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86. 마음을 돌이키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신명기 30:1–20
1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2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3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4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5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
6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적군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를 내리게 하시리니
8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9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15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19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오늘 말씀의 제목을 3절로 잡았습니다.
만일 누군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속했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이 정답은 아닙니다. 나의 믿음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면 그 구원은 불완전하고 불안정합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늘 변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좋을 때도 있지만 믿음이 없는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간혹 신앙 좋은 어르신들이 치매에 걸리게 되면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그분의 구원 여부를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나라는 존재는 불안정합니다. 상황에 따라 감정에 따라 변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런 내가 발휘한 믿음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면 우리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과연 구원받은 사람인가? 의심이 찾아오기도 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2:8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내가 발휘한 믿음이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내가 발휘한 믿음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믿음을 선물로 주셨고 우리는 선물로 받은 그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믿어졌다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심이 믿어졌습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구원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지 우리의 노력 여부에 달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신명기의 거의 마지막에 와 있습니다. 신명기 30장은 모세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이 설교를 끝으로 여호수아에게 리더쉽을 이양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모세의 마지막 설교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선포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입니다.
4절, 5절, 6절, 7절, 9절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은혜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비록 가나안땅에서 우상을 섬기고 나를 떠나도 다시 돌아오기만 한다면 네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키고 긍휼히 여기사 너희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언약을 파기하고 우상을 섬길 것을 아셨습니다.
신명기 31:16
16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 들어가 음란하게 우상을 섬기고 그들과 언약을 맺고 자녀들은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여 결혼하고 결국에는 가나안 사람들과 같아질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이 이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그들이 반역할 것을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은 역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할 때 그들이 반역할 것을 아셨습니다. 저는 성삼위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무척 고민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표현을 하나님께 쓸 수는 없지만 우리의 이해를 위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어떤 고민이었을까요? 과연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창조할 때는 말씀으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성삼위 하나님께서 회의를 하셨습니다. 어떤 존재를 창조할지 의논하셨습니다. 신중을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26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나님이 누구에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형상으로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여기 쓰인 ‘우리(아나하누)’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3명 이상일 때 쓰는 단어입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님께서 사람을 만들 때 함께 의논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무엇인가는 여러 가지 의견이 많습니다. 가장 전통적이고 대표적인 해석은 자유의지를 지닌 인격적 존재를 말합니다. 인격적 존재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즉 자유의지가 있어서 창조주의 명령일지라도 스스로 판단하여 순종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주인이 명령만 하면 무조건 복종하는 로봇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여 순종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불순종의 위험성으로 내포하고 있어 성 삼위에서 신중하게 결정하신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유의지가 있는 인격적 존재를 창조하셔서 결국 죄를 범하게 만들고 그 결과 이 땅이 이처럼 참혹한 세상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그런 존재가 아니라면 과연 하나님이 창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만일 명령만 내리면 복종하는 로봇과 같은 존재라면 그들이 아무리 수천수만이 모여 하나님을 찬양할지라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아무리 반려견 수천 마리가 모여 여러분을 위해 짖어댄다고 할 때 그것이 과연 영광스러울까요? 지능이 높은 원숭이 수천 마리가 모여 여러분을 위해 노래한다면 어떨까요? 기쁘시겠습니까? 오히려 작은 아기의 웃음에 행복해하고, 자녀들의 “엄마 사랑해” 한 마디에 행복한 것이 우리 아닙니까? 그 대상들은 사람입니다. 순종할 수도 반역할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 격과 품위는 그 어떤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었고, 구체적으로 자유의지가 있는 인격적 존재입니다. 그 존재는 순종할 수도 있는 불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존재가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을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고 먹지 말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명령에 순종할 수도, 불순종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담과 하와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비록 너희가 불순종할 수도 있겠지만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동산에서 살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악한 사단의 꾀임을 받아 결국 불순종을 선택합니다. 그때 왜 하나님은 막지 않으셨을까요? 막으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이렇게 죄의 결과로 고통받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막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억지로 막는다고 돌이키지 않습니다. 자유의지가 있는 인격적 존재는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습니다. 아무리 내 배로 낳아 정성껏 키운 자식도 부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입니다.
선해지려고 하면 천사보다 선해질 수도 있고 악해지려면 악마 보다 악해질 수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우리에게 부여하신 그 탁월성은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게 하며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지만,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웃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실 때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고 우상을 섬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 백성, 자녀, 아내로 삼으셨지만 언제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의 품으로 달려갈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너희가 죄악 가운데 빠져 있을 때도 긍휼함으로 품으시는지 말입니다. 그 신실한 사랑을 지속해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품을 떠났을 때 어떠한 결과를 맞이하는지도 보여주십니다.
