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강해 1. 하나님의 마음
호세아 1:1–2:1 (NKRV)
1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3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4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5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6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7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8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10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11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1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오늘부터 호세아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먼저 1절은 호세아가 활동하던 역사적 배경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유다 왕과 이스라엘 왕을 각각 언급합니다. 먼저 유다 왕은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통치하던 시대입니다. 이 여로보암은 여로보암2세를 말합니다. 북이스라엘과 유다라고 하니까 이해가 안 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이 죽은 후 남북으로 갈리게 됩니다. 이때가 기원전 930년입니다. 북쪽을 이스라엘이라고 불렀고, 12지파 중 10지파가 속하게 됩니다. 남쪽을 유다라고 불렀고 유다와 베냐민 지파가 속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중심도시는 사마리아와 벧엘이고, 남유다의 중심도시는 예루살렘입니다. 이때를 분열왕국시대라고 부릅니다.
북이스라엘은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218년 동안 총 19명의 왕이 존재했습니다. 남유다는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는데 344년 동안 총 20명의 왕이 통치했습니다. 그렇다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가운데 어느쪽이 정통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남유다입니다. 남유다의 경우 다윗왕조를 계승하여 비교적 안정적으로 왕위가 계승되었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경우 정치적으로 불안했습니다. 7명의 왕들이 암살당했습니다. 그마나 남유다의 경우 하나님을 경외한 왕이 등장하지만 북이스라엘은 단 한명의 신실한 왕이 없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은 대부분 남유다에서 활동했습니다. 유일하게 호세아만 북이스라엘 출신입니다. 그런데 1절을 보시면 남유다 왕조를 먼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북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에 대한 거부감 때문으로 보입니다. 또한 호세아는 남유다가 다윗왕조의 정통성을 잇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가 유다 지파에서 올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시대의 북이스라엘의 왕 이름이 누구입니까? 여로보암이라고 기록했지만 여로보암 2세입니다. 그가 통치하던 시대에 대한 기록이 열왕기하 14장에 나옵니다.
열왕기하 14:23–29 (NKRV)
23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24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5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26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27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28여로보암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과 싸운 업적과 다메섹을 회복한 일과 이전에 유다에 속하였던 하맛을 이스라엘에 돌린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9여로보암이 그의 조상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여로보암이 40년을 다스렸다고 말합니다. 그는 선친 왕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고난이 심한 가운데 있지만 여로보암을 통해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당한 영토를 회복하게 됩니다. 여로보암 2세 통치 당시 북이스라엘은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 초기 전성기 때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대 이후 400여 년 후 고구려의 땅을 거의 다 회복한 발해 시대 전성기에 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로보암 2세때 북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부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에서도 어떤 대통령이 통치할 때 나라가 부강해졌다고 평하지 않습니까? 여로보암 2세는 그런 왕이었습니다. 그것은 왕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반역한 백성들이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고통 받는 것을 불쌍히 여기셨고 또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고자 여로보암 2세를 통해 강성케 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한국전쟁 이후 몹시 가난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뤘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신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먹고 살기 편해졌을 때 그가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더 큰 충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있지만, 어떤 성도들은 영적 긴장감이 해제되어 점점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삶의 어려움이 해결되고 나면 하나님의 더욱 신실하게 섬기는 성도가 있는 반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을 떠나는 일도 있습니다.
여로보암 2세 때 이스라엘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경제적 풍요를 누리며 부패하고 타락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고 그들의 삶의 방식과 동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전혀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구별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이나 삶의 방식이 이방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손가락질당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게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100년 전, 교회는 가난했고 성도들은 소수였습니다. 그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지금의 우리와 달랐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의 신앙을 보십시오. 우리와 달랐습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었지만, 신앙은 순결했고 하나님에 대한 열정 있었습니다. 오히려 삶이 팍팍하고 여유가 없을 때 우리는 오히려 순수했습니다. 작은 것에 도 감사할 줄 알았고 조금의 여유가 생기면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여유를 넘어 풍요로움이 찾아오면서 우리는 점점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물질을 달라고 기도하던 우리가 물질을 주신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건강을 달라고 기도하던 우리가 강건해진 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세상 쾌락을 추구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아도, 성령님이 임재가 없어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자각 증상이 없는 질병은 심각한 질병입니다. 아프면 병원을 찾아가 진단하고 치료하면 됩니다. 그런데 자극 증상이 없으면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면서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영적으로 심각한 질병입니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시기가 그랬습니다.
