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강해 5. 교회 안에 우상숭배
호세아 4:11–19 (NKRV)
11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12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13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14너희 딸들이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15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
16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그들을 먹이시겠느냐
17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
18그들이 마시기를 다 하고는 이어서 음행하였으며 그들은 부끄러운 일을 좋아하느니라
19바람이 그 날개로 그를 쌌나니 그들이 그 제물로 말미암아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바알 신전에서 풍요와 다산을 위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십니다.
11절에 보면,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를 먹었습니다. 음행은 바알을 흥분시키기 위해 신전 창기와 몸을 섞는 의식을 말합니다. 이때 포도주를 먹고 술기운에 취한 채 난잡한 성행위를 했습니다. 12절에 나무에 물었다는 것은 아세라 목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묻고 답을 구했다는 것은 마치 무당에게 찾아가 자신의 미래를 점치는 것과 같습니다.
13절에 산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고, 작은 산 위에서 분향했다는 것은, 당시 우상 제단이 산 위에 있었고 주변에는 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이곳에서 음란한 풍요 다산 제의가 진행된 것입니다.
충격적인 것은 이 모든 우상 제사는 이방인들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들이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면 교회의 성도들이 우상 제사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단지 소수의 사람이 아니라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러한 우상 숭배에 물들었습니다.
호세아 4:14 (NKRV)
14너희 딸들이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죄를 범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14절에 “깨닫지 못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깨닫지 못했을까요? 자신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긴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와 우상을 섬기는 것이 분명히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다 점차 혼합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우상을 섬기는 것에 대한 구별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 결과 우상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소에서 우상숭배가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호세아 4:15 (NKRV)
15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
두 지명이 등장합니다. 길갈과 벧아윈입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길갈은 어떤 곳이가 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건넌 후 첫 번째로 진 친 곳입니다.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첫 번째 밞은 가나안 땅이 길갈입니다.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요단강에서 가져온 열두 돌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하지 못했던 할례를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곳 이름을 길갈이라고 명하셨습니다. 애굽의 수치가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수아 5:9 (NKRV)
9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벧아윈은 벧엘을 의미합니다. 벧엘은 우리가 잘 압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 가던 중 꿈에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 곧 ‘벧엘’로 불렀습니다. 사사시대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길갈에서 벧엘로 옮겨져 성막이 세워짐으로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한 역사적 장소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단이 세워지고 예배의 성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곳이 ‘벧엘’이 아닌 ‘벧아윈’ ‘우상을 숭배하는 집’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소에서 우상을 숭배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하면서 우상을 함께 섬겼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혼합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쿤틸렛 이즈롯
사진은 쿤틸렛 아즈롯의 명문입니다. 시내 반도의 요새 유적지 쿤틸렛 아즈롯에서 커다란 항아리가 발견되는데 그 파편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주전 8세기로 추정됩니다. 그림은 이집트의 신 가운데 하나인 베스로 보고 있습니다. 쓰여있는 글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사마리아의 야훼와 그의 아세라에 의지하여 너희를 축복한다”
주전 8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키르벳 엘 콤 비문에도 이런 문장이 등장합니다.
“우리야후는 아훼께 복받기를. 이는 원수들에게서 그분께서 그분의 아세라를 통해 구원하셨음이다”
우상의 이름과 야훼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혼합의 모습은 이미 가나안땅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종교가 혼합되는 현상은 대부분 치병기복(治兵奇福)신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인생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질병이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려는 방편 중 하나로 종교를 의지하게 됩니다. 현대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질병 앞에서 사람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종교를 찾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일 수도 있고, 불교나 무당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기복도 종교를 찾는 이유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속에서 신을 찾기도 하고 풍요롭고 안정된 삶을 기원하기 위해 신을 찾기도 합니다.
인간이 종교를 찾는 것은 결국 인간의 절망적 현실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방편으로 신을 찾는 것입니다. 창조주에 관한 관심이나 진리에 대한 탐구로 신을 찾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 절망적 현실 앞에서 신을 찾습니다.
