나 끼어들기를 했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뭐야” 욕이 올라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내가 그런 행동을 했을 때는 어떻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합니다.
새가 노래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노래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운다고 합니다. 무엇이 맞는 것입니까?
내가 가진 기준이 옳은 것입니까? 그것은 내 주머니에서 나온 저울추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저울추가 크든 작든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것으로 재거나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사시대는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섬겼고,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였으면, 인신 제사와 동성애가 난무했습니다. 사사기는 마지막 절은 이러한 말씀으로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사사기 21:25
25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람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을 각자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 사회는 심각하게 부패하고 타락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요한복음 9:2
2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당시 사람들은 사고로 인해 장애가 된 것은 죄로 인한 심판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맹인의 경우는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 죄를 짓기 전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 그 댓가로 이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입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인과율입니다.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원인이 없다면 그 부모에게 원인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인과율의 기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기준으로 당시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잘되면 축복, 안되면 저주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상황과 사람을 재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요한복음 9:3
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들은 인과율에 사로잡혀 ‘무엇 때문에’를 물었지만 예수님은 그 틀을 깨시고 ‘무엇을 위하여’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위하여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고치십니다.
이렇듯 우리는 사람이 만든 저울추로 모든 상황과 사람을 재고 판단합니다.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돈을 많이 벌면 성공이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입니까?
만일 그 실패로 인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었고, 돈만을 추구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는 성공한 것입니까? 아니면 실패한 것입니까?
성경은 먼저, 우리가 가진 기준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이 만든 기준과 틀에 매여 살아가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의 기준으로 삼지 마십시오. 그것으로 여러분의 삶을 재단하고 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사람을 재고 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샬롬과 공의의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신명기 25:15 (NKRV)
15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는 샬롬과 공의의 저울추를 말합니다. 즉 샬롬과 공의의 기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샬롬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온전한 관계, 이웃과 온전한 관계를 말합니다. 이러한 온전함의 관계가 평화로 표현됩니다.
우리는 샬롬의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에는 계산기가 있어서, 어떠한 일을 결정할 때 손익을 계산합니다. 이익이 되면 그 일을 하고, 손해가 되면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판단과 결정에 가장 중요한 기준이 경제적 손익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샬롬을 기준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기준은 경제적 이익이 아닙니다. 그것은 샬롬입니다.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샬롬을 이루는지, 또한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샬롬을 이루는 것인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온전한 저울추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축과 은금이 풍부해졌습니다.
이들이 함께 거주하다가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가축들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서는 목초지로 이동해야 하는데, 서로의 가축들이 워낙 많다 보니 겹치는 일들이 빈번해 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다툼이 생긴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경제적 이익을 택하지 않고 샬롬을 택합니다.
창세기 13:8–9
8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네가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하라고 양보합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샬롬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샬롬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이때 롯이 선택한 곳이 소돔과 고모라 지역입니다.
창세기 13:10 (NKRV)
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다는 것은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롯은 그 땅을 선택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브라함은 자신이 땅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창세기 13:14–17
14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동서남북으로 다니며 밞은 모든 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샬롬을 선택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롯이 선택했던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이 난무해져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생육하고 번성했습니다.
샬롬을 선택한 사람은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눈 앞의 이익을 따라가는 사람은 결국 망하게 됩니다.
뉴질랜드에서 아내가 23살이었을 때 BBs' 라는 호주 프랜차이즈 까페에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새벽 6시에 출근해서 샌드위치 30개를 만들고 소시지며 머핀 퀴시 각종쿠키에 커피음료들까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장님은 다른곳에 있는 지점의 메뉴까지 아내가 만들도록 하면서 일은 점차 고되고 벅차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묵묵히 맡을 일을 해 나가며 성실하게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8개월 쯤 되었을 때입니다. 주일 오후에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끊은 아내는 사장님이 내일부터 나오지 말랬다며 이해되지 않지만 일을 쉬게되어 신나는 표정이었습니다. 저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 전화해서 무슨 일 있으시냐고 물어보는게 어떻겠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다시 통화를 하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알게 된 사실은 카페 메니져 체리씨가 '메그가 자신을 비롯한 다른 직원들의 임금이 적어서 올려달라'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만 두었으면 좋겠다고 한 것입니다.
전화를 끊고 아내의 말을 들어보니까 자신은 그런 말을 한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체리메니져는 항상 아내에게 와서 불평을 늘어놓으며 투덜거렸다고 합니다.
'사장님은 우리들 때문에 돈도 많이 벌면서 임금을 왜 안올려주는지 모르겠다며 이 카페에서 제일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은 누가봐도 메그 너인데 니가 제일 임금이 적지 않으냐 내가 언젠가 꼭 말하겠다' 라고 했답니다.
