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강해 11.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호세아 10:1–15 (NKRV)
1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2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3그들이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4그들이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초 같으리로다
5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의 영광이 떠나감이며
6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야렙 왕에게 드리리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책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7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있는 거품 같이 멸망할 것이며
8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9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하더니 지금까지 죄를 짓는구나 그러니 범죄한 자손들에 대한 전쟁이 어찌 기브아에서 일어나지 않겠느냐
10내가 원하는 때에 그들을 징계하리니 그들이 두 가지 죄에 걸릴 때에 만민이 모여서 그들을 치리라
11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12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13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14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무너지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 될 것이라 그 때에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부서졌도다
15너희의 큰 악으로 말미암아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
호세아는 마치 부모의 훈계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책망하고 징계하시지만, 목적은 정죄나 심판이 아닙니다.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졌지만, 그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훈계와 징계를 통해 죄를 깨닫고 돌이키길 원하십니다.
지난 시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기브아 시대와 같이 타락했다고 한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너희가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스러운 나의 자녀, 나의 신부였다고 합니다.
호세아 9:10 (NKRV)
10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보면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이스라엘을 만날 때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았고, 그들을 바라볼 때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은 첫 열매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자녀, 연인을 만나고 바라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변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품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정기적인 예배와 기도를 드렸습니다. 헌금도 드리고 봉사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사람의 변화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타락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 마음에 하나님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지적하시는 내용입니다.
호세아 10:2 (NKRV)
2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새번역 성경은 “그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 찼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두 마음 중 하나는 거짓일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했습니다. 하나님 보다 자기를 더 사랑했습니다.
마태복음 6:24 (NKRV)
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들은 불가능한 도전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재물도 사랑한 것입니다. 사실, 재물을 사랑한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다는 것
이스라엘의 죄는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두 마음을 품게 되는 이유는 세상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세상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풍조, 가치관, 삶의 방식을 거부해야 합니다. 모두가 옳다고 할 때,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미움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15:19 (NKRV)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오리들이 함께 사는 백조를 미워하듯,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합니다.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환난을 겪습니다.
요한복음 16:33 (NKRV)
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당하지 않아도 될 미움과 겪지 않아도 될 환난을 겪습니다. 이 미움과 환난은 교회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때 성도들은 자기 입장(스탠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세상에 동조할 것인지, 아니면 미움과 환난을 겪으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인지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동조하여 살아가는 편이 쉽습니다. 물론 여전히 예배와 기도 그리고 봉사하면서 말입니다. 적당히 세상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추구해도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입니다. 바로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에 있으면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종교적 형식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 있고 나조차도 속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선언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임을 입증할 수도 있습니다.
호세아는 두 마음의 상태를 이렇게 비유합니다.
호세아 10:1 (NKRV)
1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포도나무는 하나님의 백성을 비유합니다. 무성한 포도나무인 것은 풍족한 삶을 표현합니다. 풍족할수록 제단을 세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제단입니다. 주상은 제단에 세워지는 석상이나 돌기둥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헌신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겉모습일 뿐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제단을 세우고 주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습니다. 중세시대 세워진 화려한 교회 건물을 보십시오. 그 안에는 온갖 주상들과 성화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고백들과 서약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호세아 10:4 (NKRV)
4그들이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초 같으리로다
사람들은 헛된 말인지, 거짓 맹세인지 모릅니다. 나조차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내가 하나님께 했던 그 많은 고백의 말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하나님께 했던 맹세들이 얼마나 거짓 된 것인지 말입니다. 그것으로 자신을 포장하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의 두 마음의 상태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고치길 원하십니다.
그 방법이 바로 징계입니다.
호세아 10:10 (NKRV)
10내가 원하는 때에 그들을 징계하리니 그들이 두 가지 죄에 걸릴 때에 만민이 모여서 그들을 치리라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 그의 백성이 죄를 깨닫고 돌이키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두 마음을 품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십니다. 그들은 30년 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합니다.
호세아 10:9 (NKRV)
9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하더니 지금까지 죄를 짓는구나 그러니 범죄한 자손들에 대한 전쟁이 어찌 기브아에서 일어나지 않겠느냐
여로보암 2세 때 물질적 번영을 누렸지만 30년이 가지 못해 멸망합니다. 하나님은 앗수르를 통해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만일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경고 메시지를 듣고 돌이켰다면 어떠했을까요?
하나님은 즉각 심판하지 않습니다. 경고하시고, 충분히 돌이킬 기회와 시간을 주십니다.
베드로후서 3:9 (NKRV)
9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럼에도 심판을 받는 것은 끝까지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심판받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끝까지 돌이키지 않기 때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회복해야 할 마음은 무엇일까요? 두 마음이 아닌, 한 마음의 상태, 거짓된 마음이 아닌, 참된 마음은 무엇일까요?
호세아 10:12 (NKRV)
12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그것은 공의와 인애입니다. 공의와 인애는 하나님이 성품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세상에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1)공의
공의는 히브리어로 ‘체다카’입니다. 올바름, 정의, 법률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이 올바른 것입니다. 무엇이 정의입니까? 하나님 말씀입니다.
기브아 시대에는 무엇인 올바른 것이었고, 무엇이 정의였습니까? 각자의 소견이었습니다.
사사기 21:25 (NKRV)
25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오늘날 각자의 소견이 옳다는 것을 인정할 때 교양 있고 관용 있는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누군가 이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면 외골수, 꼰대 취급을 당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성경이 진리라고 외칩니다. 너도 옳고 나도 옳은 것이 아니라, 성경만이 진리라고 외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성경은 캐논 즉, 잣대이고 기준입니다.