이런 동기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한 분들이 많습니다. 대부분 신앙의 1세대들입니다. 저희 가정 또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아프셨고 의학으로 치료되지 않는 상황속에서 어머니의 간청으로 근처 교회 전도사님과 두분의 성도님이 오셔서 일주일 동안 기도하시는 중에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되고 저희 가족을 비롯한 친인척들까지 구원을 받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대부분 평안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극복할 수 없는 삶의 문제를 통해 부르실 때가 많습니다. 절망적 질병, 경제적 어려움, 가족 간의 갈등, 자녀들의 문제, 또는 삶의 외로움과 허무 등을 통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절박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군신지는 잘 모르지만, 예배하고 성경을 듣고 배우면서 점차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주변의 신앙인들과 교제하면서 조금씩 신앙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는 중, 자신의 죄인이 됨을 깨닫게 되고, 그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키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게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붙들었고 그 결과 하나님을 믿고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바른 신앙적 태도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과 사람들의 인정과 평가,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 백성의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사모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른 신앙의 자세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이후에도 여전히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세속적 부와 명예, 성공과 쾌락을 버리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에 풍요와 안정 그리고 문제해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금도 드리지만, 그 모든 것의 목적은 자기 삶의 풍요와 안정 그리고 문제해결에 있습니다. 거룩하고 순결한 삶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안정되고 연봉이 높은 기업에 취업하고, 아파트 평수가 넓어지고, 자산이 많아지고, 자녀들에게 더 많은 것을 물려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드리는 간절한 기도의 대부분이 이것을 위한 것입니다.
치병기복으로 시작한 신앙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치병기복 신앙은 무속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치병기복으로 신앙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성도가 계속해서 이 신앙을 붙들고 있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이들은 무속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 안에 혼합종교의 모습입니다.
저는 3년 동안 분당에 있는 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한 적이 있습니다. 새해가 되면 대심방을 합니다. 하루에 많게는 30분 단위로 20가정을 심방 합니다. 여전도사님과 총무 권사님, 지역장, 구역장님이 참석합니다. 한 주 정도 지났을 때 여전도사님과 총무 권사님 할 말이 있다고 저를 부르셨습니다. 당시 저는 30대 중반의 젊은 목사였고 두 분은 50대 중반이었습니다. “목사님, 그렇게 말씀을 전하시면 안 됩니다.” 순간 굉장히 당황했습니다.
“제가 성경을 잘못 전한 게 있습니까”
“아니요, 목사님, 축복 설교를 해야지요. 그리고 기도도 복을 빌어주는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이후 저는 자연스럽게 축복 설교를 위주로 했고 기도로 축복을 빌어주었습니다. 하루에 열가정 이상을 심방 하니 점점 능숙하게 되었습니다. 기도 제목을 쓴 종이 밑에 돈을 넣어둔 봉투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났을 때 저는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무당과 다름없는 목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성도들을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통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해야 합니다. 그러나 축복만 간구하는 것은 무속신앙과 다름없습니다. 때로는 욕을 먹더라도 성도들의 죄를 지적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속신앙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러한 무속신앙이 뿌리 깊게 내려 있습니다.
그 결과 건물은 커지고 성도들은 늘었지만 거룩함과 순결함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능력은 거룩함과 순결함에서 나옵니다. 세상을 대적하여 이길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순결한 자신의 백성들에게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능력을 주십니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골리앗과 같은 세상과 싸우면서 골리앗이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자녀들이 골리앗이 되게 해주십시오.” 기도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골리앗처럼 거대해지는 것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골리앗처럼 커졌고, 믿음의 자녀들이 골리앗처럼 되었습니다. 세상적 명예와 권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때 교회는 청년들에게 골리앗이 되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성공한 청년들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아니요. 교회를 떠났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성공이 아닙니다. 능력을 갖추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과 성도들이 가는 길은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거룩하고 순결한 자녀들로 현실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십니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에게 큰 상처와 절망을 안겨준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건을 대하면서 우리의 현실적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은 침몰하는 세월호와 같습니다. 배 안에 있는 자녀들에게 “여러분, 이 배는 안전합니다.”라고 외쳤고 그것을 믿고 있었던 학생들은 세월호와 함께 침몰했습니다. 자녀들의 꿈과 미래 또한 함께 침몰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세월호로 자녀를 부모님들 가운데 어떤 분들이 그나마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를 얻었을까? 공부를 잘하는 자녀를 둔 부모겠습니까? 돈 많은 집에서 자란 자녀를 둔 부모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던 자녀를 둔 부모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만났으니 과도한 슬픔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미래는 우리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내가 과거에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여기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있는가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성도들이 왜 혼합주의 신앙에 빠질까요? 무엇 때문에 세상의 성공과 명예와 쾌락을 사모하게 되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게 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몇 단계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마음이 빼앗기는 단계입니다.