아담은 에덴에서 선악과를 바라보며 자신은 비록 탁월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하는 존재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 명하신 하나님께 순종할 때 에덴의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신명기에 기록된 말씀에 순종할 때 가나안땅에 예비 된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갈 때 복을 누립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신실하게 그분의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니 너희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와는 반대로 흘러갑니다. 그들은 결국 우상을 섬기고 가나안 사람들의 삶에 동화되어 살아갑니다. 거룩한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그들의 삶의 방식 그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을 것을 아신 것처럼,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아셨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자녀로 신부로 삼으셨지만, 우리는 실패합니다. 자주 넘어집니다. 믿음의 길에서 이탈합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실망하게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실패할 것을 아십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일지라도 실패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거짓말로 실패했습니다. 자식을 주신다는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첩을 얻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위대한 지도자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 교사죄로 실패합니다. 신실했던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대결에서 승리 후 여전히 살기 등등한 이세벨을 두려워하여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합니다. 그는 절망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도 절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절망할 것도 아십니다. 성경에 등장한 인물 중에 실패하지 않은 사람, 절망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실패와 절망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능력과 실패를 아십니다. 그런 우리를 붙드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모세가 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는지 궁금했습니다. 물이 없다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반석을 두 번 친 것으로 인해 결국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못들어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좀 억울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뭐 그리 대단히 잘못한 것이라고.
그 장면을 한 번 볼까요?
민수기 20:10–12
10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2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모세는 이스라엘의 불평과 원망에 지친 것입니다. 음식이 없다 불평하여 만나를 매일 먹었고, 고기가 없다고 불평하여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물이 없다고 말하면 되는데 그들은 원망과 불평을 반복했던 것입니다. 그 원망과 불평은 지도자였던 모세를 향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 모세가 화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나님은 이것을 가지고 너희가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아론이 분노한 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은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단지 분노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한계와 무능함, 그들의 실패와 믿음의 약함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고 참고 인내하셨습니다. 모세는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아무리 못나도 내 자식이다.”라는 것입니다.
“네가 뭔 대 내 자식에게 화를 내”
여러분, 누가 내 자식 혼내면 어떻습니까? 서운합니다. 심한 경우 관계를 끊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입니다. 이스라엘이 부족한 것 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실패와 무능함 내가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아들이고 신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하십니다. 아무리 못나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실패할 때 하나님은 안타까워 하십니다. 여러분이 여기까지 오면서 때로는 하나님을 실망하게 하고,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는 선택과 결정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긍휼함으로 바라보십니다.
저는 이러한 긍휼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대제사장에게 심문받을 때입니다. 모든 제자는 흩어졌고 베드로는 멀찍이서 따라가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때 여종 하나가 베드로를 주목하여 보다가 너도 나사렛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고 묻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그냥 부인 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저주합니다.
마가복음 14:69–71
69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그 순간 예수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바라보셨고 순간 베드로와 예수님의 눈이 마주칩니다.
누가복음 22:61–62
61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때 예수님의 눈빛은 어떠했을까요? 실망의 눈빛이었을까요? 아니면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정죄의 눈빛이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분명히 그 눈빛은 긍휼과 이해의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너의 연약함을 안다는 긍휼함의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네가 나를 부인하고 저주할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이해한다는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활한 주님은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가 다시 세우십니다. 그를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일꾼으로 세우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자신이 저주한 주님을 증거하다 순교했을까요? 억지로 했을까요? 저주 받을까 두려워 그렇게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것입니다.
자신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것을 물으신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자신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똑같은 질문을 세 번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 그 사랑을 알았느냐는 것입니다.
실패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자기 백성으로 세울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네가 실패하겠지만 다시 돌아와 나를 찾으면 언제든 환대하고 너를 더욱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네가 우상 숭배하고, 이방인들과 같이 살더라도, 때로는 죄를 지어 하나님의 마음에 못질해도, 다시 돌아오면 네가 너를 받아들이고 더욱 사랑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30:2–5
2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3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4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5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
돌아온다는 것은 떠난다는 것을 전제한 것입니다.
마치 집 떠난 탕자가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 아버지를 기억하고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기다리십니다. 그가 돌아갔을 때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굴복시키십니다. 마침내 그 사랑에 항복하게 하십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커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 커서 내 삶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아깝지 않을 만큼 큰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신명기 30장에서 모세의 설교는 유언과 같습니다. 그 주제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원하실 것일 것입니다. 너희는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너희를 붙들고 구원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49:15–16
15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은 우리를 자식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그분의 손바닥에 새겼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좀 못나고 괜찮습니다.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부족한 신앙의 모습이라도 괜찮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났을지라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돌아가면 됩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면 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순간은 신앙이 좋을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악의 비참한 가운데 허덕일 때입니다. 모두가 나를 버리고 떠났을 때입니다. 나조차 나 자신을 혐오할 때입니다. 그런데도 나를 여전히 기다리시고 긍휼함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할 때 그 순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항복하고 우리 삶을 드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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