선지서는 바로 이러한 우리의 상태를 하나님께서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해 주신 말씀입니다. 영적 상태를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가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호세아서입니다.
히브리서 4:12 (NKRV)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 말씀은 마치 의사의 손에 들린 칼처럼 우리 심령을 해부하고 비추어 죄악의 암 덩어리들을 드러냅니다. 내가 자각하지 못했던 내면의 숨겨진 죄악을 들추어 내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그냥 두면 죽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영적인 진단이 수치스럽고 부끄럽지만, 그것을 드러내심으로 치료하길 원하십니다. 수술 과정 또한 괴롭겠지만 우리를 변화시켜 회복케 하심으로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거하며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저는 앞으로 호세아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자리에 세우실지 기대도 되지만 걱정도 됩니다. 그래서 호세아서를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관련 서적을 구매해 놓고도 행여 잔소리 설교만 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느헤미야서로 변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있기에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패역한 그의 백성을 간음한 자로 진단하십니다. 간음이 무엇입니까? 결혼 관계를 벗어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편이 있음에도 다른 남성과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표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관계를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왕이시고 우리는 그 분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자녀입니다. 이 정도는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남편이시고 우리가 아내라는 사실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의 남편이 되실 수 있습니까?
부부사이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친밀합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초월합니다. 전혀 남이었던 두 사람이 결혼이라는 언약식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가 됩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랍고 감격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도 놀라운 은혜인데, 우리의 남편인 것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우리 같은 죄인들이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의 아내가 될 수 있습니까?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친밀한 관계임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 곧 간음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기쁨이 되셔야 하는데, 세상의 것들로 기쁨을 삼고 그것으로 우리 삶을 만족시키려 하는 것이 간음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서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으셨습니다. 너희가 우상숭배는 하는 것은 남편이 간음한 아내를 바라보는 심정이다 라고 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지, 정, 의를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감정이 있습니다. 긍휼, 자비, 사랑은 하나님의 감정입니다. 분노, 질투 또한 하나님의 감정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알리길 원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로 깨닫고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만큼 상처를 받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깊은 것은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나 아내 때문에 분노하는 것은 그 만큼 사랑하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자녀에게 고함치고 화를 내는 것은 그 만큼 아끼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것이 없다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만큼 상처받고, 질투하고, 분노합니다.
호세아서를 보면 하나님은 분노하시고 질투하시며 우리를 향해 고함을 치십니다. 내가 너를 버리겠다고 하시고, 내 자녀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내가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호세아서는 가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은 호세아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기로 한 것입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도 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 음란한 자녀를 낳으라는 것입니다.
호세아 1:2–3 (NKRV)
2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3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러분,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음란한 여성이라는 것은 사생활이 문란한 여성을 의미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하셨을까요? 마음이 강팍한 우리는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픈 사람의 마음은 아픈 사람만이 이해합니다. 머리에서 나온 말씀은 머리까지만 전달됩니다. 가슴에서 나온 말씀은 가슴까지 전달됩니다. 체험을 통해 깨달은 말씀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그 사람의 전 인격에 전달됩니다.
저는 자녀를 키우면서 하나님 마음을 이전보다 많이 알아갑니다. 또 목회를 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모세의 마음이 이해되고, 바울의 마음이 이해됩니다. 만일 제가 학자였다면 알지 못했을 것들을 목회를 하며 알게 됩니다. 예전에는 성경이 머리로 이해되어 졌다면, 자녀를 양육하고 목회를 하면서 가슴으로 읽힙니다. 그것은 그들이 했던 체험을 나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면에서 부모가 된다는 것, 목회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면에서 굉장한 특권입니다.
