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강해 3. 다른 신을 섬길지라도 사랑하나니
호세아 3:1–5
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2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3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4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5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 가리라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명하십니다.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음란한 자녀 셋을 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경험을 통해 그분의 마음을 우리에게 알리길 원하셨습니다. 머리고 알고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고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호세아의 사명은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삼아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호세아와 결혼한 고멜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녀는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사랑에 빠집니다. 이 상황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바람피우는 아내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함께 산다고 하여도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하십니다.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다시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3장 1절 후반절을 보면,
호세아 3:1b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또 가라”는 것은 그녀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번 사랑한 것을 끝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고멜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지만 그녀를 용납하고 다시 데려와 아내로 삼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음녀가 된 그 여자 고멜은 배역한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3장 1절 전반
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이스라엘은 이방신들을 섬겼고 건포도 과자를 즐겼습니다. 건포도 과자를 먹는 것은 이방신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지만, 남편 된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이방 신들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을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들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보내는 40년 동안 한결같은 사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날마다 만나를 내려 먹이셨고,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셨습니다. 가나안의 땅을 점령할 때도 강력한 군사력으로 무장한 족속들을 넉넉하게 이기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그토록 사랑하시고 축복하셨던 하나님을 떠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등지고 이방 신들을 섬기게 되었을까요?
사실 이스라엘은 한 번도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무엇 때문에 버리겠습니까? 여전히 이스라엘백성들은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오늘날도 하면 주일성수를 하고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사기 2:11–13
11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와를 버렸다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 신들을 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며 첫 번째 서약이 무엇이었습니까?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너와 나 사이에 그 어떤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순결하게 사랑하길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다른 것들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버리진 않았습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바알과 아스다롯도 섬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알과 아스다롯은 풍요의 신입니다. 농경문화 가운데 살던 가나안 인들에게 적당한 때에 내리는 비는 무척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이 사랑을 하게 되면 그 결과 비가 내린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신전에 창기들을 두고 난잡한 성행위를 통해 신을 흥분시키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처음 이러한 방식의 종교의식에 거부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과 공존하면서 점차 이러한 문화에 동화되기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이방신을 섬기는 경우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이방인들과 어울리게 되고, 점차 그들의 문화를 배우게 됩니다. 그러다 그들의 종교까지 받아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유목민들이었기 때문에 농사를 짖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가나안 사람들에게 의존되어 농사를 배웠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풍작을 거두어 경제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는지를 배웠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자”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바알을 섬겼던 것입니다. 이 과정은 천천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개구리를 물에 넣고 끓이면 점차 뜨거워지는 온도에 적응하다 결국 죽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천천히 자연스럽게 우상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이 우상을 섬기는지조차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우상은 풍요의 신입니다.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신을 섬긴 것이고 이는 곧 자기를 섬긴 것이나 다름 아닙니다.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이를 기반으로 내 삶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주일성수를 하고 십일조를 하고, 봉사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고 세상적 삶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겉으로 볼 때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마음의 중심에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내 삶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평상시에는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지 나 자신을 섬기는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 대부분 드러납니다.
자녀들이 수험생이 될 때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수능 공부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는 지를 보면 드러납니다. 직장을 선택할 때 주일성수할 수 있는 직장을 선택하느냐, 연봉이 많은 곳을 선택하느냐를 보면 드러납니다. 결혼할 때 신앙이 있는 사람을 선택하느냐, 돈 잘 버는 사람을 선택하느냐를 보면 드러납니다.
우상숭배는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을 섬기지만 실제로 그 대상이 나에게 만족과 유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신을 통해 소원을 성취하고 내 삶에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신이 어떤 신이든 상관없습니다. 결국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됩니다.
하나님은 나만을 사랑하시고 바라보시는데, 우리는 사랑하고 바라보는 대상 중에 한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중에 조금 더 중요한 분이 하나님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다하는 것이고 뜻을 다하는 것이고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6:5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사람의 마음은 갈릴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대상은 하나입니다. 남편을 사랑하면서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을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 사람도 사랑해”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한 대상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24
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러분들은 누구를 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다른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가장 마음을 쓰고 있는 분은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다른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는 분은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다른 무엇입니까?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이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힘을 다해 사랑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모두가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마태복음 26:33 (NKRV)
33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님은 닭 울기 전 세 번 부인하리라 하셨지만 그는 “죽어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6:34–35 (NKRV)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이것은 그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을지라도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예수님이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받을 때 한 소녀가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가 아닙니까 라고, 묻자,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합니다. 그 선택의 순간 그의 신앙이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평안하게 신앙생활 할 때는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일 내 생명이 위협받는 절박한 상황이라면 과연 나는 예수님을 선택할까요? 내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물질의 유혹 앞에 하나님을 선택할까요? 우리는 자신을 신뢰하거나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지 사실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나를 만족시킬 대상을 찾아다닙니다. 삶이 허무하고 외롭다고 느낄 때, 무언가 내 삶에 결핍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느낄 때, 나를 만족시킬 무언가가 찾습니다. 그것이 어떤 일일 때도 있고, 어떤 사람일 때도 있습니다. 그것에 몰두하는 동안 현실을 잊기도 하고, 무언가 채워지는 느낌도 받습니다.
그러니 그 일에, 그 사람에게 더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러다 만족하지 못할 때 또 다른 일로 분주하거나 또 다른 사람을 찾으러 갑니다.
