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18.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여정
히브리서 11:1–6 (NKRV)
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信仰章)으로 불리며, 믿음의 정의와 신앙의 선진들의 믿음을 조명합니다. 히브리서를 통해 그동안 우리가 살펴본 주요 내용은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고난을 겪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믿는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완전한 속죄 제사를 드리시고 우리의 죄를 제거하시며 하나님께 나가는 길을 여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우리 죄를 대속하는 희생 제물로 드려,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단번에 제거하셨습니다.
이제 본문은 믿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그 초점을 우리에게 맞추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이 아무리 놀랍고 큰 은혜라 할지라도, 믿지 않으면 그 구원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후 구약 성경에 등장한 믿음의 사람들을 예로 들며 그 믿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믿음은 어떤 대상이나 개념을 신뢰하고 확신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먼저는 어떤 사실이나 가설을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머리로 인지하는 과정입니다. 그 후 심리적으로 확신하거나 신뢰하게 되며, 이 믿음을 바탕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기독교에서 믿음이라고 할 때, 이는 일반적인 믿음을 포함합니다. 즉, 기독교 신앙은 사실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것은 가설이나 신화 위에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은 10개의 교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것을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창조주이심을 믿습니다. 또한,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분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믿습니다. 만약 성경을 신화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신학자 중에는 창세기 1, 2장의 창조 이야기를 설화나 신화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많이 공부했더라도 진정한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신화로 이해하는 신학자나 목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은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마음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이 역사적 사실임을 믿는 것입니다. 사실이 표현될 때, 비유나 상징으로 표현될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께서 행하신 신비한 일들을 피조물인 인간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이 신비로운 일을 제 아이들에게 설명할 때, 저는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빠가 아기씨를 엄마에게 주어서 엄마 배에서 아기가 자라 태어나는 거야.”
비록 상징과 비유로 표현했지만, 그 속에는 엄청난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나 상징을 사용하십니다. 이는 사실을 설명하는 방식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경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때때로 사실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선포할 뿐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은 증명하지 않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포로 성경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증명하지 않으십니다.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게 되면, 이후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이 믿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신비하고 믿기 어려운 일도,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도 그 사실을 믿게 되면 가능합니다.
성경은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확신이나 자기 신념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강조하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완전한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죽으셨고 부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주 만물을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외할머니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외할머니는 98세의 일기로 하나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의 시신을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 기증하셨습니다. 평생을 섬김과 희생으로 사셨던 할머니께서 마지막 몸까지 완전히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만일 외할머니께서 부활 신앙이 없으셨다면 시신 기증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그 영혼이 천국에 올라가고, 마지막 날 부활의 육신을 입을 것을 믿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믿음은 사실을 사실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결정합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에 담대함이 있습니다. 현재의 삶이 부활로 연결된다고 믿기 때문에, 현실을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거룩하고 정결하게 살려고 합니다.
히브리서 11:1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1:1 (NKRV)
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의 정의가 아니라, 믿음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일하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사실이라고 믿게 되면, 우리 삶이 얼마나 놀라울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은, 믿음을 가지게 되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 즉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것들을 확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구약의 선진을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약속만 받았지, 실체는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붙잡고, 그 실체가 임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노아의 경우, 하나님께서 홍수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당시에는 비조차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실상으로 받아들여 방주를 지었습니다. 결국, 홍수가 임했을 때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왜 이 대목에서 이러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당시 많은 성도가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 신앙을 버리는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로마 황제의 권력을 두려워하고,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위협과 핍박 속에서 쉽게 신앙을 포기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것이 너무 안타까워 히브리서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히브리서에서 강조하는 믿음은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가 따라 결정됩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났을 때, 우리가 의사의 진단을 믿고 치료 방법을 따르는 이유는 의사가 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의사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의사가 권하는 치료 방법이나 약을 믿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가 수술을 권한다면, 우리는 그 의사의 판단을 믿고 수술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의사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다른 병원에서 진료를 받거나 다른 치료 방법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의사의 전문성에 대한 믿음이 결국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께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11:6 (NKRV)
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기독교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사실로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히브리서에서 강조한 약속한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그 분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희의 삶을 영광스럽고 복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경우입니다.
히브리서 11:8 (NKRV)
8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이 자신의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한 곳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약속은 단지 가나안땅으로 가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지시가 없습니다. 어디로 해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곳에 가면 무엇을 하며 먹고 살 것인지, 구체적인 말씀이 없었습니다. 단지 가나안으로 가라는 명령과, 그곳에 가면 축복하겠다는 약속만 있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네가 하는 일을 접고, 인도네시아로 가라고 하면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있을 것입니다. 가서 뭐 하고 먹고 사나?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하나? 의료시설은 잘 되어있는가? 등등. 아브라함이 익숙한 고향을 떠나 낯선 나라에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순종합니다. 그것은 그가 명령하신 분을 신뢰했기 때문이며, 그분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이 명령에 순종합니다. 그는 모리아산으로 가서 제단을 쌓고 아들 이삭을 번제단에 올려놓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다급하게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여러분, 아무리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이라고 해도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명령에 순종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 문화 가운데 인신제사는 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받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짐을 꾸려 하나님께서 명하신 장소로 갑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은 네 씨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씨를 통해 열방이 복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 이삭은 죽을 수 없습니다. 만일 자신이 죽이더라고 하나님이 살리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믿었고, 그 믿음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7–19 (NKRV)
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자입니다. 그 약속하신 분을 신뢰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명령앞에서도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압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모세를 통해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1세대는 실패합니다. 그들은 약속을 받았지만 실패합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약속하신 분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은 철병거로 무장한 거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어도 저들과 대결하여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결국 광야에서 40년을 돌다 죽게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합니다. 그 결과 순종하지 못합니다.
