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20.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히브리서 12:3–13 (NKRV)
3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4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5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2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한 편의 책과 같습니다.믿음의 주,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의 각본을 이미 완성해 놓으셨습니다.그 결말은 영광이며 선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30 (개역개정)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또한 에베소서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에베소서 1:4 (개역개정)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이란, 만물이 창조되기 전, 시간과 공간조차 존재하지 않던 때입니다.건축가가 건물을 짓기 전에 이미 마음속에 완성된 설계도를 그리고 필요한 모든 과정을 계획하듯,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인생 전체를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주권자이시며,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그러나 이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숙명론이 아닙니다.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과 행위를 존중하시면서도,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인생을 인도해 가십니다.이것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억지로 끌고 가지 않으십니다.그분은 사랑이시며,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우리의 판단과 선택을 막지 않으시며, 그 판단과 선택에 대한 책임도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내가 잘못 판단하여 선택한 길이라면, 그 결과 또한 감당하게 하십니다.“하나님, 왜 그때 막아주시지 않았습니까?”라고 항변할 수 없습니다.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로운 계획을 존중하십니다.그것이 잘못된 판단이라 하더라도, 그 결과를 통해 다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잠언 16:9 (개역개정)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인공지능 로봇이 아닙니다.우리는 자유로운 인격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리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라 해도 그들의 판단과 선택을 강제하지 않으십니다.하나님의 뜻을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으십니다.그래서 비록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선택과 행동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막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책임하신 것 아닙니까?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의 인생에 대해 책임지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게 될 말씀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관한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인생을 선한 길로 이끄시고, 마침내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가.어떻게 우리의 자유로운 판단과 선택을 막지 않으시면서도, 그 책임은 우리 스스로 지게 하시며,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우리를 세우시는가.
1.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향한 선한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레미야 29:11 (개역개정)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해 가지고 계신 뜻은 선합니다. 악하거나 파괴적인 의도가 아닙니다.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 우리 인생을 진정한 행복 가운데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저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하려고 부르신 분이 아닙니다.우리를 종으로, 노예로 부르신 것도 아닙니다.하나님은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셔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10 (개역개정)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그가 만드신 바"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포이에마(poíēma), 즉 작품, 걸작이라는 뜻입니다.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분의 기쁨으로 창조하셨고,
그분의 선한 뜻을 이루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단지 ‘일’을 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스바냐 3:17 (개역개정)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은 여러분을 바라보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그분은 우리의 행복을 바라십니다.실제로 하나님만큼 여러분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시는 분은 없습니다.
2. 그러나 우리의 죄된 본성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 스스로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려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우리는 세상이 제시하는 가치와 기준을 따라갑니다.세상이 말하는 성공, 인정, 안락함을 좇으며 그 안에서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갈수록,
우리 안에는 참된 기쁨과 만족이 아닌 공허와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며, 자발적인 순종의 삶 속에 참된 기쁨과 만족이 있다는 사실을우리는 알지도 못하고, 신뢰하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들―경제적 여유, 신체적 건강, 사람들과 좋은 관계, 자아실현, 내면의 평화―이런 것들이 우리 삶을 만족시켜 줄 것이라 믿습니다.그리고 그 모든 것을 얻기 위해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조건들이 아무리 충족되어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행복하거나 만족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행복의 조건은 갖췄지만, 정작 행복은 없습니다.필요하다고 여겨졌던 자산, 건강, 인간관계가 충분해졌는데도,
그 안에서 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왜일까요?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결코 참된 만족과 행복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잠시 기쁨이나 만족감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그것은 일시적일 뿐입니다.곧 다시 인생의 불안과 두려움이 밀려오고,경쟁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쉼 없이 달려야 합니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6 (개역개정)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목자이신 하나님을 떠나,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세우신 선한 뜻과 계획을 벗어나스스로 살길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이 더 옳고 좋아 보이고,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보다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 더 행복해 보입니다.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납니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아닙니다.AI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계산 능력을 활용해 인간을 돕습니다.그러나 AI는 인간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그것은 자유의지를 갖지 못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뜻을 따를 자유도, 거부할 자유도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그 자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영광의 증거입니다.
그들은 그 자유를 사용해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은 막지 않으셨습니다.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라,억지로 순종하게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에서만 진짜가 됩니다.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자발적으로 사랑하고, 신뢰하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통해, 자발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 따르기를 원하십니다.하나님은 심판이 두려워서, 혹은 지옥이 무서워서 억지로 섬기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하나님은 즐거움과 기쁨으로 주께 나아오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는 단순한 금지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움으로 선택하는지, 아니면 자기 뜻을 따라 거부하는지를 드러내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우리 안에 있는 자유라는 탁월한 능력에 사단이 교만을 부추겼습니다.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스스로 독립하여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라고 속삭였습니다.인간은 그 말을 기쁘게 여겼고, 결국 하나님을 떠났습니다.그 결과,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이제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 만든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족과 행복을 이루기 위해 문명을 발전시켜 왔습니다.그러나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인간은 더 외롭고, 더 불안하며, 더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왜 과학과 의학이 발전하는데 자살률은 계속 높아지는 것일까요?