호세아 4:11–12 (NKRV)
11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12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성도들이 기복주의, 혼합주의, 샤머니즘에 빠지는 첫 번째 단계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이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가까운 친구나 직장 동료, 이웃의 삶을 보니까 부러운 것입니다. 돈 벌어 차 바꾸고, 좋은 집에 이사 가고 하는 것 보니까 부러운 것입니다. 주일에 여행가고 좋은 음식 먹고 하는 것 보니까 부러운 것입니다. 그러한 삶에 마음이 빼앗기는 것입니다.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게 됩니다.
다음 단계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부러워하다가 그들처럼 살아갑니다.
호세아 4:13–14 (NKRV)
13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14너희 딸들이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하나님의 백성이 이교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예배합니다. 이방인들이 음란하게 바알을 섬긴 것은 바알이 풍요와 다산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풍요와 다산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바알을 섬긴 것은 풍요와 다산을 사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이 처음에는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다 점차 그들의 삶에 동화되어 져 갑니다. 그들의 추구하는 돈과 명예와 쾌락에 마음이 빼앗기다 그들처럼 살아갑니다.
세 번째 단계는 우상과 연합하는 단계입니다.
호세아 4:17 (NKRV)
17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할 성도들이 우상과 연합된 것입니다. 우상이 성도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입니다. 귀신과 연합한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말씀이 들어가 틈새가 없습니다.
호세아 4:19 (NKRV)
19바람이 그 날개로 그를 쌌나니 그들이 그 제물로 말미암아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
바람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루아흐’, ‘영’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저는 바람을 악한 영으로 봅니다. 악한 영이 그 날개로 그를 쌌나니. 완전히 장악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부러워하고 마음이 빼앗기다, 그들과 어울려 살면서 동화돼 가다 마침내 악한 영과 연합됩니다.
마음이 빼앗긴 성도들은 그나마 말씀이 들어가 틈새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상과 연합한 성도들은 강력한 징계가 아닌 이상 회복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하나님의 징계 채찍으로 균열을 만들고 그 사이로 말씀이 들어가게 하시기도 합니다.
시편 1:1 (NKRV)
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습니다. 3단계입니다. 뒤집어 이해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는 자들은 처음에 악인들의 꾀를 따릅니다. 그들을 부러워하고 마음이 빼앗긴 상태입니다. 죄인들의 길에 섭니다. 동화된 것입니다. 결국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습니다. 악한 자들과 연합한 상태, 우상과 연합된 상태를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순간에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아주 조금씩 하나님을 떠납니다. 사단은 한순간에 추락하게 하지 않습니다. 경사로를 만들어 조금씩 내려가게 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돌아보면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입니다.
CS 루이스가 쓴 <스크루 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에서 사단이 조카 웜우드에게 성도를 어떻게 지옥으로 보낼 것인지를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사실 가장 안전한 지옥행 길은 한걸음 한걸음 가게 되어 있다. 그것도 경사가 완만하고, 걷기도 쉬운 데다가, 갈림길도, 이정표도 표지판도 없는 길이지.”
우리의 싸움은 항상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세상입니까?
사단의 공격도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13:2 (NKRV)
2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4:9 (NKRV)
9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의 마음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아들과 손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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