그러니까 체리 메니저가 아내를 팔아서 임금인상을 요구한 것입니다. 당장에 체리씨에 연락해서 왜 거짓말을 했냐고 쏘아붙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라고 하면 삼자대면하자 그럴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아내가 다음날 오해를 풀기 위해 사장님 내외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임금이 적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영어 한마디 못 하는 저를 믿고 기회를 주신 것에 그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일이 조금 힘들지만, 그것으로 불평했다면 일을 줄여달라고 사장님께 직접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할 만하다고 생각하고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한달에 한번씩 직원들에게 식사를 사 주시는 것도 감사하고 알바생인 저에게까지 휴가선물을 주신것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풀 수 있는 오해는 여기까지이며 제 진심을 믿는 것은 사장님 선택입니다."라고 말하고 나온 것입니다.
다음달 연락이 왔습니다.
오해를 해서 미안하다고...계속 함께 일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다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체리씨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는지 그날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얼굴을 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내는 오해를 풀면서 체리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아내에게 에이스카드가 될 줄은 전혀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어느 날 뉴질랜드 벼룩신문 구인광고란에 홈케어기버(노인요양사)를 구하는 것을 보고 '아 이거다'하며 아내가 더듬거리는 영어실력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를 끊고서는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면접을 보러 와 보라는 말을 한 것 같다며 나름대로 면접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력이 될 만한 몇몇 경험과 뉴질랜드 카페에서 일한 경력을 기록하고 그것을 증명할 만한 사진 몇 장을 준비하여 뉴질랜드 침례교단에서 운영하는 BaptistAction 노인요양병원을 방문했습니다. 마치 대학교 캠퍼스같은 타운으로 들어서자 슈퍼바이져와 매니져 두명이 사무실에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직장이라면 잘 이해하고 대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라 믿으며 긴장감을 계속 꾹꾹 누르며 참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먼저 소개하고 일을 하게 되면 어떠한 일을 하게 될 것이며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조심스러운 일인지 등을 꽤 오랫동안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몇 가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내는 그들에게 영어로 "나는 당신들이 기대하는 것만큼 영어가 유창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준비해온 것을 보면서 읽어도 되겠습니까?"라고 하자 흔쾌히 오케이라고 했답니다.
아내는 어릴 적 아빠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엄마가 일하게 되어 몸이 불편한 아빠를 간호하였고, 교회에서 장애아동 교사로 섬겨 봤기에 노인분들의 어려움과 생활의 불편함을 잘 이해하고 있고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알고, 그 일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내용을 읽어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준비한 것은 이게 다입니다"라고 말하자 면접관들은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나서는 '당신이 BBs' 카페에서 일했었다는데 그 직장에 지금 전화해서 몇 가지 좀 확인해 봐도 되겠냐?'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슈퍼바이져가 BBS에 전화를 건 것입니다. 매니저를 좀 바꿔달라고 한 것입니다. 누가 받았겠습니가? 체리가 받은 것입니다. 그러고는 체리씨에게 메그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수화기 넘어로 들려오는 체리의 목소리는 침이 마르도록 아내를 칭찬하며 당신들이 그녀를 채용하지 않으면 아주 좋은 사람을 놓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면접을 끝낸 뒤 종이 한장을 건네주며 좋은 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한시간의 면접을 끝내고 나오는 아내의 얼굴은 기가 죽어있었습니다.
공동으로 생활하는 선교하우스에 도착하여 받은 종이를 식탁에 던져두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집으로 오신 선교사님이 면접은 잘 봤는지 물어보셨고 아내는 잘 모르겠다며 여전히 풀이 죽어있었습니다. 차를 마시려 테이블에 앉은 선교사님이 아내가 던져둔 종이 한장을 보시더니
갑자기 박장대소를 하셨습니다. 이것은 계좌를 개설할 때 필요한 서류라며 새로운 직장을 얻게 되어 축하한다며 제 일처럼 기뻐해 주셨습니다.
그 종이는 급여를 지급하기 위해 회사에서 계좌계설을 요청하는 서류였던 것입니다.
덧붙이시기를 이전에 일하던 카페에서 아내에 대한 추천이 아주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전에 아내가 체리씨의 잘못을 조용히 덮은 것에 대하여 빚을 갚는 마음으로 면접관의 전화에 성의껏 대답해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새로 시작하게 된 일은 홀로 사시는 어르신 댁에 1~3회 방문하여 말동무해드리고 고독사를 방지하는 일과 청소를 해주거나 목욕할 때 넘어지지 않는지 지켜보기 등, 비교적 쉽고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어린 아내가 현지인 직장에서 일을 구한 것이 저에겐 아주 기쁘고 대견하기까지 했습니다.
후에 이 일을 한 경력은 현지인 교회에서 사역하게 되는 발판이 되어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샬롬을 선택할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당장에는 손해를 보더라고 샬롬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준입니다.
또한 공의의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캐논이라고 합니다. 캐논은 측정하는 곧은 막대를 말합니다. 영어로 스탠다드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이 성경에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성경에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기준으로 우리 삶의 원칙과 질서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이 기준으로 상황과 사람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성경은 단지 좋은 말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야 승리합니다. 이 기준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 잘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명기 25:15–16
15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16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이제 우리 주머니의 저울추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샬롬과 공의의 저울추를 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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