두 마음 품은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공의,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공의를 심으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의 기준이요 원칙으로 심으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공의의 말씀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시공간을 창조하시며 그 속에 피조물을 하나씩 창조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피조물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상태로 있을 때 그것이 공의입니다. “좋았더라”는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선하다는 의미입니다. 선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악한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선한 것이 공의로운 것이고 공의로운 것이 선한 것입니다. 선한 것, 공의로운 것의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여론을 모아 이것이 선하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면 악입니다. 모두가 악하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면 선입니다. 선과 악은 우리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만일 이 진리를 거부하거나 무시하게 되면 세상은 급속하게 무질서와 혼동에 빠지게 됩니다. 그 혼돈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기브아 시대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대로’가 아니라,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왜 사람은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려고 하는 것일까요?
호세아 10:3 (NKRV)
3그들이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므로” 너무나 정확한 진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왕이 되셔서 통치하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내가 내 삶의 왕 노릇 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살고 싶은 것입니다.
벨기에의 저명한 정신분석학자인 ‘파울 페르하에어’는 그의 책 “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에서 이 시대의 문제를 ‘권위의 부재’로 진단합니다.
각종 육아·교육 지원 제도와 기술이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교사의 번아웃은 줄지 않고” “과잉행동장애 또는 품행장애를 진단받는 소아·청소년과 학생들로부터 괴롭힘과 폭력을 당하는 교사의 수는 증가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권위의 부재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권위란 ‘권위주의’나 ‘권력’으로의 권위가 아닌 “인간관계를 규제하는 기능”을 말합니다. 저자는 이런 권위가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더 나은 사회 구성의 근간이라고 강조한다. 저는 그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인정했던 권위를 무시하기 시작하면서 급속하게 혼란에 빠지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교사의 권위는 무너졌고, 가정에서 부모의 권위가 무너졌습니다. 직장에서 상사의 권위가 무너졌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권위 아래, 가정으로부터 시작하여 직장, 학교 등의 권위를 분명하게 세우고 있습니다. 그 권위에 복종하라고 하십니다.
만일 수술실에서 환자를 앞에 두고 집도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다수결로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집도의의 권위 아래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때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흔드는 순간 자신이 속한 공동체, 가정, 직장, 국가는 혼란을 겪게 됩니다. 자녀가 아버지의 권위를 흔들 때 가정이 바로 설리 없습니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로마서 13:1–2 (NKRV)
1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2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우리가 위에 있는 권위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위에 있는 권위를 흔들고,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일까요?
호세아 선지자는 정확하게 진단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로마서 13:3 (NKRV)
3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부모에게 대드는 자식은 부모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식을 훈계하거나 교육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죄짓는 것이 쉬워집니다.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징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십니다. 지렁이를 밟으면 꿈틀대는 것은, 꽉 밟지 않아서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만큼 징계합니다. 작은 징계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그 징계는 작을 것입니다. 그러나 몇 번의 징계로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그 징계는 강력하게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꽉 밟혀 꿈적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으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 말씀을 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흔드는 책이나 영상은 피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좋지 않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공의를 심으셔야 합니다.
두 번째, 우리가 회복해야 할 마음은 인애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인애를 심고 공의를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공의, 즉 하나님 말씀의 질서와 원칙을 심으면 그 결과 인애를 거두게 됩니다. 인애는 원어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긍휼, 자비하심을 말합니다. 죄인을 향한 긍휼함을 말합니다.
우리는 말씀안에서 하나님의 인애를 체험합니다. 하나님이 나같은 죄인을 어떻게 용납하셨고 사랑하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 안에 인애가 흘러나옵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잘못한 사람을 인애로 대하게 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니라, 오히려 긍휼히 여기고 기도해 줍니다. 이해하고 용납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면서 동시에 인애가 풍성한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변치 말아야 할 기준, 질서, 원칙을 말씀하시고 그 말씀에 불순종할 때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순종하는 자들을 인애로 대하십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돌이키길 원하시고 언제든 돌이켰을 때 받아 주십니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공의로우면서 인애로우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모습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해 단호하셨지만,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기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동성애에 대해 우리가 취할 태도는 공의와 인애입니다. 동성애는 죄입니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인애가 없이 공의의 잣대로 사람들을 대하면 바리새인 같아지는 것입니다. 공의의 잣대를 들이대면 우리 중 누구도 떳떳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애로 우리를 대하시기에 죄 용서함을 받았고,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 품에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애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묵은 땅을 기경해야 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묶은 땅을 기경하라”하십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묵은 땅이 무엇일까요? 여러분 안에 묵혀둔, 은사, 재능, 사명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기도하지 않으면 묵은 땅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방언의 은사를 받은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주신 은사입니다. 그러면 자주 방언으로 기도하셔야 합니다.
각자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를 묵혀 두어서는 안됩니다. 특정한 사람만 헌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각자에게 주신 은사, 물질, 재능을 사용해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고등부 아이들을 위해 재능 기부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은사와 재능을 묵혀두지 않고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묵은 땅은 무엇입니까?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까?
네 번째, 즉각적 회심과 헌신입니다.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라고 말합니다.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실지 그렇지 않을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두 마음이라면, 지금 회개하고 돌이킬 때입니다.
결론입니다.
자신을 위해 공의, 인애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십시오.
그 일을 지금 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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