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19. 믿음의 주, 온전케 하시는 예수
히브리서 12:1–2 (NKRV)
1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는 초대교회의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보내어진 편지입니다. 당시 그들은 네로에 이어 도미티안 황제의 심한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감옥에 갇히며,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 사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고난 속에서 살아가야 했고, 점점 신앙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 나라의 축복된 삶이 펼쳐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오히려 핍박을 감수하며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얼마 전 장례식에서 만난 친척들은 몇 년 만의 재회였습니다. 젊은 시절 신앙생활을 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하나님을 떠난 분들도 계셨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그분들을 만날 때마다 다시 예배생활을 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권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이렇습니다.
“언니, 누나, 어머니는 평생 그렇게 예수님을 잘 믿고 기도했는데, 왜 우리 가족은 이렇게밖에 살지 못하는 거야? 오히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형통하고 잘 살고 있잖아.”
이것은 우리 가족만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남편, 부모, 자녀도 이렇게 말하지 않나요?
“당신이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왜 우리 가족은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거야?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질병으로 고생하고, 하는 일마다 잘 안 되는 것 같아. 예수를 믿는 게 무슨 소용이야?”
히브리서를 받았던 성도들은 이보다 더 힘든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곧 고난과 핍박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으로 살았던 구약의 인물들을 소개하며, 그들이 비록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영광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실패한 인생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1:33–38 (NKRV)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해지기도 하고,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워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35 어떤 여인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더 나은 부활을 얻고자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습니다.
37 돌에 맞고, 톱으로 켜이고, 시험을 당하고, 칼로 죽임을 당하며,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면서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38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서 유리하였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했던 사람들, 그들은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으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세상에서 인정받고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믿음으로 살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제가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한때 하나님께 충성했던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 모습을 수없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며,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디모데후서 4:6–7 (NKRV)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대사도 바울조차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교적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평안이 깨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만약 내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위기 속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내가 믿음에서 떠난 많은 사람들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겪지 않아도 될 고난과 어려움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믿음의 길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히브리서 12:1 후반부를 보면,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경주’로 번역된 헬라어 **‘아곤(ἀγών)’**은 싸움, 경주, 분투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도 신앙의 길을 설명할 때 이 단어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12 (NKRV)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디모데후서 4:7 (NKRV)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믿음을 발휘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길은 결승점에 도달할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할 마라톤입니다.
때로는 뛰다가 걷기도 하고, 멈췄다가 다시 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끝까지 달리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포기하고 싶을 때, 의심이 들 때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 (NKRV)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우리보다 먼저 이 길을 달려간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현실의 고난을 견뎌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달려야 합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길은 완주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끝까지 달리기 위해 필요한 삶의 자세
1. 버림 (아포티테미 ἀποτίθημι / 벗다, 버리다, 포기하다)
히브리서 12:1 (NKRV)
1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브리서 12:1에서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거운 것과 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약하게 하고,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신앙의 길이 힘든 이유는 갈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마음이 나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충돌할 때, 우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이 갈등이 깊어지고 오래되면 영적으로 약해지고, 기쁨과 평안이 사라집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확신과 결단입니다.
✅ 확신: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가장 선한 길이라는 믿음.
✅ 결단: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선택하는 용기.
이것이 바로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갈등하게 만들고, 마음을 흔드는 것들에 더 이상 흔들리지 마십시오.
버릴 것은 버리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며, 하나님께 마음을 정하십시오.
그리고 더 이상 내가 포기한 것, 버린 것들에 미련을 두지 말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십시오.
멈추지 마십시오. 끝까지 달려가십시오.
2.바라봄
히브리서 12:2 (NKRV)
2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길에서 **두 번째로 필요한 자세는 ‘바라봄’**입니다.
마라토너가 결승점을 바라보며 달리는 것처럼,
믿음의 경주를 달리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믿음의 주이며,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
그런데 여러분, 믿음의 주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신약성경에서 주라는 단어는 헬라어 ‘퀴리오스’를 주로 사용합니다.
**‘퀴리오스’**는 주권자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2장 2절에서 사용된 주라는 단어는 **‘퀴리오스’**가 아니라 **‘아르케노스’**입니다.
**‘아르케노스’**는 창시자의 의미가 있지만, 초기 문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의미는 **‘저자’**입니다.
우리가 책의 겉표지에 **‘아르케노스’**라고 표기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믿음의 저자이십니다.