결혼을 해서 자식을 키워보기 전까지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함께 겪으며,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며, 그래도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아가며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랬던 배우자가 몇 번의 감정적 요동으로 다른 여자, 또는 다른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면, 여러분들은 어떠시겠습니까? 눈이 뒤집히지 않을까요? 머리끄덩이라도 잡고 흔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고함을 치고 소리를 지라고 잡히는 물건이 있다면 집어 던지지 않을까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분노지만 실은 그만큼 사랑한 것이고, 그만큼 믿고 기대한 것입니다.
제가 호세아서를 주목한 이유는 아이를 키우며 너무 힘들 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제 결정에 대해 후회될 때도 물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아이없이 편하게 살 때가 좋았는데. 또 목회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상처받지 않고 편하게 신앙생활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다가, 아, 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상처를 주었구나! 내가 하나님 속을 이렇게 썩였구나! 내가 이것 때문에 이렇게 힘든데 하나님은 내가 잘못했을 때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를 생각합니다.
이러한 경험이 없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호세아를 떠올렸습니다. 그는 음란한 여성과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고 살면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했습니다. 그가 체험하고 느낀 것들을 타락한 백성들에게 선포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호세아와 같은 자리에 서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의 자리에서, 아내의 자리에서, 부모의 자리에서, 직분의 자리에서, 사명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어제 주일학교 성경학교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자녀들 보면서 그런생각했어요. 우리 자녀들 가운데 기도가 필요하지 않는 아이들이 없어요. 특별히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도 있고 육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도 있어요. 그 아이들을 키우면서 부모들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가슴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갈 때 하나님이 가까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겸손해져요.
제가 아는 한 저희 교회 성도님들 가정 가운데 어려움이 없는 분은 없습니다.
자녀의 문제, 건강의 문제, 경제적 문제, 사업의 문제, 불신 가족의 문제 등.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어려움들이 다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문제를 끌어안고 살면서 낙심하고, 분노하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상황속에 나를 두셨을까? 왜 나의 잘못된 선택을 막지 않으셨을까? 왜 어려움들을 막아주지 않으셨을까?
호세아서는 우리에게 해답을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라는 것입니다.
저는 호세아가 비록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했지만 그가 창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바람기 있는 여인이라고 번역했거든요. 만일 창녀였다면 그의 아버지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그녀와 결혼했고 음란한 아이 셋을 낳습니다. 음란한 아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첫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지었습니다.
이스르엘은 이스라엘 지역중에 매우 비옥한 땅입니다. 하나님은 풍요의 땅인 이곳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활은 군사력을 말하는데 결국 풍요의 땅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딸입니다.
호세아 1:6 (NKRV)
6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셋째는 아들입니다. 이름을 로암미라고 짖습니다.
호세아 1:9 (NKRV)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고멜의 자녀들의 이름을 로루하마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로암미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호세아가 자녀들의 이름을 부르며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을까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신 것입니까? 이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을 로루하마, 로암미로 부를 수밖에 없는 그 찢어지는 심정을 통해 하나님의 찢어진 마음을 느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루하마, 긍휼을 받은 자여.
암미, 내 백성이라 부르길 원하십니다.
예레미야애가 3:33 (NKRV)
33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하나님께서는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스바냐 3:17 (NKRV)
17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은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아기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자녀들이 아니 아내가 세상과 짝하여 하나님을 버릴 때 하나님은 질투하시고 분노하십니다. 분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셔서 그 사랑 앞에 굴복하게 하십니다.
호세아 1:10–2:1 (NKRV)
10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11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1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하나님은 타락한 백성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다시 긍휼히 여기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다시 아버지가 되실 것이고, 남편이 되실 것입니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요한복음 3:16 (NKRV)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반역한 세상을 말합니다. 남편을 떠나 간음한 고멜과 같은 우리를 의미합니다. 마땅이 심판받아야 할 죄인을 의미합니다. 그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셨고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자신의 아들을 대신 심판받게 하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로마서 5:8 (NKRV)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NIV)
8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기 사랑을 십자가에서 확증하셨습니다. 영어 성경은 ‘시위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 표현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굴복하여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시고 분노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을 때, 얼마나 큰 상처가 그분의 마음에 새겨졌을까? 물론 그 아들을 살리실 것이지만, 죽어가는 성자를 바라보는 성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이번 한 주동안 하나님의 마음을 헤라여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주어진 삶속에서 이런 저런 체험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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