고멜은 호세아의 사랑과 안정적인 가정을 버리고 자신을 사랑해 줄 또 다른 사람을 찾으러 갑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만나셨던 사마리아 여인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남쪽 유대 사역을 마치시고 북쪽 갈릴리로 가실 때였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야겠다고 하십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민족적 순수혈통을 잃어버리고 배교했다고 하여 이방인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그곳으로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꼭 만나야 할 여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가 뜨거운 정오에 그곳에 도착하십니다. 피곤한 여정으로 지친 예수님은 우물가에 앉으셨고 제자들은 음식을 사러 동네로 갔습니다. 이때 물동이를 든 여인이 우물가로 다가옵니다. 그녀가 물을 뜨러 하자 예수님께서 말을 거십니다. “물을 한자 주시오.” 여인을 예수님에게 물을 떠 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매몰차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4:9 (NKRV)
9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날카롭고 공격적입니다. 무언가 사연이 있는 여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요한복음 4:10 (NKRV)
1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은 그녀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나에게 구하였을 것이고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자가 대답합니다. “당신은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떻게 나에게 생수를 주겠다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4:13–14 (NKRV)
1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은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주고 싶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생수가 영원한 생명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그런 물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녀에게 하나님의 선물, 영생을 주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발적인 제안을 하십니다.
남편을 데라고 오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16 (NKRV)
16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영생 수를 주는 것과 남편을 데리고 오는 것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예수님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대화가 종결되어야 옳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이 가장 숨기고 싶은 상처를 드러내십니다.
요한복음 4:17–18 (NKRV)
17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여인은 다섯명의 남성과 동거했고 지금 살고 있는 남성도 남편이 아닌 것입니다. 그녀의 인생은 마치 고멜처럼 자신을 만족시킬 남성들을 찾아다닌 것입니다. 이 남자를 만나면 뭔가 내 삶이 채워진 것 같았는데 또 다시 실망하여 떠납니다. 또 자신을 채워줄 다른 남성을 찾아 다닙니다. 이렇게 해서 여섯 번째 남성과 함께 산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녀가 숨기고 싶어 하는 사실을 드러내셨을까요? 그것은 여인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깨닫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너는 마치 매일 우물가에 와서 우물을 뜨는 것처럼, 너의 삶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이 남자 저 남자를 바꿔가며 만나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능한 의사처럼 그녀의 삶의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여인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채울 무언가를 갈급해 하고 찾아다닙니다. 돈이 많아지면 만족할 것 같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와 명품을 지니고 다니면 뭔가 채워질 것 같지만 여전히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허무합니다. 부지런히 살아보기도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 웃고 떠들어 보지만 오히려 더 외롭습니다. 우리의 결핍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고멜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다름 아닌 우리들입니다.
삶의 허무와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 어떤 애씀과 노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삶의 결핍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호세아 3:5 (NKRV)
5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 가리라
새번역으로 보겠습니다.
호세아 3:5 (NKSV)
5그런 다음에야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서, 주 그들의 하나님을 찾으며, 그들의 왕 다윗을 찾을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떨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을 것이다.
새번역은 여호와의 은총을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번역했습니다. ‘토브’라는 단어인데 은혜, 좋은 것, 아름다운 것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번역한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10 (NKRV)
1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을 때 삶의 결핍이 사라지고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하고 추구하여 얻은 것들은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선물을 받게 되면 더 목마르지 않고, 즉 결핍을 느끼지 않고 완전한 만족과 기쁨가운데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영원한 만족을 누리며 솟아나는 샘물처럼 솟아나는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호세아가 말한 마지막 날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분을 믿게 되면 그 분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히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선물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마치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고멜을 돈을 주고 사오듯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값을 지불하고 죄의 노예, 사단의 노예였던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신부의 자리로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성령님을 우리 안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결코 부족함이 없습니다. 날마다 솟아나는 샘물처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앞에 계신 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을 찾아오신 분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그녀는 물동이이를 버리고 동네로 달려가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4:28–29 (NKRV)
28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물동이를 버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녀가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도구 삼았던 것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선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자기 삶이 채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무엇을 갈망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삶을 채우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아셨지만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아십니다. 자기 유익과 만족을 위해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의 돈과 명예도 섬길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아십니다.
그러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요한복음 13:1 (NKRV)
1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사랑에는 베드로도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롯유다도 포함됩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지만 예수님은 그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집 나간 아들을 날마다 기다리시며 돌아오길 바라는 아버지입니다. 거지꼴을 하고 돌아온 아들을 나무라지 않고 새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며 잔치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호세아 3:5절의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라는 문장을
새번역은 “이스라엘 자손이 떨면서 주님께 나아가”로 번역했고
공동번역은 “이스라엘이 벅찬 마음으로 야훼께 돌아와” 로 번역했습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탕자의 모습입니다. 호세아의 사랑을 깨닫고 돌아가는 고멜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 꿇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경외하고, 그 사랑에 떨면서, 그 사랑에 벅찬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호세아 3:1 (NKRV)
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다른 신을 섬길지라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때로 세상 쾌락과 즐거움에 마음이 빼앗겨 하나님을 떠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우리에게 마침내 하나님께서 내미신 선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알고 믿으면 삶이 가득 채워집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참된 만족과 기쁨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