이렇게 **‘믿음의 저자’**라고 해야, 히브리서 11장과의 연결이 명확해집니다.
11장에는 믿음으로 살았던 선진들의 삶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삶의 이야기는 믿음의 저자이신 예수님께서 쓰신 한 편의 소설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믿음의 저자이시며, 그분께서 우리 각자의 삶에 믿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국어 시간에 배운 단어가 **‘전지적 작가 시점’**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글을 쓸 때 마치 전지하신 하나님처럼, 모든 등장인물의 생각, 감정, 과거, 미래까지 모든 것을 알고 자유롭게 쓰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반면, 1인칭 독자 시점은 나의 주관적인 생각과 감정으로 쓰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인생이 마치 하나님께서 전지적 시점으로 쓰는 한 편의 소설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을 읽을 때, 우리는 그의 삶이 전지적 시점으로 쓰인 한 편의 실화임을 압니다.
그가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실패하고 좌절하고 일어서고 하는 모든 과정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인생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할까요?
그의 믿음의 위대함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가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아브라함이 등장하지만,
그의 연약함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신 하나님이 주인공입니다.
히브리서 11:32 (NKRV)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이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연약함과 허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믿음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이 두려워 포도주 틀에 숨어 밀을 타작하던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하셨지만, 그는 신뢰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초자연적인 이적을 요구했습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와 함께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스라엘 지경을 요단 강까지 확장시킵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왕이 되어달라는 백성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듯 보였으나, 전쟁 후 탈취한 귀고리로 제사장이 입는 에봇을 만들고, 아내를 많이 두어 71명의 아들을 얻습니다.
그는 왕의 직위를 거절했지만, 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를 믿음의 전당에 오른 인물로 보면 안 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사람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자들을 통해 믿음을 이루어 가시는 이야기입니다.
삼손은 또 어떻습니까?
그는 나실인의 부름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초자연적인 힘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방 여인인 블레셋 여자와 결혼합니다.
그의 삶을 보면 잘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자기 욕정에 이끌려 다녔고, 그때마다 자기 분노에 휩싸여 보복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의 최후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두 눈이 뽑힌 채, 가사의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로 전락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다곤 신의 축제 때 불려나가 조롱을 당하자, 자신을 묶고 있던 신전 건물의 기둥을 무너뜨려 3천 명 이상의 블레셋 사람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의 삶을 믿음으로 해석하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것은 구약 인물들의 믿음이 대단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연약하고 허물이 많았으며, 때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고, 때로는 불순종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작은 믿음의 순종을 통해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믿음 조차 하나님께서 창조해 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겨자씨 같은 믿음의 반응으로 행동했을 때,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셨고, 그들의 인생도 영광스러워졌습니다.
즉,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한 16명의 인물들은 믿음의 전당에 오른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이 연약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믿음을 설명하는 실화입니다.
그들의 인생을 누가 이끌어갔습니까?
믿음의 주, 믿음의 저자이신 예수님입니다.
연약하고 허물 많은 그들 속에 믿음을 창조해 내셨습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의지로 발휘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야지 해서 믿음이 발동되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8 (NKRV)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들이 대단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저렇게 부족한 자를 통해서도 일하시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삼손은 자기 복수에 몰두했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삼손은 자신의 동족을 이스라엘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야겠다는 열정이나 소명 의식도 없었습니다.
그저 자기 욕망을 따라 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블레셋을 심판하시고,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기드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미디안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이 맞으면, 내가 양털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이 마르면 주님을 믿겠습니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 노하지 마시고 한 번만 더 시험하게 해 주십시오. 이번에는 양털만 마르고 주변 땅은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장면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해도 좋다는 표본으로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는 300명의 군사와 함께, 메뚜기 떼와 같은 미디안 군대와 싸워 승리합니다.
기드온과 함께 전쟁에 참여한 300명은 정예부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물가에서 물을 먹는 방법을 통해 군사수를 줄이시며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사사기 7:2 (NKRV)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으니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텐데 병력이 많으면 혹 너희가 자신들의 병력과 전술로 승리했다고 자랑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할 수 없도록 최대한 연약함의 상징적인 숫자만 남기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기드온의 대단한 믿음에 대해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는 허물이 많고 연약합니다.