히브리서는 이미 이 안타까운 역사를 언급하면서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히브리서 4:1–2 (NKRV)
1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지금까지 저는 믿음을 일반적인 의미, 사전적인 의미에서 설명해 드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더 깊은 차원의 믿음을 살펴볼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믿음의 대상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믿음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기독교 신앙에서의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신 삼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계적 차원의 믿음은 "신뢰"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사실로 믿는 지적 동의를 넘어, 살아계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동행하는 삶, 그리고 그 삶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삼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1:17, NKRV)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성도의 삶 전체를 요약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성도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브라함은 처음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받았을 때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기근이 들자, 그는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닥치자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경수가 끊어지고, 자신의 생식 능력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첩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후손을 보려고 했습니다.
그의 믿음이 온전해진 것은 언제였습니까? 그가 100세,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거의 죽은 몸과 같은 상태에서 생명이 잉태되는 것을 체험하며, 비로소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여러 차례 인간적인 방법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려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여정 속에서 때로는 믿음이 약해지기도 했고, 믿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순간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단순한 한두 번의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75세에 부름을 받고, 100세에 이삭을 얻기까지,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하였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삶은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에 이르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명령, 즉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요구에도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연약한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을 시작했지만, 50여 년의 시간 속에서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믿음의 여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은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믿음을 확신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거룩하고 정결하며 온전해야 할 것 같지만,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렇지 못한 모습을 자주 보입니다. 때로는 삶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이 앞설 때가 많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도 삶의 위기 앞에서 거짓과 편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은 결국 실패로 이어지고, 우리는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 자리로, 좌절의 자리로, 절망의 자리로 찾아오십니다. 아니, 사실 항상 우리 곁에 계셨는데, 우리가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와 좌절과 절망을 겪기 전까지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였고, 내 주변의 사람들이 전부였으며, 오직 현실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제야 우리는 내 곁에 하나님이 계셨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시고, 실패의 자리에서, 좌절의 자리에서,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도 하고, 문제를 감당할 수 있는 담대함과 용기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내 앞에 계신 하나님이 얼마나 믿을 만한 분인가를.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은, 결국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세상의 돈이, 능력이, 그리고 주변의 힘 있는 사람이 내 삶을 붙들어 주는 것이 아니구나. 그것들은 믿을 만한 것이 아니구나.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신뢰할 수 없구나. 그러나 내 곁에 계신 하나님은 처음부터 나를 사랑하셨구나.’
우리는 바로 이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나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임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믿음은 한 단계 성장합니다.
이러한 삶의 과정이 바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여정입니다. 그리고 이 여정 속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믿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신뢰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한 지식이나 동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인격적인 믿음입니다.
이러한 인격적 신뢰는 성경의 지식을 바탕으로 하지만, 단순한 지식을 넘어서 있습니다. 성경에서 증거하는 하나님을 내 삶에서 실제로 경험하고 동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믿음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매 순간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외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제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젊은 시절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헌신이 있었지만, 지금은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반면, 어떤 분은 예전에는 신앙이 없었지만 지금은 믿음 안에서 굳건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크고 작은 아픔과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의 순간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믿음의 여정은 우리의 선택과 결단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과 동행할 것인가, 아니면 내 생각과 방법을 의지할 것인가? 우리의 믿음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성장하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어려움 속에서 왜 어떤 사람은 믿음을 져버리고,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드는 것일까요?
여기에 믿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 에베소서 2:8 (NKRV)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는 때때로 믿음이 내가 발휘한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내 믿음을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선물로 주실 때, 종종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우리의 교만과 강퍅한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의지하려 합니다.
내 능력, 내 재산, 내 지혜를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흔드십니다.
때로는 사업장을 흔드시고, 자녀를 흔드시고, 건강을 흔드십니다.
그 순간 우리는 깨닫습니다.
"아, 모든 것이 흔들릴 수 있구나.
내가 의지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구나.
내 생명조차도 내 것이 아니구나."
그리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붙들 수 있는 단 한 분을 발견합니다.
바로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신비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방식입니다.
시편 23편은 우리에게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고 선언합니다.
???? 시편 23:1-2 (NKRV)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까지 보면,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나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만 인도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 시편 23:4 (NKRV)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왜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뿐만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하시는 걸까요?
그 이유는 양들이 목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푸른 초장에서 양들은 비교적 안전합니다. 먹을 것이 풍성합니다.
그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는 다릅니다.
그곳은 어둡고 험한 길입니다. 발을 헛디디면 골짜기로 추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양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목자뿐입니다.
이렇게 여러 차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한 양들은 마침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목자 되신 주님을 바라보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삶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 되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향으로, 삶의 방식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푸른 초장으로,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걸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소망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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