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5.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 1
히브리서 2:5–18 (NKRV)
5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6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8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기독교 신앙은 두 개의 핵심 진리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 예수님이 누구신가? 둘,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1장에서 압축해 서술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창조주입니다.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천사들도 경배해야 하는 하나님 높고 뛰어나신 분입니다.
2장에서도 1장의 서술방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좀 더 확장하여 말씀합니다.
2:5-9절까지가 예수님이 누구신가? 2:6-18절이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입니다.
1.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만물이 복종하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2:8 (NKRV)
8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7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잠깐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다’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2:7 (NKRV)
7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다는 것은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어서 시공간의 제약 가운데 사셨고, 인간이 겪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성경, 시편 8편에서 예언되었던 것이라고 6절에서 말합니다.
히브리서 2:6 (NKRV)
6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천사보다 못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계셨지만, 만물이 그 발 아래 복종해야 하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2.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셨는가?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7-18절까지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성경 전체에서 무척 중요한데, 그 이유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는가?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없습니다. 이곳에서만 성육신의 의미와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2천 년 교회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신학적, 교리상으로 정리하여 익숙하게 알고 있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십자가에 죽은 인간 예수가 하나님일 수 있는가? 또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이단이 등장했습니다.
한편에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사람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잠깐 사람의 모습으로 있다가 다시 하나님을 복귀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가현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잠시 보였다가 신성으로 복귀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한편에서는 예수님은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고 합니다. 지금도 역사적 예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같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민중의 해방자, 탁월한 도덕 교사 정도로 여길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가? 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초대교회 성도라면 예루살렘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면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 않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사람의 죄를 완전히 제거하고 순결한 자기 백성들로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왜 사람이 되시고 죽으셔야만 했는가? 또한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그의 백성들에게 천국의 삶을 바로 허락하시지 않고 고난의 인생을 살게 하시는가? 하는 질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 두 개의 질문,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그분의 능력으로 죄를 제거하시고 순결한 백성으로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은가? 왜 구원받은 자들에게 천국을 곧장 허락하지 않으시고 고난의 삶을 살게 하시는가?
이러한 질문은 성탄절을 앞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예수님이 왜 사람이 되신 것입니까?
1)죽기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 2:9 (NKRV)
9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죽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을 수 없습니다. 죽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죽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함으로 그 대가로 죽음이 임했습니다. 죽음은 인간 죄의 결과이며 형벌입니다. 죽음은 생명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입니다. 죽음은 뿌리 뽑힌 나무와 같고, 탯줄이 끊긴 태아와 같습니다.
우리 존재가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끊어진 상태가 죽음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의학적으로 죽음은 ‘3대 생명유지장기’ 심장, 뇌, 폐가 모두 죽는 것을 말합니다. 기능이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죽음은 다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입니다.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으로 분리된 상태가 죽음입니다. 뿌리 뽑힌 나무가 당장에는 나뭇잎도 있고, 열매도 있지만 죽은 나무인 것처럼,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가 죽음입니다. 살아서 호흡하고 행동하고 있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한 제자가 “주님, 내가 먼저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라고 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22 (NKRV)
22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르는 죽은 자들은 누구를 말합니까? 이 땅의 죄인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죄인들은 죽은 자들입니다. 호흡하고 심장의 박동이 뛰고 뇌가 정상적 사고를 하는 거 같지만, 죽은 자들입니다.
에베소서 2:1 (NKRV)
1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가 죽은 자였다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였습니다.
죽음의 순간이 이미 죽었음을 확인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었고 또 죽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이 죄의 결과이며 형벌이라고 말합니다. 죄가 없었다면 죽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처음 세상에 죽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 죽음이 임했습니다.
창세기 2:16–17 (NKRV)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했습니까? 사단의 말에 유혹되어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음이 임했습니다.
창세기 3:19 (NKRV)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성경은 우리가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비정상적입니다. 사람은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인간의 생로병사,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은 비정상입니다. 하나님은 아픔도 슬픔도 눈물도 없는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인해 죽음이 임했습니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을 회복하길 원하셨습니다. 첫 창조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회복하길 원하셨습니다. 죽음이 없는 세상, 생명이 충만한 세상을 회복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죽음의 원인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용서하고 없던 문제로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서 벗어납니다. 공의, 정의는 죄가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 죽음입니다. 우리가 죽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에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의로운 자가 죄인을 위해 죽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인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지나간 세대, 현재의 세대, 그리고 앞으로 올 세대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만일 있다고 하여도 한 사람의 죽음으로 모든 사람의 죄가 사해질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한 사람의 죄만 담당할 뿐입니다. 모든 사람의 죗값을 대신 담당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죽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모든 죄인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2천 년 전 베들레헴에서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33년을 사셨고,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예수님은 온전한 사람이셨다. 그러나 온전한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입니다.
히브리서 2:9–10 (NKRV)
9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잠시 천사 보다 못한 모습으로,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사람으로 이 땅에 계셨지만, 죽음의 고난을 받으셨고, 부활하고 승천하여 지금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셨다. 즉 하나님의 신적 권위로 복귀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를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
히브리서 2:10 (NKRV)
10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완성을 말합니다. 구원은 시작이 있고 완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언제 완성됩니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됩니다. 그 구원을 시작하신 예수님, 구원의 창시자께서 우리를 이끌어 영광의 날을 맞이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6 (NKRV)
6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우리 구원의 주도권이 예수님께 있습니다. 내가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구원을 시작하셨고,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안전한 것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일은 2천 년 전의 일입니다. 지금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우리를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 예수님을 ‘구원의 창시자’라고 말합니다. 구원을 시작하신 분이시며 완성하실 것입니다.