하지만 그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러한 그의 삶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믿음이라는 방식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고,
이를 통해 우리 삶을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겨자씨 같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산을 옮길 만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고, 이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을 돌았던 출애굽 2세대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히브리서 11:30 (NKRV)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가나안 땅에서 첫 번째로 만난 도시가 여리고였습니다.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매일 한 바퀴씩 성을 돌라 하셨고, 일곱 번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큰 소리로 외치라 하셨습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전쟁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2세대는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만일 출애굽 1세대들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 2세대가 가능했던 이유는 이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신 역사를 생생하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매일 아침 만나를 내려주시며,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시게 하시고, 애굽에서 입고 나온 옷이 헤어지지 않게 하시고, 신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시며,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주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날마다 체험했습니다.
날마다 체험하면 일상이 됩니다. 기적이 일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발휘한 믿음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창조해 내신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렇게 했다 자랑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안에 창조해 내신 그 겨자씨 같은 믿음으로 산을 옮겼다고, 하나님을 자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내 인생의 저자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믿음의 저자이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하나의 책으로 삼아 믿음을 창조해 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저자이십니다.
우리 각자의 삶은 예수님에 의해 쓰여지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지나든, 어떤 어려움을 겪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저자이시며, 그 믿음을 온전히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는 길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께 의지하며 나아가는 길입니다.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합니다.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말할 때, **‘텔레이토스’**라는 단어는 완성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실패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을 믿음으로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시험을 겪고 징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징계라는 단어는 **‘파이데이아’**인데, 이는 부모가 자녀를 훈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견책’**으로 번역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훈육하시며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마침내 우리를 완성시키시고, 하나님이 목표하신 모습으로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손길에 의해 온전해지고 믿음으로 성장해 간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확신을 줍니다.
에베소서 2:5–6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우리는 이미 하늘 보좌에 앉혀진 존재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의 믿음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완성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미 그분의 자녀로서 온전히 회복시키셨다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것은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쓴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점에서 우리의 믿음의 여정은 이미 완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을 영화롭게 완성시킬 것입니다.
로마서 8:30 (NKRV)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화롭게 할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아직 완전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 하나님께서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이미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저 그 과정을 살아갈 뿐이며, 그 과정 속에서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완성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6 (NKRV)
6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단순히 시선만 두는 것이 아니라, 의지하는 것이고, 그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엎치락뒤치락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욕망을 쫓기도 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교만하여 넘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천국 보좌에 앉히실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께서 이루십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완성된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분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고, 그 과정을 지나면서 우리는 점점 더 그 영광을 경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믿음의 여정에서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동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통해 영광을 이루어가신다는 믿음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외할머니는 인간적으로 볼 때 불쌍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1·4 후퇴 때 정든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내려왔고, 일찍 남편을 잃었으며, 6남매 중 두 자녀를 먼저 천국에 보내고, 두 사위도 잃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외할머니를 인생의 말년, 치매로 아픈 기억을 지워주셨습니다. 명절에 갈 때마다 할머니는 늘 "참 감사하다, 참 고맙다"라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얼굴에는 항상 기쁨이 가득하셨습니다. 외할머니는 아침을 먹고는 집 앞 미용실에 출근하시듯 가셔서 손님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덕분에 시골교회의 빈자리가 채워졌습니다.
외할머니는 인생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다 포기해도 믿음만큼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셨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셨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불쌍하고 실패한 삶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성공으로 부르시지 않고 충성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동행하는 그 삶의 모든 순간이 바로 행복이고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걷는 동안, 세상에서 겪는 고난과 어려움은 때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만큼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의 결말이 어떤 모습일지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지금 당장은 힘들고 고통스러워 보일지라도,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이끌어 가시며,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통해 영광스러운 목적을 이루십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 고난을 겪고 넘어졌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믿음으로 완성하셨습니다. 그들은 단지 믿음으로 살아간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길이 어렵고 힘들었다고 해서 그 길이 낭비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시며,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성공이나 세상의 인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충성된 믿음으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길을 따라가면서 겪는 모든 어려움은 하나님의 은혜로 끝내 영광스러운 결말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해야 합니다. 비록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믿음의 저자이자 완성자로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까지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믿음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을 어떻게 완성하실지 기대하며, 그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될 날을 믿고 나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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