왜 세상은 점점 더 풍요로워지는데도 범죄와 잔혹함은 더 많아지는 것일까요?
왜 ‘행복지수’는 비문명국가들에서 더 높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왜 가난했던 단칸방 시절이, 신축 아파트에서 삶보다 더 그립고 따뜻하게 느껴질까요?
왜 컴퓨터도, 스마트폰도 없던 그 어린 시절이 더 행복하게 기억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지금,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문명과 기계 사회 속에서,세상이 정의한 행복의 허상을 좇으며 삶을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과 만족, 충만과 기쁨은세상이 말하는 조건들이 충족되어야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우리는 지금 세상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받는 독자들도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공동체 안에 들어왔지만,예상하지 못한 고난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고난의 원인은 다양했습니다.초대교회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오는 박해도 있었고,외부의 죄, 그리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자신 안의 죄로 인해고통과 싸워야 했습니다.
히브리서 12:4 (개역개정)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직면한 고난은 단지 내면의 죄와의 싸움만이 아니었습니다.그들은 당대의 세속 문화와도 치열하게 싸워야 했습니다.그 싸움은 지금 우리가 겪는 현실과도 매우 닮아 있습니다.
1)로마제국의 우상 숭배 문화와의 싸움로마는 다신교 사회였습니다. 수많은 신들을 섬겼고, 도시 곳곳에 신전과 제사의식이 존재했습니다.그 중에서도 황제 숭배는 정치적 충성의 표현이자 종교적 의무였습니다.그리스도인들은 이 문화에 저항해야 했습니다.
2)성적 타락과 문란한 윤리와의 싸움로마 사회는 성적으로 매우 개방적이고 문란한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매춘, 동성 간 성행위, 음란한 연회 등은 일상화된 죄의 문화였습니다.성도들은 이 유혹 앞에서 고립되거나 조롱받기도 했습니다.
3)폭력과 오락 중심의 문화와의 싸움검투사 경기, 공개 처형, 전쟁의 미화 등은폭력을 오락으로 소비하는 사회의 모습이었습니다.사람들은 죽음을 향한 공포를 오락으로 감추며, 더 큰 쾌락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4)물질주의와 계급 중심의 사회와의 싸움부와 권력을 숭배하고, 노예제에 기반한 계층 불평등은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가난은 수치로, 부는 축복으로 여겨지는 왜곡된 가치가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5)쾌락과 자아 중심 철학들과의 싸움에피쿠로스주의는 쾌락을, 스토아주의는 자족과 이성을 강조했습니다.모두 인간 중심의 철학으로, 하나님 없는 삶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문화와 가치들은 오늘날 우리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세속적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쾌락을 좇고, 물질을 신으로 삼고, 계급적 질서를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성도들이 자기 정체성과 입장을 분명히 세우지 않으면,흔들리고, 타협하며,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하나님 나라의 윤리와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세상과의 갈등과 충돌을 경험하게 됩니다.이때 성도들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보통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1) 타협세상의 가치관과 문화, 죄에 대해 갈등을 피하고
편안함과 안전을 선택하는 태도입니다.진리를 침묵하거나, 죄를 문제 삼지 않으며, 세상에 맞춰 신앙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2) 투쟁(싸움)죄에 타협하지 않고, 말씀에 따라 분별하며 대적하는 자세입니다.이 싸움은 세상을 미워하거나 공격하기 위함이 아닙니다.사랑 안에서 진리를 굳게 붙드는 태도입니다.
3) 도피세상이 너무 악하다고 느껴져, 세상과 관계를 끊고 숨거나 피하려는 태도입니다.일부 수도원적, 금욕주의적 경향과 연결되기도 합니다.하지만 이것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성도의 사명을 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가운데 거하면서도,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싸우되, 사랑으로 싸우고타협하지 않되, 정죄하지 않으며도피하지 않되, 구별되어 사는 것.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자세는 싸움입니다.그저 참고 견디는 수준이 아니라,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싸움입니다.히브리서 12:4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히 12:4)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이는 실제 순교를 각오한 싸움,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믿음의 결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갈 때,이러한 각오가 없으면 흔들리고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신앙이 무너지고, 믿음이 타협되고, 영적 싸움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예수님을 믿고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은 결코 꽃길이 아닙니다.이 길은 죄악된 세상 한가운데서,고난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길입니다.때로는 모욕과 조롱, 혐오와 비난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나를 따를 것이니라”(누가복음 9:2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태복음 10:38)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이 아닙니다.죽음을 상징하는 것, 자기 생명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는 사회는 아닐 수 있습니다.그러나 지금도 이슬람권, 중국, 북한과 같은 지역에서는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그들은 오늘도 진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고난을 단순한 시련으로 여기지 않습니다.하나님을 위한 영광의 고난으로 여기고,기쁨으로 감당하고 있습니다.그들의 신앙은 분명하고, 결단은 확실합니다.그래서 고난에 눌리지 않고, 오히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부류는 신앙의 중립지대에 있는 성도들입니다.이들은 세상의 유혹과 진리 사이에서 항상 갈등하고 흔들립니다.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타협하며, 때로는 도피합니다.이들은 같은 고난을 경험하지만, 그 고난 앞에서 믿음이 무너지기도합니다.