3.마귀를 멸하시기 위해
히브리서 2:14 (NKRV)
14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영적 세계에 천사가 있듯이 마귀도 있습니다. 마귀는 지혜롭게 창조된 천사가 교만하여 타락한 존재입니다. 이들은 천사와 같이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군대 조직처럼 계급과 질서 가운데 조직적으로 움직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공중 권세 잡은 자라로 표현합니다.
에베소서 2:2 (NKRV)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이들은 정치, 문화, 경제, 언론, 교육 등을 장악하여 이 땅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최근 일련의 국가적 상황을 보면서, 악한 영들이 어떻게 이 땅을 장악하고 무너뜨리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무속과 무당들이 정치권력 뒤에서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12 (NKRV)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세상 사람들은 부패한 정권과 싸우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 배후에 있는 악한 영들과 싸워야 합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사단은 예수님도 유혹했습니다. 가롯유다, 베드로, 바울 등,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예외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도 여러분과 저를 악한 길로 유혹합니다.
베드로전서 5:8 (NKRV)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이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정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교회의 거룩함과 순결함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고 자신들의 왕국, 지옥을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뉴스를 보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임한 지옥을 봅니다. 우크라이나에 임한 지옥을 봅니다. 샌프란시스코 마약 거리에 임한 지옥의 생생한 모습을 봅니다. 지옥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을 지옥을 만드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이 땅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 일을 하늘에서 하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살면, 여러분을 붙들고 있는 마귀의 일들은 멈추게 됩니다. 더 이상 마귀가 여러분을 주관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역사가 여러분 삶에 임하게 됩니다. 즉 천국이 임합니다.
예수님이 마귀의 일을 멸하신 사건은 부활입니다. 죽음은 마귀가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14절에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라고 말합니다. 죽음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인간을 파멸시킨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유혹해 죄를 짓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자가 마귀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세력으로 역사하지만 마귀는 죽음의 세력으로 역사합니다.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길은 죽음을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뚫고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이것은 마치, 빛이 임하면 어둠이 물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 죽음의 권세가 무너진 것입니다. 생명의 권세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때 사단의 허리가 끊어졌습니다. 사단은 패했고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현재, 마귀가 활동하는 것은, 허리가 끊긴 사단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잠깐 하나님께서 사단의 이러한 활동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마귀의 권세는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적인 전투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승리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긴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고지를 점령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이미 승리했고 깃발만 꽂으면 됩니다. 그때까지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4.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자유와 평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2:15 (NKRV)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우리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실제로 죽음이 임박하면 두렵습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도 평안을 죽음을 위해 기도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면서 분노하신 경우가 몇 차례 있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보시자 분노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며, 채찍을 가져와 짐승을 쫓아내시고 돈 그릇을 쏟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며 분노하신 일은 바로 사랑하는 나사로의 장례식에서였습니다.
예수님의 나사로의 장례식에 참석하셨고, 사랑하는 자매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그곳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이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33 (NKRV)
33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은 슬픔의 감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은 나사로를 살릴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도 일부러 늦게 도착하셨습니다. 잠시 후 나사로를 살리고 만날 것이기에 그의 죽음 때문에 슬퍼할 리 없습니다. 이 감정은 슬픔이 아닙니다. 격분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34–35 (NKRV)
34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요한복음 11:36–38 (NKRV)
36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사랑하는 자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현실 앞에 또 다시 비통해 하셨습니다. 격분하신 것입니다, 이 격분은 인간의 죽음을 둘러싼 비참한 현실에 대한 분노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죽음의 현실을 비통해 하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 슬퍼할 수는 있습니다. 격분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통해하십니다. 격분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이 당연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죽음은 없었습니다. 기쁨과 사랑과 평안이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인해 죽음이 임했고, 세상은 비참해졌습니다.
인간은 자기 생명의 확장을 위해 타인을 죽이는 방식을 취해 왔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원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생명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관계일 때는 경쟁과 갈등과 싸움이지만, 국가 차원으로 확장되면 전쟁입니다. 모든 전쟁은 생명을 확장하려는 시도입니다.
제한된 생명, 짧은 인생을 풍족하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타인을 죽여 내 삶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인생이 매여 있습니다. 만일 죽지 않는 인생이라면 이렇게 열심히 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경쟁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돈이 많지 않아도 괜찮고, 명문대학에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죽음이 없다면 경쟁과 착취의 삶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인해 우리 인생은 비참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 사랑하는 자들이 죽음에 매여 있는 것의 현실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5–26 (NKRV)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우리는 살아서 예수님을 믿은 자들입니다. 죽은 자들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자, 영생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죽는 순간은 잠시 잠드는 시간입니다. 눈을 뜨면 주님 품에 안겨있을 것입니다.
이 축복보다 더한 축복이 있을까요?
죽음의 비참한 현실을 비통해 하신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우리가 부활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죽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부활함으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을 부활시킵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탄의 계절, 그 주님을 더욱 찬양하시고,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