이런 성도들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왜 선하신 하나님이 이런 고난을 허락하시는가?""왜 나에게 이런 아픔을 주시는가?"자기 연민에 빠지고, 주변을 탓하며 비관의 늪에 빠져듭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때로 신앙의 중립지대에 머무르기 때문에 오는 고난입니다.죄와 타협하기 때문에 생기는 고난입니다.믿음의 선명한 입장 없이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계속 머뭇거리기 때문에내면의 고통은 더 깊어지고, 신앙은 더 약해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상황 속에서우리를 징계하시고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선포합니다.징계는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사랑의 훈련입니다.
3. 하나님은 죄악된 세상 속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 고난을 사용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는 **고난을 ‘징계’**라는 개념으로 해석합니다.여기서 말하는 징계는 단순한 형벌이 아닙니다.헬라어로 ‘징계’는 **파이듀오(παιδεύω)**입니다.이 단어는 훈련하다, 양육하다, 교육하다는 뜻입니다.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양육하시고 훈련하시는 과정으로서고난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5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 12:5)
하나님의 징계는 진노가 아니라 사랑의 훈련입니다.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죄와 유혹에 타협하지 않도록,신자의 정체성을 회복시키시기 위해고난을 사용하십니다.이 고난이 우리에게는 아프고 힘들지만,그 실상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에화) 예성이는 2년 전만 해도 똑바로 걷지 못했습니다. 발이 휘어져 있었고, 발뒤꿈치가 땅에 닿지 않아 자주 넘어졌습니다. 얼굴이 성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 후 2년 동안 예성이는 재활병원에서 일주일에 두세 번씩 교정 운동을 받았습니다. 기브스를 하고, 주사를 맞고, 매일 집에서는 기구 위에 올라서는 훈련을 반복했습니다.
그 혹독한 과정을 지나 지금은 정상적으로 서고, 걷고, 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성이가 똑바로 걷기 위해 거친 이 모든 훈련은 고난이었습니다. 아이의 눈에는 엄마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사랑이었고, 결국 생명을 위한 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하나님은 우리를 죄악된 세상 속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고난이라는 도구로 우리를 다듬고, 훈련하십니다.이 훈련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삶, 세속적 가치에 타협하는 신앙에 머물게 됩니다.
히브리서 12:6–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12:6)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12:7)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12:8)
고난을 겪고 있다면,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친아들로 여기시고,그분의 거룩함에 참여시키시기 위해 연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우리가 인생 가운데 겪었던 수많은 고난들은단순한 우연이나 벌이 아니었습니다.그 고난의 많은 부분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삐뚤어진 자녀를 바로 세우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받는 교육이며, 훈련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 보십시오.그들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살아가며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렸고,뼛속까지 애굽 문화에 물들어있었습니다.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빚어내는 데는 40년의 광야 생활이 필요했습니다.
성경은 이 시간을 “광야의 시험”이라 부릅니다.그리고 이 ‘시험’은 단순한 평가가 아니라,아버지가 아들을 훈련시키는 연단의 시간이었습니다.
신명기 8:2 (개역개정)“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의 상태를 몰라서 시험하신 것이 아닙니다.그 시험을 통해 이스라엘은 삶의 목적이 떡이 아니라 말씀임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신명기 8:3“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광야를 통해 가르치십니다.“너희가 무엇으로 사는 자인지 너희 스스로 알게 하리라.”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8:5–6“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그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르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초대교회의 성도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나 다르지 않습니다.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자녀 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답게 세워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타협하지 않는 순결한 믿음의 사람들로우리를 빚어가십니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난이라는 훈련과 연단은 피할 수 없는 도구입니다.
히브리서 12:10–11 (개역개정)“그들은 잠시 자기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그러나 그 자유를 죄의 종이 되는 데 쓰지 않고,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그 속에서 참된 기쁨과 풍성한 삶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타협하지 않고,믿음으로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기를 원하십니다.
그 과정을 위해 때로 혹독한 훈련의 시간을 허락하십니다.그 시간을 통해 우리는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되고,결국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 사람으로 자라갑니다.
고난 앞에 섰던 욥은,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그 시간을 지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기 23:10 (개역개정)“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세상과 타협하며 살던 내가,결국 하나님의 뜻 앞에 자발적으로 굴복하지 않았습니까?그건 강제가 아닙니다.삶의 고난이라는 연단과 훈련 속에서,하나님의 사랑에 굴복한 것입니다.
절망의 자리에 함께하셨던 하나님,일어날 때까지 곁을 지켜주셨던 하나님.그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지나고 있는 고난의 시간 또한,하나님이 여러분을 순금같이 단련하시는 시간임을 믿고끝까지 견디며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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